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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독서 (미카6,1-4.6-8)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23 조회수1,899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6주간 월요일독서 (미카6,1-4.6-8)

 

 

 

"내 죄를 벗으려면 내 맏아들을, 내 죄악을 갚으려면 이 몸의 소생을 내놓아야 합니까?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 (7ㄴ-8)

 

맏아들(장자)를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은 사실 출애굽 당시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을 멸하시는 중, 이스라엘 자손에 속한 처음 난 것을 구별하여 보전하시면서 그들에 대해 당신 소유로 선언하신 것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다(탈출34,19).

 

물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가운데 레위인들을 구별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섬기는 일에 매진하게 하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맏아들 대신에 취하셨다 (민수8,16).

 

그리고 이방의 몰록신을 섬기는 자들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맏아들을 실제로 바치려는 일을 자행할까 우려하여 율법은 이를 금하였고, 예언자들도 이를 단호하게 금하였다. (이사57,5 ; 레위18,21 ;20,2 ; 예레7,31 ;19,5 ; 에제16,20-21 ;20,16) 그러나 이스라엘은 개국 이래 누누히 이러한 일을 최상의 헌신의 증표로 여기고 이를 임의로 자행하였다 (2열왕16,3 ;21,6).

 

진실로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결과, 불필요한 제물을 쓸데없이 허비하였을 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가중하게 여기시는 바, 자기 자신보다도 소중한 자기 자녀,그것도 맏아들(장자)을 죽여 번제로 바치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어리석고도 추악한 일,가증스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8)

앞선 6,7절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묻고 답하는 형식을 통해, 주님을 향하여 선민들이 가진 잘못된 자세의 실례를 제시하는 내용이다. 반면에 8절은 예언자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계시를 통해 밝히는 내용이다.

 

본문의 말하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착한 일' 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반절의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 과 병행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본절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착한 일이지, 결코 6,7절에서 제시되는 인신제사와 같은 반인륜적 제물이나 부정 부패나 불의한 방법을 통해 얻은 사치스러운 제물이 아님을 밝힌다.

 

특히 후반부에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착한 일은 불의한 제물과 상반되는 정의로운 삶이고, 물질적으로 대단해 보이는 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 갖는 사랑이며, 형식적이고 종교적 율법 준수가 아닌 삶에서 드러내는 인격적 변화가 따르는 행동임을 제시하고 있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8)

본문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첫번째 부정사구인 '아소트 미쉬파트'(asoth mishiphat)'공정을 실천하는 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공정(정의)이 무엇인지를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공정'(정의)에 해당하는 '미쉬파트'(mishiphat)하느님의 속성인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성품중의 하나이다. 이 단어는 재판관이 바른 판결을 내리는 것을 나타내거나(신명25,1 ; 여호20,6),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심판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사용된다.(욥기22,4 ; 시편143,2)

 

이것은 아울러 일상적인 삶의 행동에서(시편106,3), 또는 말에서(시편37,30), 또는 그 생각이나 사상에서(잠언12,5) 보이고 간직해야 할 정의로움 내지 정직함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충분한 정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실천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예레22,3).

 

한편, '신의'에 해당하는 '헤쎄드'(hesed)하느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사랑(자비와 인자)나타내는 단어이다. 이것은 자상함, 친근함, 애정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진 근본적인 의미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계약적 사랑' 으로 규정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오직 계약에 입각해서 무조건적으로 그 백성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셨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과 관련해 사용하면, 하느님의 계약적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충성', '온유함', '인자함', '자비로움' 등 인격적인 덕목을 구비하는 것이며, 그것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구현하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8)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는 세번째 요구사항은 겸손히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여기서 '겸손하게' 에 해당하는 '하츠네아으'(hatsneah)는 '걷는 것' 에 해당하는 '레케트'(leketh)처럼 부정사형이다.

 

즉 본문은 하느님과의 동행만큼 동일한 비중으로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의 반대는 두 말할 나위 없이 '교만' 이다. 성경 곳곳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심판의 지름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잠언11,2 ;16,18 ;17,19 ;18,12 ;29,23 ; 이사2,11)

 

그러므로 본문에 제시된 그 반대의 삶의 자세인 '겸손'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승리와 구원의 자리에 든든히 자기를 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겸손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피조물됨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자만이 참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는 자는 창조주 하느님께 자신이 어떤 제물을 드린다해도,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이요, 결코 그 제물만으로는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절감하게 마련이다.


즉 그는 하느님 앞에 일 년 된 송아지든, 수천 마리 숫양이든, 만 개의 강물같은 기름이든, 심지어 그 태에서 난 맏아들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만으로 하느님 대전에 내세우거나 그것만을 하느님을 만족시킬 수 없음을 절감해야 한다.


그가 하느님 대전에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오직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느님 대전에 겸손 외에 없다. 또한 하느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동행)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것 역시 겸손과 일맥상통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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