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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16."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작성자송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16 조회수2,328 추천수1 반대(0) 신고

 

 

마태 10, 34-11, 1(연중 15주 월)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 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찌하여 칼을 주실까? 그것은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칼은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입니다.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는 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혁명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특별히 참 행복선언인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 11. 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또한, 볼리비아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본주의의 물신풍조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성 바실리우스의 말을 빌려 돈을 악마의 배설물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파라과이 방문길에서는 돈에 대한 탐욕의 체계화가 단지 나쁜 것을 넘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교묘한 독재라고 질타하시면서 인간 얼굴을 한 경제모델 세워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교종의 연설을 두고 미국 가톨릭대의 스티븐 쉬넥 가톨릭연구소장은 "교종의 발언은 통상적인 신학이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외치는 함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혁명을 위한 칼을 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칼은 이사악에게 내리친 순명과 결단의 칼이었고, 할례의 칼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칼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칼은 영혼이 꿰찔리는 고통을 주었고(루카 2, 35), 성령의 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 6, 17),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 12)

 

이처럼, 이란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이요, 그 결단의 원인이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와 이 세상에 말씀의 칼을 꽂으소서! 저와 세상을 수술하소서!

병든 이 세상과 이 몸에

금은보석으로 치장한다 해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칼로 병을 도려내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을 할 수 있는 예리한 칼이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제 심장에

당신의 칼을 꽂으시어 저희를 살리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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