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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교황님미사강론]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사도 대축일에 장엄 미사와 봉헌된 팔리움 축복(6.29.금)
작성자정진영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09 조회수1,679 추천수2 반대(0) 신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미사 강론입니다.

https://www.vaticannews.va/en.html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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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 강론 날짜] 2018629일 금요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강론 당일 독서와 복음 말씀] 1독서 : 사도행전 12,1-11

화답송 : 시편 34(33),2-3.4-5.6-7.8-9(◎ 5ㄴ 참조)

2독서 : 티모테오 2 4,6-8.17-18

복음 : 마태오 복음 16,13-19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8782&gomonth=2018-06-29&missatyp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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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새로운 대주교들을 위한

장엄 미사와 봉헌된 팔리움 축복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강론

 

성베드로대성당

2018 6 29일 금요일

 

 

방금 우리가 들은 독서 말씀들은 사도 전승으로 우리를 이어줍니다. 그 사도전승은 물건이나 말의 전달, 생명이 없는 사물들의 종합이 아니라 그 전승은 우리를 근원들로 연결하는 살아 있는 흐름이며 그 살아 있는 흐름에는 근원들이 항상 현존합니다.( BENEDICT XVI, Catechesis, 26 April 2006) 그리고 그 사도 전승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줍니다(마태오 복음 16, 19 참조). 아주 오래된 그러나 늘 새로운 전승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복음의 기쁨을 새롭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입술과 마음으로 고백할 수 있게 합니다.” (필리피서 2,11)

 

전체 복음은 그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속에 현존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또한 오늘 날에도 생명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오 복음 11,3). 예수님께서 그 질문을 받으시어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그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오 복음 16,15)

 

베드로는 큰 소리로 말하면서 어쩌면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복음 16,16 참조) 기름 부음 받으신 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백성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는지보아 왔었기에 성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 대답을 이끌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예수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은 오로지 소중한 길 잃은 이들을 구원하고 도우시겠다는 목적 하나로 마을에서 마을로 걸어 다니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에게 기름 부으셨고” (마르코 복음 5,41-42, 루카 복음 7,14-15 참조) 병자들에게 기름 부으셨고(마르코 복음 6,13, 야고보서 5,14 참조), 다친 사람들(루카복음 10, 34 참조) 그리고 회개하는 이들(마태오 복음 6, 17 참조)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으로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루카 복음 7,38.46 . 10,34., 요한 복음 11,2. 12,3 참조). 그 기름 부음으로 모든 죄인들 기가 꺾여 있는 사람들, 병약한 사람들, 이교도들, 그들이 자신을 발견하는 어디서든 하느님 가족의 사랑 받는 일원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행동으로 매우 인격적인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것이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또한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가 들은 것 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한 것들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또한 거룩하신 분의 기름 부으심으로 생명으로 가게 되었고 치유 받아 왔고 다시 새로워져 왔고 그리고 희망으로 가득 채워져 왔습니다. 그 기름부음 때문에 종살이의 모든 멍에가 사라져 왔습니다(이사야서 10,27 참조). 우리가 어떻게 속량 받은 그 기쁨에 찬 기억, “당신께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오 복음 16,16 참조) 라고 이렇게 고백하도록 이끄심 받았던 그 기쁨에 찬 기억을 잃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한 이 복음의 구절 다음에 어떤 말씀이 뒤따랐는지 살펴 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즉 이 말씀입니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오 복음 16, 21).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은 성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바로 그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 자비하신 사랑은 우리도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가 닿기 위해서 삶의 모든 곳으로 나아가기를 요구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우리의 명성”, 우리의 안락함, 우리의 지위를 대가로 치르도록 할지라도, 심지어 순교의 고통까지도 대가로 치르도록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밝혀 알려 주시는 말씀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반응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16, 22). 이렇게 그는 바로 메시아의 길에 방해물이 됩니다. 그가 하느님의 권한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면 베드로는 그것을 알아 차리지도 못한 채 주님의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십니다. 베드로의 삶과 그의 믿음의 고백을 묵상한다는 것은 또한 모든 제자의 삶을 따라다닐 유혹을 인식하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우리는 하나의 교회로서 항상 그 악한 존재의 저 속삼임들을 듣도록 유혹 당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명을 가로 막는 방해물이 될 것입니다. 나는 속삭임에 대해 말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자기의 의도가 알아차려지지 않도록 숨어서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숨은 채로 있기를 바라면서 위선자처럼 행동합니다”[로욜라의 성이냐시오 영성 수련 n. 326(SAINT IGNATIUS OF LOYOLA, Spiritual Exercises, n. 326)]

 

그리스도의 기름 부으심 안에서 나누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십자가이신 그분의 영광 안에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요한 복음 12,28) 예수님 안에서 영광과 십자가는 함께 갑니다. , 영광과 십자가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일단 우리가 십자가에 등을 돌리면 드높은 영광을 얻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하고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원수들의 간교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의 상처들과 영악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유혹을 느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비참함을 어루만지시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다른 이들의 고통 받는 몸을 어루만지면서 그분과 함께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입술과 우리의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우리가 베드로처럼-악한 존재의 속삭임들을 인식하는 것을 배우기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현실 이야기들로부터 우리가 멀어지게 하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인 체험들을 접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하여 결국 하느님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그 혁명적인 힘을 알지 못하게 하는 저 개인과 공동체의 핑계들을 알아차리고 식별하는 것을 배우기를 요구합니다. (복음의 기쁨 270 참조)

 

당신의 영광을 십자가와 분리하지 않으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을, 그분의 교회를 승리주의의 공허한 형태들로부터 해방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 없고 섬김이 없고 연민이 없는 방식들, 사람이 없는 방식들에서 해방시키기를 바라십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교회를 하느님의 믿는 이들의 삶에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하는 거대한 환상에서 해방시키고 싶어하십니다. 더 나쁘게는 주님을 섬기는 것은 역사의 먼지투성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는 거대한 환상에서 그분의 교회를 해방시키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묵상하고 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성부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분의 백성을 결코 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고한 깨달음 안에서 그분께서 일치감을 느끼기를 바라 오신 사람들 모두에게(성 요한 바오로 2, Novo Millennio Ineunte, 49 참조) 마음을 열기를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1,3) 우리의 입술과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합시다.(필리피서 2,11) 이것이 우리가 매일 읊조리도록 부름 받는 성가(the cantus firmus)입니다. 소박함으로 교회가 자기 자신의 빛이 아닌 그리스도의 빛으로 빛난다는 것을 깨닫는 기쁨과 확신은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the Sun of Justice)로부터 나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티아서 2,20) (성 아브로시오, Hexaemeron, IV, 8, 32)

 

 

 

강론 영어 원문 ->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homilies/2018/documents/papa-francesco_20180629_omelia-pallio.html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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