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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토마와 교회 (요한복음 20:24-3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09 조회수2,827 추천수0 반대(0) 신고

 

 

                   토마와 교회

(요한복음 20:24-31)

24 열 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동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의심하는 토마

많은 분들이 토마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계신듯합니다.

토마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를 하기 위해 여러가지 연구를 하던 중 오강남 교수, 도올 김용옥 교수의 토마 복음이라는 것도 몇일에 걸쳐서 정독을 하였습니다. 4권을 모두 읽었는데 정말 화나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단 한 줄도 인용할 것이 없습니다. 토마 복음이라는 건 허무맹랑한 인본주의를 주장하는 엉터리 책에 불과했습니다. 오강남 교수, 도올 김용옥 교수는 토마 복음이 마치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다가 최근에 두각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토마복음은 이미 초대 교회 때 교회에서 검증이 되어서, 토마가 쓴 것도 아닙니다.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잡서로 분류가 되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토마복음을 넣어서 신약성경을 28권으로 재편해야 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김경재 교수까지 나서서 사도행전 바로 앞에다가 도마복음을 넣어서 28권으로 편집을 하자 우기고 있습니다. 최근에 나는 한신대학교 김경재 교수와 김용옥 교수와 오강남 교수가 대담한 글을 읽어봤는데 아 이분들은 너무 똑똑한 천재들이지만 그리스도교에 정말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재확인 했습니다.

 

그럼에도 김용옥교수의 몸철학을 잘 읽다보니까요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그분의 철학적 사유 앞에 아무런 저항을 할 수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정확하게 그리스도교의 허구를 잘 짚어내고 있기 때문에 김용옥 교수 앞에서 왠만한 목사들이 성경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박식한 지요? 단어 하나하나를 방대한 연구를 통하여 너무나 명확하게 꾀고 있어요.

그런데 그 김용옥교수는 지금 어떤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있느냐 하면 인본주의로 잘못 왜곡되어 있는 가짜 그리스도교,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표방하고 있는 가짜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그는 진짜 그리스도교를 몰라요. 그분의 그리스도교의 반박에 대해서 읽어보니까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정확히 파악하고, 또 그분은 철학자이기 때문에 동양철학 서양 철학을 하바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할 때부터 시작하여 그 누구보다도 깊이 연구를 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서 동양사상이나 서양철학이나 서양 종교가 정말 맥을 못춰요. 이게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이렇게 된 것인지를 정확히 짚어 주기 때문에 그 앞에서 한마디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교를 잘못생각하고 있어요.그가 비판하는 그리스도교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헬라철학의 이원론에 아주 깊이 물들어 있는 그런 가짜 그리스도교가 많은데 그건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철학 사상인 몸철학이 완전히 인본주의적 사상이거든요. 그 안에는 범신론도 들어있고 아주 잡탕이에요. 그런 관점에서 그가 동양사상이나 우리 그리스도교를 바라볼 때 이건 너무 낮은 수준의 철학의 걸음마도 안되는 수준의 사상이요 종교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마땅히 그가 공격할 만해요. 그런데 제가 그분의 도마복음도 읽어보고 그분이 쓴 요한복음도 읽어봤는데 정말 그분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를까라고 생각이 들정도로 본인도 왠만한 신학자들을 가르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서는 너무나 연구를 많이 했는데 하느님을 모르더라고요. 그런데 도올 김용옥 선생이 갖고 있는 몸철학 사상에 의해서 준해서 성경을 보게 되면은요 도마 복음이 완전한 인본주의 거든요. 인간도 신이 될 수 있고 인간의 노력 열심으로 개인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가 도마 복음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나마 발견된 도마복음이 성경에 핵심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이런 사람은요.

그런데 많은 지식인들이 지금 그들의 사상에 넘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도마복음을 정경으로 다시 넣자! 니케아 공회의 처럼 다시 공의회를 열어서 성경을 다시 만들자. 많은 이들이 동조를 하고 있거든요. 정말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에요. 그가 동양사상을 서양사상으로 공격하고요. 서양의 사상이나 서양의 종교를 동양사상으로 공격하는데 정말 기가막히게 공격을 해요. 그러니까 동양사상이나 철학 서양철학이나 서양 종교가 전부 인본주의에 빠져서 그가 휘두르는 칼에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너무나 명확히 파악을 하고 공격을 하니까요.

  7월 3일 성 토마스(토마) 사도,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그런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부정하고 있지, 절대 인간의 가능성을 격려하고 있지 않다라는 것을 명심하기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도올의 눈에는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인본주의로,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종교로 보이는 거에요. 그럴바에야 이 그리스도교가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다른 동양사상이나 노자나 장자나 다 그 이야기 하고 있는데 왜 꼭 그리스도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지도 않지만 그리스도교만이 길이다 라는 것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일갈을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귀담아 듣고 과연 우리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반성할 필요는 있어요. 그걸 배울 필요는 없지만요. 도마 복음은 선악과를 따먹고 하느님처럼 되려했던 타락한 존재들의 마귀적 속성을 그대로 표현해 놓은 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런 신학자들의 견해를 뒤집어 엎고 성경안에서 토마의 에피소드를 그대로 해석을 해드릴려고 해요.

불트만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요 요한에 의해 쓰인 요한복음은 우리가 지금 읽은 요한복음 20:31까지라고 주장을 하고 있어요.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가 읽은 오늘 본문이 요한복음의 끝입니다. 그리고 21장은 후대의 요한계열의 학파 사람들이 첨가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요한복음의 마지막 결론 부분에 당도한 것입니다. 어느 책이든 그 책의 결론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 또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결론 부분에 기록을 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오늘 본문 30-31절입니다.

(요한복음 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메시야이시다는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믿게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할려고!!!

 

이게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이에요. 이게 요한복음의 결론이에요.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면 되는 것입니까? 이거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교훈을 얻고 이런게 아니라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분이 메시야 그리스도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이게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많은 초신자들에게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이 요한복음을 건네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요한이 표적 세메이온이라는 단어를 그 결론에서 쓰고 있다는 거에요. 요한은 자신의 책 요한복음을 한마디로 표적으로 함축하고 있는거죠.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많은데 내가 표적을 요만큼만 기록한 것은 이라고 기록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 전체를 표적 세메이온이란 단어로 함축하고 있단말이에요. 그 표적 세메이온이란 단어는 Sign(계약하다 체결하다 서명하다 )이에요.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은 어떤 것을 지시하는 Sign판 같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에피소드들이나 강화들이 전부다 무엇을 지시하고 가리키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세메이온입니다.

 

그렇다면 그 요한복음의 기록목적 바로 위에 오늘 본문에 우리가 함께 포함해서 읽었던 그 토마의 이야기 또한 토마라는 한 제자에 국한된 지엽적 사건, ‘저런 믿음 없는 놈, 보지 못하고는 믿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놈,’ 그런 토마 한사람에 대한 지엽적인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게 던져지는 어떤 표적으로서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수 있잖아요. 그 이야기 바로 밑에 세메이온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요. 더군다나요. 우리는 흔히 이 토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의심 많은 토마처럼 믿음 없는 사람처럼 살지 말고 보지 않고도 믿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말죠. 언듯 들으면 아주 훌륭한 충고인 것 같지만 그것은 맹종을 강요하는 억지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제자들] 사도 성 토마(San Tommaso Apostolo) / '의심 많은 토마'

16세기의 천재 화가인 카라바조의 토마의 불신이란 그림입니다. 원래는 미켈란젤로죠 조각가 미켈란제로 말고 다른 미켈란젤로에요. 카라바조는 그의 고향이 카라바조입니다. 고향의 이름을 따서 카라바조라고 불러요.

카라바조는 비록 천재적인 소질을 가진 화가였지만 그리스도교인은 아니었어요. 이 그림을 실제로 보면 너무 사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그래서 그 카라바조의 성화들은 모두 어둡고 암울한 기운을 내뿜어요. 나중에는 사람도 죽이고 결국에는 객사를 하고 맙니다. 30대의 나이에.

거의 그의 삶을 보면 미친 사람이에요. 그는 광인이었고 예수도 안믿었어요. 그냥 돈을 받고 성화를 그려준거요. 여러분도 보다시피 토마가 검지 손가락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깊숙히 찔러 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토마의 손을 저지하듯 잡습니다. ‘야 더 깊이넣지마하는 것 같은 표정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시고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토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찔어 넣었다는 말이 있나요? 많은 분들이 카라바조의 토마의 불신이라는 그림을 머리속에 그립니다.

토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라는 말씀을 듣자 마자 대답하여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라고 신앙 고백을 한다구요.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고 마치 시체 검시관처럼 이리저리 휘저었다는 내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상상인 것이지 절대 성경적인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자신의 불신을 스스로에게 들킨 것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화가들이 악마를 그리고 천사를 그리고 하잖아요. 미켈란젤로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마귀를 그릴 때에는 그 당시 자기가 가장 미워했던 사람의 얼굴을 그린데요. 천사의 얼굴을 그릴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넣고요. 그래서 그 마귀의 동상이나 마귀의 그림을 보면은 꼭 그 사람 주변에 살았던 사람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카라바조는 자기 마음을 이 그림에서 그대로 들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의심 많은 토마가 바로 나 카라바조다라는 것을 들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옆구리에 구멍을 휘저어도 못믿을 존재가 카라바조 자신인 것을 들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부터 먼저 말씀 드리면 믿음의 생성과 주도권에 대한 표적인 것입니다. 의심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그런 권고의 에피소드가 아닌 것입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 오늘 날 교회가 오히려 토마와 같은 구도적 열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믿어지지도 않는 걸 억지로 믿어보겠다고 믿습니다를 연발한다고 믿어지는게 아닙니다.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물으셔야 됩니다. 찾으셔야 됩니다. 그리고 공부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무조건 믿는 것은 자기최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가 세뇌작업입니다.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믿어 나는 믿어 하다가 의심들면 허벅지 찔러 가면 회개하고 그런데 그렇게 무조건 믿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17:11-12) 11 그 곳(베레아) 유다인들은 데살로니카 유다인들보다 마음이 트인 사람들이어서 말씀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바울로의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서를 연구하였다. 12 이리하여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또 그리이스 귀부인들과 남자들 가운데서도 믿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바울로가 실라와 함께 베레아로 가서 베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11절에 말씀이 로고스입니다. 바울로가 설교를 하고 복음을 전하자, 로고스를 전하자 예수 그리스도가 로고스로 오셨잖아요. 예수가 전해지자 베레아 사람들이 마음으로 그 로고스 말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받은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 하면 프로뒤미아, 준비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원이 그들에게 있었단 말입니다. 무언가를 알고 싶은데 자기의 힘으로는 그 앎에 대한 소원이 채워지지 그 사람의 마음이 프로뒤미아입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는 그들에게 말씀이 전해졌어요. 전해졌더니 그 말씀을 받았데요. 그런데 그 말씀을 받고 이게 진짜 성경에 근거한 옳은 것인가를 또가서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적 열심이 모든 성도에게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어가 아닙니다.

  사도 토마의 불신(1505)

저는 여기에 나온 토마의 의심을 그렇게 보고 싶어요. 생각해 보세요. 잠깐 어디 다녀왔더니 다른 모든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은 여전히 다락방에 숨어서 문을 잠그고 두려워서 덜덜 떨고 있어요. 자기 생각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으면 이렇게 남아 있으면 안되거든요. 여드레 후에 예수님이 다시 찾아왔을 때에도 그들이 문을 잠그고 모처에 숨어 있었습니다(20:26). 도마는 그런 의심이 든 것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살아났다면 그리고 제자들 앞에 나타났다면 왜 너희들은 아직도 이 모양이냐? 하는 의심이 들었을 것 아닌가요? 이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입을 맞춘듯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을까? 그리고 그 부활하셨다는 그분은 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침묵하고 계실까? 왜 숨어계실까? 알고싶다는 마음에서 토마는 진짜 그분이 살아났는지 그분의 옆구리, 그리고 못자국에 손을 넣어보기 전까지는 안믿을거야라고 이야기를 했다면 그게 정말 의심 많은 토마라고 매도될만한 일인가요? 눈에 보이는 것이 부활한 예수님을 봤다는 이들의 연약한 모습밖에 없다구요. 그리고 예수님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아냐 나는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나타났음에도 우리가 이모양이라면 도대체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알고 싶어! 그게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 나는 알고 싶어!’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볼거야라는 말을 했다면 그게 정말 의심 많은 토마라고 매도될만한 일인가요? 저는 어떤 면에서 구도자의 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이게 맞는거야!!!’라고 얘기 했을 때 나는 수긍이 가지 않는데 니들이 맞다고 하니까 나도 맞다고 그럴께! 이렇게 안한 토마가 오히려 더 위대해 보이지 않나요???

그런데 이 구절을 읽어놓고 의심하면 안된다, 무조건 믿어라!! 그런데 그렇게 설교하면 그건 아니에요.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예언을 하면서도,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어전회의에 올라가서 말씀을 직접 받아서 땅에가 내리 꽂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구약 예언자라 합니다. 그런데 그들도 말씀을 전해놓고 그 말씀의 뜻을 연구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10) 10 이 구원은 여러분에게 내릴 은총을 두고 예언한 예언자들이 열심히 찾고 연구하던 것입니다.

그 예언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더니 그들 안에 있던 성령이 가르쳐주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토마와 같은 구도자의 열심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 됩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궁금해 하고 배우셔야 합니다.

 

그러한 구도자의 열심과 불신은 당연히 구별이 되는 개념입니다. 구도자의 열심은 의심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참된 열망에서 나오는 열망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에 불신으로 향하는 의심은 믿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제된 개념입니다. 저는 전자의 열심을 내어놓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UnbeliefDoubt는 완전히 다른 개념입니다. 그 탁월한 그리스도교 변증가인 오스 기니스는 회의하는 용기라는 책에서 불신앙과 의문을 명확히 구별해 줍니다. 불신앙은 믿지 않기로 선택한 것을 말하고 이것은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에서 성령 훼방죄라고 합니다. 신부님이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 성령 훼방죄가 아니라 불신앙이 성령 훼방죄입니다.

그러나 의문은 믿으려 하지만 믿어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의 대한 열정일 수 있어요. 자꾸 궁금해 하고 더 많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진리의 대한 열정일 수 있어요. 하느님은 그러한 진리와 구도에 대한 열정을 절대 책망하지 않으세요.

교회 안에 부활의 예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카르보조의 그림 속에 예수님의 난처하고 짜증난 듯한 표정은 잘못 그린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구도의 열정을 절대로 짜증난 표정으로 받지 않으십니다.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우리는 진리의 본질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열심히 물어야 하고 공부하고 상고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성도의 열정과 열심에 반드시 반응하세요. 그 안에 있는 성령이 예수에 대해서 알려준 것처럼 반드시 반응하세요. 그렇다고 지금 과학적인 증거나 역사적인 근거 등을 찾아서 호기심을 충족하여 믿음에 도움을 받으라고 말씀드리는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묵시록을 강해해 놓은 것을 보면은 우리는 정말 알지 못하는 현대 과학으로 그것을 잘 풀어놨습니다. 지식인들은 그런 어떤 과학으로 근거를 대어 성경을 풀어주면 아주 좋아합니다. 이런 것은 믿어 주겠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그런 식의 호기심 의심을 가지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터키의 아라랏산 아래에서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고 신문에 게재되고 있는데 발견됬으면 어떻고 발견 안되었으면 어때요? 그게 왜 신기합니까? 노아의 방주가 있었다는 걸 믿지 않나요? 그런데 그게 신기하다는 것은 나는 그동안 안믿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요? 그런게 있었다고 발견되니까 아 한번 믿어줄까하는 이런 식의 열심이 아닙니다. 과학적으로 무엇인가 증명이 되어서 내가 그러한 것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현실 인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인식이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니까요. 보이지 않는 게 실체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보고 나는 이제부터 이것을 믿기로 했다고 결단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식의 믿음은 하느님이 주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세상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현실 울타리 안에서 밖으로 못나간다는 것을 과학이 입증해 주었을 때 그래 맞아 하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과학이 준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과학으로 역사로 증거를 대어서 설득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말씀 드리는 긍정적 토마의 의심은 믿고자하는 마음이 열정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건 오늘날 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토마의 에피소드는 그러한 구도의 열정에 관한 이야기를 밑그림으로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짜 중요한 메세지는 구원의 본질과 믿음의 본질에 대한 구체적인 메세지를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 본문이 담고 있는 주 메세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표적 세메이온과 똑같은 단어가 마르코복음에도 등장하는데 거기에선 오늘 본문과 조금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읍니다.

 

(마르 8:11-13) 11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 표가 될 만한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12 예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에 보여 줄 징조는 하나도 없다' 하시고는 13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

분명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하느님 아들이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표적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표적을행했고 표적을 기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에게 절대 표적을 안주겠다고 합니다. 너는 표적을 봐도 못알아먹으니까 안주겠다고 하십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본질에서의 표적의 역할과 신앙의 여정속에서의 표적의 역할에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신앙의 여정속에서의 표적은 우리의 구도의 열정안에서 하늘의 비밀을 배우는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것들입니다. 신앙의 여정속에서는 표적의 역할은 큼니다.

그래서 주님은 표적을 주어서라도 그들의 의문과 의혹을 메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표적들은 전부 말씀속에 담겨있읍니다. 그게 요한복음 20:31절인 것입니다. 내가 그 표적을 말씀에 다 담아놓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정경이 완성이 되기 전에는 그게 어떤 현상으로도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게 정경에 기록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사실적으로 발생이 되어야 하는 거니까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그게 분명히 역사속에서 어떤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표적이. 그러나 그 현상들과 사실들도 전부 복음을 상징으로 담고 있던 것입니다. 성도는 그러한 표적 속에서 예수와 십자가를 읽어낼 수 있어잖아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사건,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남자 오천명을 먹인 사건, 이 모든 표적이 예수님과 십자가를 그리고 있었던 거잖아요. 우리는 그러한 표적을 통하여 예수를 읽어낼 수 있었잖아요. 그러나 그 구원의 본질의 측면에서의 표적 구함은 구원의 획득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표적도 그 어떤 너희들의 경험도 너희들의 구원에 있어서는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이야기가 토마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토마는 또 그 자리에 같이 없었다

이제 오늘 본문의 해석에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토마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에게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신 후에 토마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그런데 토마가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기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자리에 함께 계셨던 것처럼 여드레 후에 나타나시더니 토마가 한 말을 그대로 하세요. ‘니가 전에 내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기 전에는 안믿겠다고 했지 한번 넣어봐라고 이야기하세요. 깜짝 놀랐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감지를 못하는 상태에서도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여드레 동안 떠나 계셨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항상 토마와 함께 계셨고 항상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함께 계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정하신 그 때에, 하느님의 때에 여러분에게 어떤 것을 교훈하기 위해 그 때에 감지되기도 하고 또 침묵속으로 숨어버리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절대 우릴 떠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마치 믿는 자가 되는 것은 어떤 것을 경험하고 보아서 우리가 결단하고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죠. 지금 이 말씀만 보면은요? 그런데 잘보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자 갑자기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지금 어떤 상황이냐 하면 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못믿겠어!!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봐야 믿겠어라고 이야기하는 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주셨어요. 그런데 토마가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 토마가 말하기를 예수님 당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맞네요...가 아니라 나의 주시네요 그랬습다. 너는 내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믿는 자가 되라 했더니 토마가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토마는 지금 자기의 신앙에 몇가지 결핍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과정 중에 많은 훈련과 노력과 지식이 필요한데 자기에게는 다른 제자들과 다른 결핍이 하나 생겼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본 예수님의 부활을 토마만 못본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는 그 부활만 보면 다른 제자들만큼의 신앙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하였는데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다른 제자들의 신앙만큼 가질 수 있다고 믿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만났던, 모세를 만났던 그 만남,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만남이 이루어지자 이 토마가 당신이 이 믿음의 주인이군요를 깨달은 것입니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둘째 서간

내가 손가락을 넣어봐서 내 믿음이 성숙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믿음의 주인이시군요. 바로 그분이 하느님이시니까. 당신이 하느님이 맞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 예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큐리오스 (Κύριός Kyrios)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믿음의 주인이십니다. 믿음의 주도권의 문제란 말입니다. 단순히 의심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요한이 예수님을 묘사할 때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할 때 극진히 사랑했다고 묘사를 합니다.

(요한 13:1) 1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여기 극진히(끝까지)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시작되어 예수님의 사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이 사랑하셔야 그들이 구원 받습니다. 한 번 택하신 당신의 백성은 끝까지 사랑하심으로 끝까지 당신의 주되심을 그에게 각인 시켜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 끝까지 사랑하심이라는 그림이 토마와 예수님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토마가 의심할 때도 끝까지 계셨고 그의 믿음이 하느님에 의해 완료되고 종결이 되어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그에게 인식이 되어 완료될 때까지도 같이 계십니다. 아니 부활의 몸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도 함께 계십니다. 영원을 살때도 예수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헤어질래야 헤어질 수 없습니다. 그게 끝까지 사랑하심입니다. 그 끝까지라는 단어 안에는 완료와 종결의 의미가 들어 있어요.

끝까지 예수님이 다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토마가 뭐하나 보탤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토마가 지금 나에게 있는 결핍만 채우면, 몇가지만 보면 나는 나의 믿음에 내가 일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다라는 것을 예수님이 이 그림에서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토마는 지금 예수님에게 나의 주요 나의 하느님이시다는 고백을 하고 있어요. 그 말은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보고 안보고에서 격발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주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인여기에서 믿음의 원리하나가 도출이 됩니다. 믿음은 우리 인간측의 결핍의 부분을 찾아내서 채우는 방식으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거저 한번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12:2) 2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똑같은 개념이 나옵니다. 믿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믿음은 1차적으로 하느님의 믿음입니다. 아버지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 주관적 믿음을 격발 시키는 것입니다. 온전케 하시는 이심. = 완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주인이시고 믿음의 시작이시고 과정이시고 완성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바라보자입니다. 거기에 도달하자가 아니라 바라보자입니다. 놋뱀이 되어 장대에 달린 예수, 그 예수를 그냥 바라보는 것입니다.

  신리성지

그 장대에 달린 예수가 놋뱀이 되어서 죽어야 할 우리의 운명이 되어서 우리 대신죽었다는 사실을 그냥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그게 믿음인 것입니다. 토마는 지금 보고서 믿겠다고 부활의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봄의 행위에 앞서 만남이 이루어지자 믿음이 토마에게 들어와버린 것입니다. 믿는 자가 되라. 어떻게 그 토마가 믿는 자가 됬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가 보고 믿느냐? 이 말은 이제 예수 믿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보고서 믿느냐?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토마가 보고서 믿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토마는 보고서 믿은 게 아닙니다. 토마가 손가락을 예수님의 상처에 휘저어보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토마와 예수님의 그림 속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고 믿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토마 안에다가 교회전부를 집어넣고 믿음은 보고 믿는 게 아니다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토마는 보고 믿었고 우리는 안보고 믿어서 우리가 더 복된 자다고 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오감의 인식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느님의 선물로 믿음을 받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실력으로 결정이 나는 것이 아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는 방식으로서의 구약적 믿음의 수여 방식을 철수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본문 29절 보세요 29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토마는 보고 믿은 자고,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은 자라는 잘못된 구별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토마에게 너는 나를 본거로 믿지만 그건 한 수 아래의 믿음이야! 이제 보지 못하고도 믿는 사람이 나올 텐데 그들이 진짜 복받은 사람들이다 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토마든 토마이외의 모든 성도도 에수님의 부활을 말씀을 통하여 전해만 듣고 믿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도 한사람 없습니다. 그냥 다 전해들은 것입니다. 전해 듣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는데도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못믿어요.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여 그들에게 뚫고 들어갔더니 그때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런 방식으로 오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보고 경험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40일간 함께 하면서 여러번 목격하고 했음에도 그들은 예수를 믿지 못했습니다. 계속 고기 잡으러 갔고 계속 문잠그고 두려워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령이 믿음으로 예수가 지혜가 뚫고 들어와 버리니까 그들에게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토마의 그림은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토마에게 니가 지금 나를 본거로 믿은 게 아니고 내가 너를 만나러 오자 나가 너의 주인이며 하느님인 것을 고백했다. 그것이 본거로 믿어진 것이 아니란 것은 니가 더 잘 안다. 하느님의 복을 받은 자들 하느님의 백성들은 바로 그러한 모양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지 못해도 믿는, 너희 인간들 중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실력이 있는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보고도 믿음에 도달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어서 그 방법으로 밖에는 못간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 성령을 보내어 믿음을 보내어 믿게 할 거야!!! 그게 복이란다.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을 받은 자가 여러분들입니다.

 

복은 분명히 완료적이고 종결적인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는 지금 하느님께 나는 뭔가 보여주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 한번만 해주세요. 하고 미완료로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종결로 다가가고 있어요. 거기에서 예수님이 종결 완료 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지 못하는 게 복이다. 그것은 복자체가 완료와 종결을 함유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우리가 어떤 성숙이나 발전을 보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 믿음은 그 자체가 완성품이며, 완료, 종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화의 개념 또한 우리가 발전되어지고 향상되어지는 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원래의 우리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그 복의 실체, 그 새 생명의 실체를 이 옛사람의 껍데기를 폭로당하면서, 부인당하면서 하나 껍데기가 벗어지는 만큼 드러나는 것이지 내가 노력을 하여 많은 체험을 하여 믿음을 완성시키고 또 내가 더 나은 존재로 향상되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성화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성화라고 하고 있고, 그리스도교가 이런 것을 추구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범신론 불교나 이슬람이나 유교같은 종교하고 뭐가 다르냐하고 도올 같은 사람이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동양사상이나 서양철학을 왕창 끌고 들어와서 토마복음 하나쓰는데 레퍼런스가 200권이 넘어요. 대다한 사람이죠. 자기가 그 책을 다 갖고 있데요. 엄청나게 공부하고 그것을 근거로 대서 그리스도교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리스도교가 인본주의 안에서 못벗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뭘 해야 되고 내가 구원얻어야 내가 천국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내가 해탈하는 거든요. 내가 브라만에게 합일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만 조금 다르지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뭐가 다르다는 거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그 하느님에게 은혜 받는 것입니다. 내가 나 개발해서 해탈에 이르는 것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착한 일 내놓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나는 밖에 어떤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 지 그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폭로당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내가 비워지고 하나님이 들어와 착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 내가 노력하는 것으로 보이고 내 안에서 착한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밖에서 볼 때는 열심히 노력해서 착한 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참 성도는 아닌 것을 압니다. 하느님이 하시고 하느님이 끝내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거 붙들지 못하면 여러분은 기독교인이 아닌 것입니다. 베레아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말씀을 확인하는 잣대로 썼던 것은 성경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이러저러한 선행이나 신비한 체험등에 의해서 믿음을 성숙시켜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었으며 왜 이러한 방식으로밖에 믿음이 수여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를 철저하게 경험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걸 알다보면 나에게 그런 은혜를 허락하신 그 아버지를 어떻게 하면 내가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구요, 그게 하느님의 성령의 열심으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열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일리지로 쌓이지 않는 변화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느님의 하신 일을 더 많이 알아가겠다고 하는 열심을 구도적 열정이라고 하는 것이고 어떤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 등을 체험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겠다는 것을 불신앙 그리고 다른 말로 신비주의라는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불신앙입니다. 나는 봐야 내 믿음을 확인할 수 있고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불신앙입니다

(루가 13: 26-28) 26 그래서 너희가 '저희가 먹고 마실 때에 주인님도 같이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해도 27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 하고 대답할 것이다. 28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들은 다 하느님 나라에 있는데 너희만 박에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예수님을 직접보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던 수많은 본 자들이, 도마의 처음 모습, 예수님에게 쫓겨나고 있습니다. 보는 것 체험 등은 절대 믿음을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들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전부 가짜라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는 가끔 하느님게서 정말 떨리는 기적으로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어요.

 

  할 수 있는 무엇이든 할 것

 

의심 많은 토마에서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서 복에 의해서 완성된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고 믿는 토마가 되는 것!!!!

손가락으로 휘저을려고 왔다가 하느님의 은혜의 공격에 의하여 그냥 그자리에서 그냥 완료된 선물을 받는 믿음의 토마가 되는게 신앙생활입니다. 의심많은 도마 그러지 말고 의심많은 나라고 하세요.

그런데 내 안에 이렇게 의심 많고 손가락으로 휘저어봐도 못믿을 놈인데 하느님께서 완료된 종결된 당신의 열심으로 그렇게 완성하신 복, 선물로서의 믿음을 나에게 심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에 이른 것이다. 라고 하느님의 은혜를 꼭 붙들면 되는 것이다. 그 때 우리에게 평화가 임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20:26)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 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습니까? 은혜를 아는 만큼 평화가 있습니다. 아니면 불안합니다. 그리고 수시로 내가 이러고도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이런 생각에 시달리게 됩니다. 여러분 평화를 누리세요. 예수께서 믿음을 완료시켜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1:6-8) 6 조금도 의심을 품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구하십시오. 의심을 품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흔들리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7 그런 사람은 아예 주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8 의심을 품은 사람은 마음이 헷갈려 행동이 불안정합니다.

보세요. 믿음과 의심이 함께 나옵니다. 8절에는 정함이 없다고 합니다. 정함이 없다라는 말은 안정됨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평화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두 마음을 품으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두마음을 품은 자인데, 사람이 두마음을 품게되면 안정이 없다, 평화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계약 약속 뜻 말씀 은혜)과 우리의 상식이나 견해를 동등하게 올려놓고 보는 것, 이게 두 마음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나를 올인할 때 내가 비로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을 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두 마음을 갖고 삽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에 올인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올인을 함에도 내 안에 마귀가 미혹하여 두 마음을 품게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내 안에 다른 마음이 잠식되어지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점령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하느님께서 완료시킨 믿음에 의해 내안의 다른 마음 육의 마음이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보세요. 토마가 두마음을 갖고 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3일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과 토마는 다른 마음 나는 손가락을 휘저어 보기 전에는 믿지 않을거야를 갖고 옵니다. 우리는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완료시킨 그 복이 믿음이 그 토마의 다른 두 마음, 그 의심을 완전히 박살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믿는 토마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토마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8:30-32)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31 그러니 이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편이 되셨으니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서겠습니까? 32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내어 주신 하느님께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야고보서 1:6-8 에서 두 마음을 품고 의심하는 자는 아무 것도 못받는다고 했습니다. 의심을 품고 절대 아무것도 주시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짜 의심없이 기도했음에도 안준적 있죠? 그리고 의심했는데 받은 적도 있죠? 어떨 때는 기도 안했는데도 주죠? 그러니까 그런 공식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믿음으로 구하지 않는 자, 의심하는 자, 두 마음을 갖은 자는 절대 아무것도 못받는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보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예수님을 선물고 받은 자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어찌 안주시겠느냐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어떤 사람은 물 컵에 물이 반이 있을 때 반이나 있네’’반 밖에 안남았어이렇게 다르게 봅니다. 똑같은 사실을 보는 데 자기가 가진 세계관 가치관에 의해서 그 사실이 각자의 것으로 재해석되어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건이 발생했는데 나의 관점이 바뀌면 하느님이 나에게 복으로 주신 내 믿음에 의해 다른 마음(의심, 두마음)이 점령당해 가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 다르게 인식이 되어집니다. 전에는 이 현실이면 비관해야 될 형편인데 하느님께서 완료하여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내 다른 마음(의심, 두 마음)을 먹어버리고 나니까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기쁨 안식 평화가 있습니다. 새로운 관점에 의한 그 사실에 대한 인식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으로 본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토마처럼 예수님의 흉터에 손가락을 넣어서 체험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토마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토마는 그렇게 의심 많은 자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바꾸세요. 관점을 바꾸십니다. 결국은 고린도후서 5장의 바울로의 고백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6)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 앞에서요. 너를 정죄하던 자가 어딨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내가 너를 간음한여자로 고소하지 않는 한 이세상 누구도 너를 고소할 수 없어!! 세상 사람들은 먼저 살다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틀로 만들어 놓은 그것을 채우는 것을 가치 있고 성공했다고 착각을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없는 것입니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내가 어떻게 끼워 들어가서 내가 만들어지는지 내 밖에 있는 것이 나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 그런대 끌려다니지마고 하시는 것입니다.

간음하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고소하지 않는 한 간음한 자가 아니야!!! 하느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하느님이 용서한 자가 어떻게 간음한 자가 될 수 있나요? 그러니까 우리도 다른 이들을 볼때 그렇게 함부로 판단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간음한 자입니다. 우리는 진짜 우리의 남편인 하느님을 떠나서 세상과 다 간음하고 있잖아요. 아닌 사람 있나요? 형제를 살인한 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그 형벌은 사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나를 하느님의 나라에 왕대접을 하여준다고 하시잖아요. 다른 이들도 하느님의 고귀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그러한 과정을 통과하면서 성숙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 없음, 자기 자신의 의심 많은 토마다움, 등을 폭로당하면서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서 공격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토마속에 나를 넣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하시면서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기 바랍니다. 의심많은 토마가 되지 말자는 그런 유치한 말 하시 마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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