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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7.1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16 조회수1,897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8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사 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부를 두둔해 주어라.

복음 마태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

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싫다’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좋다’입니다.

 ‘틀리다’의 반대말은 ‘맞다’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르다’의

 반대말은 무엇입니까?

‘같다’입니다.

이렇게 ‘싫다, 틀리다, 다르다’

는 분명히 모두 다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른 것을 싫어하고,

 싫어하는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면서 싫다, 틀리다,

다르다를 종종 한 덩어리로

묶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또 함께 하는데 힘든

상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세상 안에서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좋게

보지 않는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것이 싫은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단지 나와 다를 뿐인 것입니다.

혈육이라고 말하는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해서 그 가족이

무조건 틀린 것일까요?

자신을 응원하거나 지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족도

 아니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가족 구성원들과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이 다름을 틀린 것과 싫은 것의

동의어로 생각하면서 함께 할 수도

 또 일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 자신의 속 좁음이 결국

 세상의 불일치를 가져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늘 스스로 지금 내 자신의

판단을 하나하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웃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비로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옛날의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들과 다른 것을

 ‘틀렸다’라고 하고, 그 다른 것을

 ‘싫다’라면서 거부했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예수님의 뜻과

 일치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이웃을 향한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작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를 죽음에서 구해내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행동을

해야지만 사랑을 실천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싫음과 틀림을

 잘 구별하면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야지만 내 이웃을

받아들일 수가 있고,

이 모습의 결과는 곧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한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한 내 마음과

일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이웃을 이해하기 위한

나의 노력은 과연 무엇입니까?

인생은 오묘해서 적이라고

여겼던 사람과

화합할 때가 오기도 하네.

마음을 넓게 가지면

생각지 못한 문들이 열리네

(레이먼드 조)

갑곶성지의 야외 예수님상.

"쓸데없는 다툼"

어느 연인이 있었습니다.

둘이 데이트를 하던 중에

술에 취한 한 무리의 남자들 중

한 명이 여자 친구에게

모욕감을 준 것입니다.

 여자 친구는 무척 화가 났는데,

남자 친구는 위험하니

그냥 가자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 친구가

너무나 서운했고 동시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

“너는 배짱도 없어.

그냥 돌아가면 우리는 끝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남자는 마지못해

이 남자들과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결국 무참히 얻어맞아 병원에

 실려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피하려 한다면

서운하고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한 인정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한 여기에는 지혜로움도

필요합니다.

사실 패배를 인정한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다툼은 오히려

더 큰 패배를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은 쓸데없는 다툼으로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꼭 치고 받는 싸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간의 다툼,

친구들과의 다툼,

이웃과의 다툼 등등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다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툼이 있기 전에

상대방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지혜로움이 있다면 세상의

그 많은 다툼의 숫자를

줄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쓸데없는 다툼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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