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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7.08)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08 조회수2,123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8년 7월 8일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에제 2,2-5

2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

영이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셨다.

그때 나는 그분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3 그분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4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

제2독서 2코린 12,7ㄴ-10

형제 여러분,

7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8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9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마르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인터넷을 보다가 우연히

100원짜리 동전이 22,000원에

거래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쳤다고 100원짜리 동전을

22,000원에 사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구매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동전은 1981년에

 딱 100,000개만

만들어졌다고 하더군요.

100원짜리의 가치가 22,000원의

가치를 하는 이유는

바로 희귀성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나 역시 전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로 희귀성으로는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다른 유일한 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희귀성을 가진

가치가 높은 존재는

나만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역시 전혀

다른 유일성을 가지고 있는

가치가 아주 높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함부로

반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나와

다르다는 것을 틀린 것으로

규정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래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는

 러시아 월드컵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월드컵은 예전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와 달리 뜨거운

열기를 찾기 힘듭니다.

이 이유를 사람들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너무 못해서”

라고 말하더군요.

실수를 했다고 해서 그 선수에게

엄청난 인신공격을 하고,

이것도 부족한지 축구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 선수의 가족에까지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인정해주고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야 하는데 무조건

자신의 마음에 들게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서로가 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자 노력한다면 다툼은

 줄어들고 웃을 일은 많아집니다.

웃을 일이 없어지는 것은 바로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은

 예수님 시대의 고향사람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청년시절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평범한 삶을 사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평범한 노동자로서 경제 질서에

순응하면서 사셨습니다.

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고향사람들은 주님의 지혜로움을

 또한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힘 빠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르 6,4)
제1독서에서도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 왔다.”

(에제 2,3)라고 말하지요.

예언자를 보내어도 거역했던

이유는 하느님의 뜻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의 뜻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위한 예언자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고향사람들이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고향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려고 예수님께서

더 많은 기적을 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느님 나라를 쉽게

 깨닫도록 더 지혜로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마르 6,5.6)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뜻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하는 이웃들 역시

사랑의 마음으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모범 답을 사도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2코린 12,10)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의

 논리가 아닌 하느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워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배척하면 배척할수록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다가오시는 주님을

배척하는 것과 똑같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며,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것만큼

큰 실수는 없다.

(에드먼드 버크)

간절히 주님께 기도합니다.

"칭찬을 전달하면"

(김경일, ‘어쩌면 우리가 거꾸로 해왔던 것들’ 중에서)

장교로 군 복무할 당시

한 지휘관이 부하를 칭찬하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자네 직속상관한테서

늘 열심히 한다는 말을 들었네.

오늘 보니 그 말이 사실이군.

자네의 노고가 참 컸어.”
왜 좋은 칭찬일까?

직속상관의 평가를 들어

칭찬했기 때문이다 부하는

 지휘관에게 결과로

칭찬받았을 뿐 아니라

직속상관에게도 그간의

과정과 노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이런 지혜로운

칭찬을 인정이라고 한다.

인정은 ‘확실히

그렇다고 여김’을 뜻하고,

칭찬은 단순히

‘높이 평가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정이라는 더 강하고

긍정적인 평가에는 한 사람이 아닌

다수의 공통된 평가가 필요하다.

칭찬은 하는 것뿐 아니라

전달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칭찬은 내가 주체가 되어

 하는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남이 한 칭찬을

전달하기만 해도 두배 이상의

긍정적 효과를 낳는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 명에게 칭찬받는 셈이니

기쁨과 자부심도 배가 된다.
얼마 전에도 이렇게

칭찬하는 분을 만난 적 있다.

 한 회사의 임원인 그분은

직원을 칭찬하고 싶으면

꼭 그의 직속상관을 부른다.

 “이 직원은 일을 참 잘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전에도 잘한 일을

한두 개만 얘기해 주게.”

직속상관은 부하 직원의 장점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전달한다.

임원은 그 직원을 만났을 때 칭찬하며

“자네 직속상관이 그러던데....”라고

에피소드를 덧붙인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을

잘 모르면서 그저 덕담한다는

느낌이 사라진다.

게다가 직속상관이 자신에게

관심 있다는 걸 알고

 고마움을 느낀다.

간접 칭찬과 칭찬 옮기기의

효과는 생각보다 크다.

 

 

간절한 마음으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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