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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키드론 골짜기(시내) 건너서 (요한 18:1-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07 조회수3,019 추천수0 반대(0) 신고

 

공동번역성서

키드론 골짜기(시내) 건너서

(요한 18:1-11)

1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 가셨다. 2 예수와 제자들이 가끔 거기에 모이곤 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잡아 줄 유다도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과 함께 한 떼의 군인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무장을 갖추고 등불과 횃불을 들고 있었다. 4 예수께서는 신상에 닥쳐 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5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잡아 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께서 다시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고 대답하였다. 8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9 예수께서는 '나에게 맡겨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10 이 때에 시몬 베드로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아멘

 

이제 긴 시간을 통과해서 본격적인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자리에 당도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공부할 요한복음 18장부터 21(21장이 마지막입니다)까지의 내용은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이에요. 어느덧 이제 요한복음도 거의 끝나갑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나머지 공관 복음서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론을 보여줘요. 성경을 좀 주의있게 읽어보신 분들은 아주 재미나게 읽으셨을텐데. 아시다시피 다른 세 공관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장면들이 아주 감상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기도를 하시면서 땀이 피가 되도록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신 장면이라든지, 하느님 아버지께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는 부탁을 반복해서 하는 그런 장면이라든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그런 애절한 호소같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그런 내용들이 세 공관 복음서에는 공히 다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런 장면들이 요한복음에는 몽땅 생략돼 있습니다. 심지어 겟세마니 기도 장면은 완전 통편집이돼서 요한복음만 보고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바로 전에 기도를 하셨다는 사실조차 전혀 알 수 없도록 요한복음은 여러가지를 생략하고 있어요

 

 그냥 키드론골짜기를 건너서 동산으로 가셨는데 바로 유다가 왔죠? 아닙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이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하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걸 전체를 다 빼 버렸단 말이예요. 제가 몇 군데만 짚어 드리죠.

(마태 26:36-47) 36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게쎄마니라는 곳에 가셨다. 거기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38 예수께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그들에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39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40 기도를 마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 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41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하시며 한탄하셨다. 42 예수께서 다시 가셔서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하셨다. 43 그리고 제자들에게 돌아오시니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나 지쳐서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44 하는 수 없이 제자들을 그대로 두시고 세 번째 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45 그리고 제자들에게 돌아 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 때가 왔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 손에 넘어 가게 되었다. 46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47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 두 제자의 하나인 유다가 다가왔다. 그를 따라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몰려 왔다.

 

요한복음에는 이 내용이 싹 빠져있죠.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십자가를 얼마나 힘들어 하시고 슬퍼하시고 고통스러워 하셨는지가 마태복음엔 이렇게 절절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요. 얼마나 힘드셨으면 제자들에게도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다' 라고 그렇게까지 제자들에게까지 당신의 속내를 드러내셨습니다. 웬만하면 스승이 제자들에게 그런 말 안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굉장히 힘들었다는 그런 모습을 마태오는 그리고 있어요. 그리고는 하느님께 반복해서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를 하세요.

(마르 14:32-36) 32 그들은 게쎄마니라는 곳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앉아 있어라' 하시고 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34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35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하시며 36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마르코도 역시 잡히시기 전의 예수님의 고민과 아픔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어요.

    묵주기도의 의미

(루가 22:39-46) 39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밖으로 나가 올리브산으로 가시자 제자들도 뒤따라 갔다. 40 예수께서는 그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시고는 41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거리에 떨어져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42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45 기도를 마치시고 일어나 제자들에게 돌아 와 보시니 그들은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 46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 이렇게들 잠만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역시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어요. 왜 요한복음에만 그런 모든 내용이 빠져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 자체에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요한 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사복음서가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씌여져 있기 때문에 복음서가 다 조금씩 달라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특히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 분이 그리스도이며 그를 믿어서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가를 가르쳐 주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요한이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나약한 면을 다 빼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예수님의 크심과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예수님의 하느님 되심이 드러날 때 상대적으로 그 대척점에서 폭로되어져야 하는 게 뭘까요? '예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과 하느님 되심'이 부각이 되기 위해서는 그 대척점에서 뭐가 드러나야 돼요? '인간들의 나약함 더러움 추악함' 이런 것들이 확연하게 대조가 되어 드러나야 돼죠?

 

그래서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빛이 왔는데 그 무식한 놈들이 못 알아보더라' 로 시작되는 거예요. 완전히 극명하게 대조를 시켜서 인간들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완전히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크심 하느님 되심 위대하심을 더 크게 부각을 시키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절로 가볼게요.

(요한 1:5,10,11)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10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11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시작뿐이 아니에요.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제자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반복하여 폭로해요.  다른 공관 복음서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후에 나가서 통곡하고 회개했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그 내용을 싹 빼버려요. 베드로를 더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회개했다는 말 싹 빼 버려요. 울었다는 말도 빼 버립니다. 그냥 저주하여 부인했다.

 

(마태 26:73-75) 73 조금 뒤에 거기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 오며 '틀림없이 당신도 그들과 한 패요. 당신의 말씨만 들어도 알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74 그러자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 바로 그 때에 닭이 울었다. 75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

통곡했단 말이에요 통곡~ 마태복음에 지금~

그뿐만 아니에요. 요한은 토마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의 어처구니없는 '불신앙'을 낱낱이 폭로해요. 다른 복음서에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 걸 요한만 끌어다가 마치 이야기를 꾸며낸 것처럼 그런데 실지로 있었던 일이죠? 그런 일들을 착착 갖다 대서 우리 인간 측의 무력함을 완전히 적나라하게 드러내 버려요. 요한복음 20장으로 가볼게요 

(요한 20:24-29) 24 열 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동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토마와 제자들이 지금 수군대고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벽을 뚫고 들어와 버리셨어요. 그리고는 손과 발과 옆구리를 다 보여 주셨어요. '봐라' 그랬더니 토마가 깜짝 놀래서 '진짜네'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라고 고백을 했어요. 그러면 그 뒤부터 무슨 일이 일어났어야 되는데 그 바로 그 밑에 그 다음 장에 어떤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복음 21장으로 가서 한번 볼까요 

(요한 21:1-3) 1 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동이라는 토마와 갈릴레아 가나 사람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그 밖의 두 제자가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3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그 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 ~ 금방 지금 예수님이 지금 옆구리랑 손이랑 다 보여줬잖아요.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느님입니다' 고백했어요. 그런데 이 웬수들이 전~부 고기 잡으러 가 버렸어요 다시~ 인간들의 연약함이예요 나약함입니다. 그 안에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뭐 대단하게 훌륭한 '성자'가 금방 될 거라고 착각들 하시는데 우리 안에는 이런 모습이 없나요?  

이건 너무 극단적인 예를 지금 요한이 들어서 그렇지 우리 안에는 이거보다 더 지저분하고 유치한 일들이 더 많이 나오죠?

우리는 고기만 잡으러 가요? 그러면 다행이게요? 게다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이 지상 대명령등의 그 장엄한 모습으로 결론지어지는 것과는 달리 베드로의 그 어린 아이같은 질문으로 끝나요. 요한복음은 굉장히 어설프게 끝납니다. 어떻게 끝나요? '쟤는요~?' 이거로 끝이에요. 다른 복음서는 어때요?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느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 이렇게 다 끝나는데 요한복음은 베드로가 '쟤는요~?' 그걸로 끝이에요. ? 왜 그렇게 어설프게 끝나겠어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면 언제든지 그 자리로 내려간다라는 걸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죽는 날까지 하느님만 붙들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요한은 정말 구구절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21장으로 가보죠

(요한 21:21-23)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22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다만 '설사 내가 돌아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 이렇게 쟤는요? 로 끝나요 요한복음은. 반면에 다른 공관복음은 어떻게 끝이 나는지 쪼금씩만 한번 보죠.

 

(마태 28:18-20) 1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멋있죠 그죠? '승리와 찬양과 성공과 영광' 이런 걸로 다 끝난다고요.

 

(마르16:15-20) 1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될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도 쫓아 내고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18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며 또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19 주님이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다 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 20 제자들은 사방으로 나가 이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으며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전한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셨다.

역시 승리와 영광과 찬양으로 끝나요.

 

(루가 24:49-53) 49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50 예수께서 그들을 베다니아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 51 이렇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 가셨다. 52 그들은 엎드려 예수께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53 날마다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이게 공관복음서의 결론이에요. 마지막이에요. 전부 다 굉장히 위대한 승리와 영광과 찬양으로 끝이 나요. 유독 요한복음만 그냥 아주 유치찬란한 베드로의 질문으로 끝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줄곧 인간의 연약함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대조시켜 가면서 그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그 속에서 '은혜의 복음'이 오롯이 드러나게끔 그렇게 지금 장치를 해 놓은 거예요. 인간의 무력함과 연약함을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 버리고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확 드러내 버리면 그 간격이 있잖아요. 그걸 뭘로 채워요? '은혜'로 채워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예수가 하느님이시며 그 분이 바로 구원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믿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썼기 때문에 여러가지 다른 사건들 실제 일어나는 사건들을 빼 버리고 다른 이야기들을 네러티브 안에 넣어서 그렇게 구성을 한 거란 말이에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예수님의 당당함을 제가 몇 군데 더 소개해 드릴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을 체포하러 온 군사들에게 '너희들이 찾는 사람이 누구냐?' 라고 이렇게 물어보세요 그죠? 다른 복음서에는 그 말 안 나와요. 그런데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만 '니들이 찾는 게 누구냐?!' 라고 얘기를 한다고요.

그때 '나자렛 예수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내가 바로 그 이다' 그래요. 그걸 헬라어로 하면 '에고 에이미' 예요. 영어로는 'I am who I am' 누구 이름입니까? 하느님의 이름이에요. 야훼의 이름.'내가 하느님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무 당당하죠 요한이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강력하게 아주 강하게 강조하여 거기다가 집어넣고 있는 거예요. 그랬더니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땅에 전부 나가 떨어지죠. 뭐 혹자들은 많은 주석가들이 하느님의 이름이 확 선포가 되면은 사람들이 그렇게 뻥 나가 떨어지게 돼 있다라고 얘기를 하는데 바로 그 밑에서도 또 'I am who I am. 에고 에이미' 그러는데 그때는 안 떨어져요. 바로 밑의 절을 안 읽으신 거예요 그분들은요.   

(요한 18:4-6) 4 예수께서는 신상에 닥쳐 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5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잡아 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내가 하느님이다' 그랬더니 그 하느님의 권세 앞에서 세상이 전부 엎으러 지더라 이걸 보여 주는 거예요. 지금은 굉장히 연약한 모습으로 와 계시지만 그 분의 하느님 되심 앞에서 전부 나가 떨어져 엎으러질 것이다 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이렇게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민하는 모습이나 징징대는 모습,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아버지~ 이 잔 좀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세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말이 싹 빠져있단 말이에요 

법정에서는 어땠어요? 예수님이 법정에서 '내가 왕이다' 라고 이야기하신 것도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히 빌라도 앞에서 '니가 왕이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래 내가 왕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이 세상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당당한 모습들만을 요한이 픽업을 해서 다 기록을 해놨어요.

(요한 18:33-37) 33 빌라도는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 가서 예수를 불러 놓고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하고 물었다. 34 예수께서는 '그것은 네 말이냐? 아니면 나에 관해서 다른 사람이 들려 준 말을 듣고 하는 말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5 빌라도는 '내가 유다인인 줄로 아느냐? 너를 내게 넘겨 준 자들은 너희 동족과 대사제들인데 도대체 너는 무슨 일을 했느냐?' 하고 물었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 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37 '아뭏든 네가 왕이냐?' 하고 빌라도가 묻자 예수께서는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대답하셨다.

 

재판을 받는 사람의 불안함이나 비굴함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요한은 일부러 이런 담대한 국면들을 많이 기록을 해요. 심지어 주님의 연약한 모습을 피치 못하게 기록할 때도 항상 토를 달아줘요. 요한복음 1928절 보세요.

(요한 19:28-30) 28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29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꿰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 드렸다. 30 예수께서는 신 포도주를 맛보신 다음 '이제 다 이루었다' 하시고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목이 마르셨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에 '아이 목말라' 그럼 뭔가 연약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요한이 바로 그 뒤에다가 그건 '성경이 이뤄지게 하려고' 그런 것이다 라고 토를 탁 붙여버리죠. 예수님이 연약해서가 아니라 성경이 이뤄지게 하시려고 그런 연약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라고 변명을 해줘요. 돌아가시는 장면도 그래요. 요한은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자 영혼이 돌아가셨다' 그래요. 원래 죽음이 인간을 덮치면 그 공격의 결과로 머리가 숙여지는 거예요. 영혼이 떠나야 숙여지는 건데 요한은 그 반대로 기록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 하고 마치 '죽음아 때가 됐으니 가자!' 라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시니까 사망이 마지못하여 '그래 가자.' 로 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숙이시자 영혼이 돌아가시다 라고 이렇게까지 기록을 한단 말입니다. 마치 그 사망의 주관자가 예수인 것처럼! 그렇게 기록을 한단 말예요. 이렇게 복음은 우리의 티끌됨이 폭로되고 하느님 은혜의 위대함이 오롯이 드러나는 거예요. 바로 그 복음이 요한복음의 결론부 18장 이후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한번 보잔 말이에요.아니 그냥 뚜들겨 맞고 죽은 내용 밖에 없는데 거기 무슨 복음이 들어가 있는가 한번 보세요

(요한 18:1) 1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 가셨다.

여기에 연결이 되는 거예요 지금 17장하고.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17장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의 실제화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고' 라는 어구를 앞에다 놓고 그 이후부터 사건을 쭉 나열해 가는 거예요. '이제 예수님의 기도가 실제화하여 일어난다' 라고 이야기 해주는 거죠?

  이스라엘 : 키드론 계곡

요한은 예수님께서 키드론골짜기 저편으로 나가셨다고 기록을 하고 있어요. 요한복음에서만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요. 다른 복음서에서는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셨다, 동산으로 가셨다,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요한복음에서만 굳이 '키드론골짜기를 건너셨다' 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키드론골짜기 저편은 올리브산이에요. 그 올리브산에 예수님이 자주 기도하셨던 겟세마니 동산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굳이 요한만 예수님이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셨다 라고 하지않고 굳이 '키드론골짜기 저편으로 가셨다' 라고 기록을 했는가.

여러분 구약에 보면 키드론골짜기를 건넌 비운의 왕이 한 분 계세요. 누굽니까? 다윗이죠 그죠? 다윗이 키드론골짜기를 건너요. 아들에게 배신당하구 그리고 최측근 참모였던 아히도벨에게 배반을 당하고 키드론골짜기를 건너갑니다. 뭔가 연관이 있는 것 같지 않으세요? 요한이 지금 그 얘길 끌어다가 오버랩시키고 있는 거예요.

(사무엘하 1522-23) 22 그리하여 다윗은 이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서 지나가시오.' 갓 사람 이때는 부하들과 딸린 아이들까지 모두 이끌고 지나갔다. 23 온 백성이 광야 쪽으로 나가려고 키드론 개울을 건넜고 왕도 따라 건넜다. 사람들이 개울을 건너면서 통곡하는 소리에 산천도 따라 울었다.

다윗이 압살롬의 모반으로 키드론골짜기를 건너가게 되죠? 최측근 모사였던 아히도벨도 압살롬에게 가버려요. 그런데 하느님이 어떻게 하세요? 아히도벨의 그 책략도 아주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시고 압살롬도 헤베르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결국 그 둘, 압살롬은 나무가지에 머리가 꽂혀서 요압에게 살해되고 아히도벨은 목매달아 죽습니다. 어떤 그림이 떠오르세요?

 

예수님의 최측근 유다가 예수를 배반했어요. 그래서 이 유다의 편이 승리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예수님이 승리하셨죠? 다윗이 키드론 골짜기(개울)를 넘어갈땐 누구도 다윗이 승리할 걸 몰랐어요그런데 하느님이 개입을 하시니까 키드론골짜기를 건너 어두움을 향해 갔던 다윗이 결국 승리하더라를 보여주는 거예요. 요한이 그 이야기를 끌어 들여다가 예수님이 지금 이 모습으로 겟세마니를 건너로 가시지만 예수님은 반드시 승리하신다를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키드론골짜기를 건너 가셨다라는 그 내용을 거기다 갖다가 기록을 해논 거예요.

아울러 요한은 그 키드론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의미를 들어서 지금 이 장면에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아요. '키드론'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어두움' 이라는 뜻이에요지금 예수님이 어두울 때 어두움을 타서 '어두움의 강'을 건너가세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 어둠에 속한 이들이 ''을 들고 와요. 진짜 빛이 어두움에 비췄는데 어두움을 넘어가고 있는데 어두움들이 지들이 빛이라고 생각하는 쪼그만 등과 횃불,등불 횃불 요런 거 들고 와서 빛 앞에서 요렇게 비추고 있는 거예요. '니가 빛이야? 이게 빛이야~' 이렇게 지금 인제 싸우고 있는 거죠 어두움이 빛 앞에 와서. 고걸 요한이 지금 기가 막히게 이렇게 대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는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아니 창세기 1장에서부터 아주 극명하게 대조가 되어 계속 반복하여 나온 개념들이죠. 어둠 흑암 위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 위에 하느님의 신이 운행하시면서 ''이 비추자 '창조'가 일어났잖아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서도 '빛이 오셨는데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알아보지 못하더라' 라는 내용이 있잖아요. 바로 그 그림을 요한이 요기다가 그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두움이라는 그 단어 키드론이라는 단어를 기필코 끌어다가 거기다 갖다놓은 것입니다. '어두움의 강을 빛이 건너가고 있는 그런 모습' 그러나 바로 그 흑암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빛이 운행을 하자 창조가 일어난 것처럼 바로 여기에서 새 창조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를 암시하는 거예요.

 

바로 그 예수가 키드론골짜기를 건너지 않았으면 십자가 질 일도 없는 거고 그러면 교회의 새 창조는 물 건너가는 거예요. 키드론골짜기를 건너가는게 아니라 물 건너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어두움이 빛을 대적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돼요. 그 어둠들이 어떻게 그 빛을 대적하는지 한번 보자구요.

(요한 18:3) 3 그래서 유다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과 함께 한 떼의 군인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무장을 갖추고 등불과 횃불을 들고 있었다.

  [2012 성삼일] 4월 6일(홍)_주님 수난 성금요일

여기서 '한떼의군인'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스뻬이라' 라는 단어는 600명 가량의 로마군 보병 병력을 가리킬 때 쓰던 단어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한 분을 잡으려고 세상이 600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거예요. 그거 대대 병력보다 많은 병력입니다. 육군 1개 대대가 한 400명밖에 안돼요. 그런데 600명가량의 로마군 보병부대를 비롯해서 대제사장들의 하속들 또 뭐 여러 잡동사니들이 많이 왔어요. 그런데 뭘 가져왔냐면 등과 휏불과 병기를 갖고 잡으러 왔어요. 이게 바로 어두움의 세력들의 특징이에요. '많은 강한 힘' 이게 '넓은 길'을 상징하는 거예요 세상은 항상 많은 수 강한 힘. 이것이 진짜 힘인줄 알아요. 그래서 일단 성당도 사람이 많아져야 되고 성당도 커야 되고 재산도 많아야 되고 뭐 이런 것으로 세를 과시하려고 하죠. 그게 세상이에요. 예수님 잡으러 온 잡동사니들 세상의 힘들.

그게 바로 세상의 힘을 갖고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는 그러한 '세상의 세력'입니다. 어두움의 세상은 빛을 잡기 위해서 등불과 횃불을 동원해요. 참빛을 보지 못하는 그런 자들의 그런 어리석음이죠. 여러가지 등불을 들고 '진짜 빛' 앞에 와서 너스레를 떠는데 그 ''이라는 건 뭐예요?

 

'등과 횃불' 빛이라는 건 내 앞길을 밝혀주고 열어주는게 빛이거든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옛날에는 발등에다가도 불을 어떻게 올려놓고 다녔다고 하는데 (재주도 좋아요 하여튼) 시편에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불은 내 앞길을 비춰주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은 뭐를 빛 삼아 등불 삼아 살죠? 돈 명예 건강 자식 뭐 이런 것들 그렇죠? 이런 것들을 등불 삼아요. 그게 내 앞길을 열어 줄 거라고 믿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빛 앞에 와서 그 작은 등불들 횃불들을 달라고 애를 쓰는게 오늘날 교회죠. 그 빛이 내가 여기 있으니까 나를 가지라고 하는데 '아니 그거 말구~ 내가 생각하는 내 앞길을 비춰줄 수 있는 그 빛을 달래니까요?' 이러구 있어요.

 

예수님이 등과 횃불을 들고 빛이신 예수를 찾겠다고 나선 세상에게 물으세요.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도대체 니네 뭘 찾는지 알구나 있니?'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가 누구를 찾니? 무엇을 찾고 있니? 지금 너희는 나를 찾아야 돼. 내가 이 세상에 와서 계속해서 너희들에게는 내가 빛이다. 내가 생수고 내가 하늘의 빵이니까 너희들은 나를 먹어야 돼. 나를 들어야 돼' 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 예수 앞에 와서 누구를 또 찾고 있어요. '너희는 누구를 찾냐?' 그랬어요. '나자렛 예수를 찾는다' 그를 잡아 죽여 버림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거예요. 그가 이 세상의 힘과 자기들이 또 이 세상에서 추구했던 다윗 왕국의 화려함 이런 것을 전부 부정하고 무시하니까 그를 죽여서 자기들이 원하는 걸 얻어내겠다라고 지금 빛이신 예수를 끄러 온 거예요 밟아서 끄려고.

 

예수님이 물으시죠.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 찾는다' 그랬더니 '내가 바로 나사렛 예수다. 내가 빛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번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내가 빛이다." 그 빛이 어두움에 선포되니까 어두움이 뻥 나가 떨어지죠. 나가 떨어졌는데 다시 주섬주섬 일어나서 좀비들처럼 다시 일어나갖구 또 찾아요.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또 물어보니까 '나자렛 예수니라' '그래 나다. 잡아가라. 너희들 이렇게 뻥 떨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불가능한 자들이야. 그러니까 나를 잡아가' 예수님이 자신을 어두움에 내 주시는 거예요. 자 그렇게 어두움에 빛이 비치자 어두움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져요. 그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 사건은 예수님이 지금 힘이 없어서 그들에게 끌려가는 분이 아니다라는 걸 보여줌과 동시에 '내가 힘이 없어서 잡혀가는 거 아니야' 그걸 상징적으로 한번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은 전에도 한번 그 어두움에게 어두움들에게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히신 적이 있었어요.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또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빛을 알아보지 못하고 체포하려 했어요. 그런데 요한복음 188절 오늘 본문 8절을 보시면 참 재미있는 단어가 나오는데요.

8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잡아가고 내 제자들은 풀어줘라' 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 무슨 조폭 두목도 아니고~ 굉장히 멋진 이야기를 하셨어요 이건 단순히 예수님이 '나는 이렇게 멋진 사람이야' 이걸 드러내기 위한게 아니에요. 이 안에 복음의 메세지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요 예수님은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날 줄을 다 알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어요. 4 예수께서는 신상에 닥쳐 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여기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고 번역이 된 그 어구는 '닥쳐올 일을 모두 다 아시고' 라는 뜻이에요. 거기에 쓰인 동사 '에이도스' '에이도'의 완료형 동사예요. 그러니까 이미 다 알고 계셨다는 거예요. 이제 여기에서 일어날 일을 다 알고 계셨어요. 그런데도 키드론 어두움을 건너서 어두움을 향하여 가신 거예요. 뭘 하기 위해서? 그 어두움에 속해있는 내 백성을 빼내기 위해서예요. 예수님이 굳이 거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아시고도 키드론 어두움을 건너서 어두움에게로 가세요. 그 어두움들이 쪼끄만 횃불들을 들고 와갖구 그 빛을 얕보고 끄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것도 다 아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그러냐면은 '그래 어두움들아 나를 잡아가라' 그래요. 그건 어두움과 연합이 되겠다는 거예요 '나를 잡아가라 내가 니들이 나를 잡아가면 나도 어두움이 될텐데 그래 날 잡아가고 이들은 풀어줘라' 그래요. 그 단어가 그 어구가 딱 한번 또 씌인 데가 있어요. 나자로의 죽은 나자로를 구하는 그 장면이 있죠? 1144절로 가 보세요.

44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게 똑같은 어구예요.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그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 이게 정확하게 같은 단어예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어디서 풀어내고 계시는 거예요? 죽음에서 풀어내고 계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어둠에게 자기가 당해 버리시는 거예요. '내가 이(제자들)들이 죽어야 할 그 어둠 속으로 내가 들어갈테니까 이들은 풀어줘라' 그 복음의 메세지인 거예요 . 그리고는 왜 이들을 가라고 하는지 이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시는지 이유를 대 주시는데 그게 요한복음 189절이에요.

9 예수께서는 '나에게 맡겨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기도 안에 들어있던 내용이잖아요?

(요한 17:12) 12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에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이 사람들을 지켰습니다. 그 동안에 오직 멸망할 운명에 놓인 자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윗 도성-기혼샘-실로암 수로-워렌 수직통로

지금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기도를 스스로 실천하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내가 너희들에게 잡혀갈테니 어두움아 내가 너희들에게 잡혀갈테니 사망아 내 백성은 놓아라!' 바로 하느님이 그러한 희생을 근거로 하여 우리를 살려냈다 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게 아버지 뜻이었잖아요. 바로 그 일을 이루러 오신 거잖아요 이 땅에~

(요한 6:39)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맡기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그죠? 요 뜻을 지금 이루고 계시는 거예요 끝!까지~ '다 놔줘라. 다 놔줘라'

 

여러분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본문의 주님은 창세기에 그 에덴동산에서의 그 아담의 실패를 완전하게 회복하고 계시는 거예요. 창세기에 그 에덴동산에서는 신부의 실수를 꼬집어서 아버지께 고자질을 함으로써 자기는 빠져나올려고 하는 아주 야비한 신랑이 하나 등장하죠. 그게 아담이잖아요. 그것도 나중에는 하느님에게 까지 그 잘못을 돌려 버려요.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저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는 바람에 나도 따 먹었습니다' 자기는 아무 잘못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애초에 아담이 에덴동산의 왕이요 제사장이요 예언자로 임명이 되었다는 건 아시죠? 제사장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하느님이 당신에게 맡긴이들의 죄를 자기 어깨에 짊어지고 하느님 앞에 중보자로 나서는 게 제사장이에요. 그런데 이 제사장이라는 놈이 아내가 죄를 지었는데 하느님한테 가갖구 '나는 아무 잘못 없어요. 쟤가 따먹은 거예요' 자기의 직분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어요. 실패한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 그 동산이 똑같이 나온단 말입니다. 그 동산으로 한 신랑이 가시는데 이미 그 신부가 저질러 놓은 어둠 때문에 거기는 전부 어두움이에요. 키드론이에요 어두움이에요. 그런데 이 신랑은 그 죄를 지은 신부들을 그 열한 제자 그 제자들이 교회잖아요 신부잖아요. 예수의 신부. 그 신부를 살려내기 위해 자기가 그 어두움을 뒤집어 써 버리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아담의 실수가 실패가 예수에 의해서 이제 완성이 되는 거예요. 바로 그 일 그 복음의 메세지를 창세기 1장부터 하느님은 차근 차근 그림으로 좀 더 점진적이며 점강적으로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인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가 빠져 죽어야할 어두움 속에서 건져졌고 사망에서 건져진 거예요. '풀어 놓아 가게 하라'그리고 예수가 그리로 들어간 거죠. 우리가 그 은혜의 복음을 이렇게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하나 배워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막 살 수 없게 되는 거예요.

 

그 하느님의 은혜가 너무 너무 가슴에 사무치게 나에게 각인이 되어있고 그리고 그게 내 안에서 자각이 되어질 때에 '맘대로 사세요~ 이제 여러분은 자유예요. 이제 나가서 맘대로 죄지세요' 아무리 여기서 이야기를 해도 그게 안되는 거예요. 은혜를 알면 절대 그 사람은 그 은혜를 진짜 안 사람이라면 그렇게 쓰레기처럼 짓밟을 수가 없어요.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힘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어둠에게 먹혀 버리시는 그 십자가의 원리로 당신의 백성들을 어두움에서 풀어내죠? 그게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또 베드로가 칼을 뽑아들고 난리를 쳐요. 끝까지 말썽이에요

이 인간은~하여튼~ 괜히 폼 잡는다고. 진짜 한번 해 볼라면 앞에 있는 사람을 찔러 죽이던가.. 왜 엄한 귀를 하나 짤라갖구 예수님이 그걸 다시 줏어서 털어서 붙여주고~ 그 바쁜 시간에~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칼 거두어서 칼집에 넣어라' 그래요.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 라는 말까지 덧붙이세요. 한번 볼까요? 마태복음 2652.

52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이건 사무라이들에게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라는 건 '세상의 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힘으로 너희들에게 공격해 들어올 때 너희들은 똑같이 응전하지 말라라는 뜻이거든요. 똑같이 응전하게 되면 세상과 함께 망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성도는 그렇게 살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그런 실수를 하지만 결국에는 너희들은 그렇게 살 수 없어를 이야기해 주시는 거예요. 거기서 보여 주시는 거죠? 예수님은 그들의 그 무시무시한 무기 앞에서 그냥 잡혀 죽으시는 것으로 승리를 하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베드로에게 똑같은 얘기를 하세요. 절대 칼 쓰지말라고 얘기하신다는 건 '너도 그렇게 죽게 될거야' 라를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실제로 그런 베드로가 나중에는 어떻게 죽습니까? 예수님이 그러잖아요~21장에서 '이제는 니맘대로 니가 가고 싶은대로 다녔지만 이제는 니가 밖에서 너를 띠 띄우고 끌고가는 이에 의해서 끌려 다니게 될거야' 라고 하시면서 그가 어떻게 죽게 될 것인가를 이야기 하셨다 그래요. 이제 베드로는 자기의 죽음도 자기가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런 자리로 끌려가는 거예요. 이렇게 자기가 죽지 않겠다고 이제 내 미래와 장래 그걸 다 걸었던 예수가 죽겠다고 하니까 화가 난 거예요 이 사람이.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보호해야 돼요.

 

그러니까 앞에 육백 명 이상이 와 있는데 자기네들은 열한명 밖에 안 되는데 칼을 뽑아들고 귀를 뚝! 짤라버리는 거예요.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짓이라 그랬어요? 얼마 전에 예수님이 말씀해 주셨잖아요. 마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랬잖아요. 예수님 죽으면 안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니가 지금 내 편을 든다라는 건 내가 살아서 계속 너를 풍요롭게 도와주길 바라는 거지? 고게 마귀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엉뚱하게 오늘날도 말이죠 '내가 그때 살았더라면 예수님을 절대 돌아가시지 않게 했을텐데.. 내가 그냥 로마병정들을 막아서고 유다를 막아서 예수님을 살렸을텐데...' 그게 마귀새끼라니깐요? 우리는 그런 역할로 이 땅에 오지 않았어요. 우리는 예수를 죽이는 자신의 모습을 폭로 당하도록 온 거예요 이 세상에요. 그렇게 폭로 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덮어버리는 예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배우는 것이지 내가 무슨 힘을 발휘하여 예수님의 편을 들어서 그 분의 일을 돕고... 그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니깐요?

 

우리가 무슨 하느님의 일을 도와요?. 하느님의 일은 뭐예요? 하느님과 하느님이 보내신 이를 믿는 거라니깐요. 그게 하느님의 일이에요. 유일한 일. 그 일이 성숙되어져 감에 따라 봉사도 나오고 헌금도 나오고 선교도 나오고 하는 것이지 그런 것 자체가 우리의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우리의 여러분의 목적이 되면 반드시 그건 여러분 안에 ''으로 쌓이게 되어 있어요. 자 베드로는 그렇게 세상의 힘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어두움에 응전하여 역시 세상의 힘으로 대응을 했어요. 예수님이 막아서십니다. 그런데 그 칼은 예수님이 사라고 하신 칼이에요. 아세요?

(루가 22:35-38) 35 그리고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보낼 때 돈주머니나 식량자루나신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6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그러나 지금은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가고 식량자루도 가지고 가거라. 또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 가지고 가거라. 37 그래서 '그는 악인들 중의 하나로 몰렸다' 하신 말씀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게 관한 기록은 다 이루어지고 있다' 하셨다. 38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주님,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예수께서는 '그만 하면 되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하나가 그 중 하나가 베드로 칼이에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어 두개 있어? 그럼 됐다)

 

그럼 예수님이 사라 그런 거예요 이 검을 그래놓고 왜 뽑았더니 다시 넣으라 그래요? 자기가 사라 그래놓고. 이유가 나오잖아요 나는 그걸로 세상을 공격하라고 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 예언이 되기를 불법자 강도의 동류로 여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는 무리들이 세상으로부터 '강도 범죄자' 이런 평가 판단을 받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칼이 필요했던 거예요. '야 옷 팔아서 칼 사와' 그런 거예요. 이제 마지막 때가 됐거든요. 거기에 성질 급한 베드로가 또 쓰임을 받은 거죠. 지 혼자 뽑아들고 또 난리를 치는 바람에.'저 범법자' 저거 이렇게 된 거예요.예언이 이루어졌어요 베드로 때문에. 그건 이사야서에 예언이 되었던 거예요. 이사야서 5312

12 나는 그로 하여금 민중을 자기 백성으로 삼고 대중을 전리품처럼 차지하게 하리라. 이는 그가 자기 목숨을 내던져 죽은 때문이다. 반역자의 하나처럼 그 속에 끼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반역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때문이다. 그죠?

 

예수님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로 이미 작정이 되어 있었어요. 따라서 예수님의 무리가 범죄자의 무리로 헤아림을 입어야 돼요 이 예언처럼. 예수님께서 강도 두 명 사이에 끼어서 돌아가신 거 기억나시죠?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범법자로 여김을 받고 죽으셔야 됐어요.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한 무리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범법자의 무리로 규정이 되어야 돼요. 그러니까 죄인들의 죄가 되셔서 죽어야 하는 예수님의 그 정해진 운명에 베드로가 범법자의 무리의 대표로 말코의 귀를 짤른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범법자' 아니잖아요. 죄가 없으신 분인데 죄 있는 범법자가 되셔서 죽으신거예요.

하느님이 다 뒤집어 씌워버린 거거든요. 그런데 그와 함께한 무리 예수에 의해서 풀려나는 무리는 범법자여야 돼요.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거든요.

  08.03.21 - 요한 18,1~19,42

여러분 우리는요~ 이 세상에서 정말 나 자신에게 먼저 '나는 말코의 귀를 베어버린 베드로 정도가 아니라 정말 하느님이 지금이라도 당장 지옥에 보낸다 할지라도 나는 아무 할말이 없는 그런 범법자 그런 강도구나!' 이걸 스스로에게 들켜야 돼요. 그렇지 못하고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라는 그 사실이 절! 감사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 옛날의 그 모든 죄와 잘못이 사라져버리고 나는 지금부터 굉장히 깨끗하고 선하고 착한 일만 하면서 살게 될 거라고 어디선가 잘못 배웠기 때문에  늘 그렇게 본인에 대해서 실망하고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건 차차 될 것이고 하느님이 새 몸을 바꿔주면 거기서 완성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영원히 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왜 나를 위해서 하느님이 목숨을 끊으실 수밖에 없었는가를 내가 나의 실존을 경험하면서 이 실체를 폭로 당하면서 깨달아 알아야 돼요 내 스스로그래서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그렇게 여전히 불가능하고 무력하고 패역한 모습들을 본인에게 자꾸 들키는 거예요. 예수님이 바로 그 무리의 대표로 강도 사이에 끼어서 돌아가셨다니까요. 그 옆에 강도가 바로 '나예요 나!' '범법자' 범법자들은 전부 사형입니다. 그 범법은 전부 하느님에 대한 범법이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범법은 무조건 사형이에요.

김정은한테 사기치면은 사살... 쥐도 새도 모르게 가서 끌려가서 죽을지도 몰라요. 김정은이 지나가는데 가서 뒤통수 한 대 때려 보세요. 그거 사살이에요 그 자리에서. 하느님에게 아무리 작은 죄를 진다고 해도 그거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형'입니다. 죽음이에요. '사망'  우리는 그런 범법자였는데 아무 죄 없으신 예수가 우리 대신 범법자가 되셔서 죽으신 거예요. 그 범법자의 그 무리의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해 베드로가 칼을 뽑아들고 범법자의 상징이요 모형으로 딱 등장한 거예요. 그리고는 예수님을 성가시게 만든 거죠. 일을 하나 더하게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 웬수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떠세요? 키드론골짜기를 건너서 예수님이 행하신 그 여러가지 사건들 속에 복음이 아주 알알이 다 배어있지 않아요복음의 메세지가전부 예수와 십자가밖에 없어요. 성경은 전체가 그래요. 그냥 할 수 없이 뚜들겨 맞고 죽은게 아니라 그 하나하나에 예수가 다 들어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 같은거 보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러고 울고는 은혜 받았대. 거기서 예수를 발견했어야죠.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거보다 더 심하게 두들겨 맞고 죽은 사람들 많아요 크리스챤 중에. 심지어 지금 북한에.. 이제 공개처형을 못하니깐요 수용소에 갖다놓고 몰래 갖다가 삽으로 갖다 찔러 죽인다는데 여자들을요. 그것도 임신한 여자들을. 배를 삽으로 찔러죽일 때 한방에 죽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래요? 삽으로 찍혀 죽으실래요? 둘 중에 어떤게 아플까요? 둘다 아프죠 물론.

예수님이 그렇게 많이 맞고 십자가에 달린 그 아픔 그것이 우리에게 '연민의 정' 이런 것으로 와 닿으면 안돼요.

예수님이 나머지 공관복음서에서 그렇게 고민하고 슬퍼하셨던 건 인간의 죄라는 건,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의 죄라는 건 예수님이 이렇게 고민하고 슬퍼하고 치를 떨 정도의 어마어마한 형벌을 받는 그냥 죽은 흙으로 돌아가서 영원히 불타버릴 그런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함인 거예요.

 하느님이신 예수님마저도 그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에게 떨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그 분이 다 담당하고 가셨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예수님의 고민 장면이 나오는 거지, 예수님이 뭘 대단하게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걸 보여 줄려고 그런 장면이 거기 들어간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우리에게 이해가되고 있다면 우리가 그 하느님 앞에서 정말 어떠한 감사를 내어 놓아야 되겠습니까. 정말 이렇게 불성실하게 막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죠 그죠더 열심히 말씀 앞에 설려고 노력하고 더 열심히 하느님과 交際하도록 애쓰고.. 기도잖아요 그게. 기도들 많이 하세요. 성경말씀도 열심히 읽으시고 그죠?

교형자매님들 사랑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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