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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15주일. 2018년 7월 15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13 조회수1,446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15주일. 2018715.

마르 6, 7-13.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배워 실천하면, 그들 안에도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어 그들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하면서, 기록하여 문서로 남긴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40년 후, , 서기(西紀) 7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초창기(草創期) 신앙공동체의 상황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당부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실제로 하신 말씀도 있고, 또한 초기 신앙인들의 활동 상황과 그들의 마음다짐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열두 제자를 택하여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處刑)으로 돌아가시자, 실망하여 흩어져 각자 자기의 생업(生業)으로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각자 체험하면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바를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유대교의 율사(律士)와 사제(司祭)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權限)과 신분(身分)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 우월감(優越感)을 가지고,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조직(組織)과 제도(制度)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절대화(絶對化)하여 경직(硬直)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우월감도, 그런 경직성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런 우월감이나 경직성 없이,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로이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는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고, 서로를 섬깁니다. 그 섬김은 서로의 발을 씻어주기까지 하는 겸손한 것이기를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신비스런 지배권(支配權)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제자들의 역할이 인간을 지배하는 나쁜 힘, 곧 더러운 영들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定立)합니다. 인간 안에 어떤 무질서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은 쉽게 더러운 영혹은 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사회적 무질서는 더러운 영의 조화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복음 선포는 그런 무질서의 해악(害惡)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기적이 회당에서 정신병자를 고친 일이었다고 말하면서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1,27)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도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사실 그 시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들보다 더 가벼운 차림으로 다닐 것을 원하셨습니다. 가지고 다니는 짐이나 옷차림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에 남의 눈에 띄는 복장(服裝)을 하고, 불편에 대비하여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섬기는 사람답게 단순한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닌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얼마든지 민폐(民弊)를 끼쳐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가정(家庭)집 공동체였습니다. 신자들 중 넓은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집을 공동체의 집회(集會) 장소로 제공하고, 그런 집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가 발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집 하나가 집회 장소로 정해지면, 모두 그 집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그 지역 신앙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이나바울로 사도의 서간들을 보면, 제자들이 선교 여행 중 거점(據點)으로 정한 곳은 가정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개인의 집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공동체의 특수 계층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선교는 어느 신분(身分)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복음을 충실히 살며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과 옷차림에 구애받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신체적 혹은 사회적 무질서(無秩序)의 해악(害惡)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인류 사회는 조직에 있어서 유연(柔然)함을 추구합니다. 제국주의(帝國主義), 봉건주의(封建主義) 혹은 공산주의(共産主義) 사회보다 더 유연한 것이 민주주의(民主主義) 사회입니다. 오늘 민주주의 사회는 자발적 시민운동들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더 큰 유연함을 향한 행보(行步)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는, 더 유연한 조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통신 매체들은 사람들 모두가 정보를 쉽게 공유(共有)하게 해 줍니다. 세상은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개방하고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과 단체가 실효성을 지닙니다. 경직된 개인이나 집단은 고립되고, 실효성이 떨어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교회가 신앙인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성직자(聖職者) 중심의 경직된 융럽 중세(中世)적 조직을 교회가 고수한 데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의 삶 안에 되살려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갱신(更新)을 하자고 개최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언어와 옷차림과 제도적 경직성(硬直性)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람들 안에 하느님이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계시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관()을 쓰고, 거창하게 입고, 권위주의적 언어로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함께 토의하며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섬기는 유연한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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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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