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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인간은 ‘만남’을 통해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존재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28 조회수2,09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8년 나해 연중 제17



<인간은 만남을 통해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존재>

 



 

복음: 요한 6,1-15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

LORENZETTI, Pietro 작, (1325)

 

 

 

    

진화론생존을 위해 각 개체가 스스로 자기 한계를 극복해나간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신()도 인간이 자기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내야만 했던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이런 생각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극찬 받는 세계적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입니다. 인간이 자기 한계의 극복을 위해 신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내용이 기니까 신이 지금의 인간을 만들었다는 결정적인 증거’ (1분 과학, 유튜브)를 먼저 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글로 읽어도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과 7만 년 전 까지만 해도, 인간은 침팬지나 사자, 개똥벌레나 쇠똥구리와 같이 지구의 생태계에서 조그마한 영역만을 유지한 채, 다른 동물들과 어우러져 사는 한 종의 동물이었습니다. 인간이 지구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지금의 여느 동물들이 가하는 영향력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는 동물이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인간 개개인의 능력에 초점을 두고 생각합니다. 두뇌의 크기,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한 신체,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능력과 불을 이용할 줄 아는 능력 등, 인간이 다른 동물들보다 뛰어난 부분에 초점을 두고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론 모두 어느 정도 맞는 주장이지만,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선 호모 사피엔스의 두뇌는 이미 20만 년 전부터, 현재의 우리들의 두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오히려 지금보다 컸던 두뇌를 가지고 있었고, 불은 150만 년 전부터, 도구는 300만 년 전부터 각각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섬세한 손가락과 큰 두뇌로 자랑스럽게 깎은 날카로운 돌을 손에 쥐고 있다고 한들, 온 몸이 무기인 사자라도 만난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야생 적응력도 다른 동물에 비해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침팬지 한 마리와 인간 한 명을 야생에 풀어두고 생존게임을 하라고 한다면, 둘 중 어느 쪽이 먼저 시체로 발견될까요? 동물의 세계에서 인간 개개인의 능력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나약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요? 유발 하라리는 그의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서 그 비밀이 바로 이 조형물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조형물은 32천여 년 전에 만들어진 사자-인간이라는 이름의 조각품으로, 1939년 독일의 동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조각품의 몸통 부분은 인간의 몸으로 되어있지만, 머리는 사자의 머리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일 수 있는 이 조각품은 인류의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이 조각상에 담겨있는 인류의 비밀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가 동물 역사상 최초로 보이지 않는 환상의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는 능력이 인류를 세상의 지배자로 만듭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호모 사피엔스 개개인의 신체적 능력은 정말 보잘것없습니다. 그러나 특유의 사회성을 가진 사피엔스들은 서로 힘을 모아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돕고 살아왔습니다. 누군가 딸기를 채취하다가 저 멀리 어슬렁거리는 사자 무리를 발견하면, 그는 재빨리 동료들에게 달려가 저기 산 너머에 사자가 있으니 가면 안 돼.”라는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입니다. 그 메시지를 들은 호모 사피엔스는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산 너머에 사자가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호모 사피엔스는 보이지 않는 것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인지적 진화 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이 능력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능력이 가상의 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같은 의학적 지식이 없었던 시절, 버섯을 먹고 갑작스럽게 죽는 동료나, 엄마의 뱃속에서 나오는 기형아, 가뭄이나 홍수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미스터리한 일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연을 통제하는 환상의 존재, , “때문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이 신이라는 존재가 혈연으로만 맺어졌던 사피엔스들의 소규모 공동체를 피 한 방울 안 섞인 수많은 사피엔스를 한대 묶는, 대규모 공동체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신이 출현하기 전 그들이 이루고 살아가는 사회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공동체는 혈연으로 맺어진 친가족으로 국한되어 있었고,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다른 부족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모두 경쟁 상대이자 적이었는데, 신의 출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초자연적인 신을 믿고, 다른 부족의 인간들도 똑같이 그 신을 믿는다면, 공통의 신 아래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연대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규모의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던 사피엔스들은 유례없이 강력한 대규모의 집단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이 논리는 현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천주교 신자는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이 같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에게 더 신뢰감과 친근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것은 개신교 신자나 이슬람 신자 등 다른 모든 종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현상입니다.

 

이 이론은 인지 과학자이자 종교학자인 아라 노렌자얀의 저서 거대한 신에 나오는 이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의 책에서 나오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현대에는 수많은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지만, 그들의 교리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면 벌을 받고, 착한 짓을 하면 상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종교의 신들이 다 이렇게 도덕 선생님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닙니다. 초기에 종교들은 대부분 비를 내려주거나, 맹수에게 물려 죽지 않도록 기원해주는 종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감시자의 역할까지 하는 신을 앞세운 종교들만이 거대하게 번성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종교의 전지전능한 신이 호모 사피엔스 개개인의 행실을 항상 감시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서로가 서로를 아는 사이가 아닐지라도, 같은 신을 믿는다면 저 사람이 나를 속이지는 않겠구나.”라는 믿음으로 같이 협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고, 따라서 모르는 남일지라도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재 관찰할 수 있는 거대 종교들은 모두 하나같이 인간에게 도덕적인 행실을 권유하고 비도덕적인 행위는 처벌하는 권선징악의 종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신뢰감으로 수 백 수 천 명이 같이 협동할 수 있게 된 호모 사피엔스들은, 기껏해야 30마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사자들이나, 100여 마리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침팬지들까지 손쉽게 제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것은 인간의 유전적 진화라고 하기보다, 문화적 진화, 즉 신의 탄생으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침팬지와 호모 사피엔스 외에도 많은 영장류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데, 그 공동체의 규모는 두뇌 신피질의 부피와 상관관계를 이룬다고 합니다. 이것을 던바의 숫자라고 일컫는데, 신피질의 부피에 함수를 넣어 계산을 해보면, 침팬지는 생물학적으로 최대 120마리까지 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고, 인간은 최대 150명까지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답이 나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의 인지력은 생물학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서로 알고 지낼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150명이 최대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페이스북에 등록되어있는 친구가 수 천 수 만 명이 되어도, 150명이 넘어가면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사는지 알 지 못한다는 얘깁니다. 인류의 조상은 오랜 기간 혈연으로 맺은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왔고, 두뇌도 그에 맞게 진화해 왔는데, 이 두뇌가 인식하는 공동체의 범위는 150명이 한계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던바의 숫자를 믿지 못했던 라스베가스의 마술사 릭 랙스는, 던바의 숫자를 깨보겠다며 자신의 페이스북 친구들을 상대로 실험을 자행했는데, 페이스북 메시지를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전달하며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생물학적 한계가 신이라는 존재로 인해 깨진 것입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믿었던 인간은 세상을 지배하지만, 보이는 것만 믿었던 다른 동물들은 철창 속에서 사는 신세로 전락해 버립니다.

이 차이가 바로, 모든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분리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러니 신이 지금의 인간을 만든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신은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동물 중 한 종에 불과했던 인간이 생존을 위해 상상의 신을 만들어 그 신의 윤리관을 바탕으로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모든 동물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인간을 잘 이해하지 못한 시스템적 오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반도체 없이 컴퓨터를 만들어낸 것과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진화론을 믿는 이들이 인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은, ‘인간은 스스로 스스로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물론이요 어떤 동물도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극복할 능력이 없습니다. 모든 동물은 만남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의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면 인간은 생존본능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아기가 태어나서 무인도에 버려졌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 아기가 혼자 신의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신은 둘째 치고 말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고 심지어 두 발로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그를 발견한 동물에 의해 다행히 키워졌다면 그 동물의 수준밖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기가 누군가 두 발로 걷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 영원히 네 발로만 걸을 것입니다. 두 발로 걷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도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누군가에게서 받아야합니다. 그것이 부모입니다. 부모는 이미 두 발로 걷고 있어야하고 아기가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한없는 희생을 해야 합니다. 그런 희망과 믿음과 사랑이 주어지지 않으면 절대 아기는 두 발로 걷기를 희망할 수도, 믿을 수도, 그러니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무언가 할 수 있다면 보아서 할 수 있는 것이고, 무언가 말할 수 있다면 들어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말하고 있다면 인간이 언어를 하고 있는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아이가 1억년을 그 섬에서 살아도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상상으로 신을 만들어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보지 않은 것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사람과 사자를 결합시키려는 마음도 생겨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자가 산 뒤에 있다는 것은 이전에 보았던 것을 떠올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람과 사자로 만든 조각상도 이미 존재하는 것들의 조합입니다. 물론 그 존재하는 것들로 새로운 창조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새로운 창조의 능력은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예술에서는 영감(Inspiration)’이라고 합니다. 예술가들은 이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갖고 싶을 때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초월적인 존재와의 만남으로 오는 것이 영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신을 상상해 낼 수 있었다면 신을 만났기 때문이지 인간 스스로 그런 존재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큰 무리를 만들기 위해 신을 만들고 공통된 상선벌악의 신학체계를 세우지는 않습니다. 인간만이 우연하게 신을 만들어서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말은 이미 인간에게만 어떤 존재가 그런 영감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이 신의 존재를 체험하게 되는 경우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생각을 미리 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신 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체계 안에 있는 필립보나 다른 제자들은 이들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어리둥절해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200데나리온 어치를 사도 모자랄 것이고 게다가 그렇게 많은 빵을 살 곳도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음을 믿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누군가를 만났다면 그리고 그 누군가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 자기를 초월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기적을 한 번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으셨고 그러니 하느님처럼 하실 수 있음을 믿으셨습니다. 이것이 만남을 통한 자기초월입니다.

 

이 믿음을 만난 제자들 역시 자신들도 빵을 떼어 나누어주며 기적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과 만난 이들은 이제 자신들도 한계를 초월하게 됩니다. 물 위를 걷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것을 보고서야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초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될 때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고 믿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을 원해야 합니다. 인간의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할 수 있는 것을 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분명 하느님이 계심을 의심하지 않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던 빌 포터는 어머니의 권유로 미국 생활용품 회사 왓킨스사에 면접을 봅니다. 그러나 말도 어눌하고 한 쪽 손과 발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의 사람에게 누가 방문판매를 맡길 수 있을까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를 믿어주었고 그는 판매지역 중 가장 힘든 지역을 맡아보겠다는 조건으로 입사하게 됩니다.

매일 15km를 걸어 수많은 집을 방문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구걸하러 오는 사람 취급을 하였습니다. 지쳐 포기할라치면 매일 어머니가 싸주는 샌드위치에 케첩으로 써 놓은 인내하라, 끝까지 인내하라.’라는 글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더 이상 자신을 지켜 줄 수 없을 때도 그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렇게 24년 동안 수백만 가구의 문을 두드린 결과 그의 꾸준함에 감동한 고객들은 그가 가져오는 물건은 무엇이든 믿고 구매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 서부 지역 최고의 판매 왕 자리에 올랐고 그 기록은 30년이 지나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힘을 주었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를 믿어주었던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이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의 마음 안에 참고 참고 또 참아야만 한다는 마음을 심어주신 분이 어머니이고 그 어머니가 빌 포터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준 것입니다.

 

빌 포터를 보며 스스로의 힘만으로 그런 일을 이루어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한계는 자신보다 먼저 그 한계를 극복한 누군가를 만나지 않고서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계를 깨어주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이런저런 봉사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분과 함께 했더니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분의 존재를 체험할 수 있게 되고 또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도 믿게 되고 이웃도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그냥 시간을 보내며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는 오천 명의 배고픈 사람들이 있고 주님은 그들에게 우리보고 양식을 주라고 하십니다.

 

높은 이상을 품지 않으면 한계의 극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무엇인들 할 수 없겠습니까?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계산만 하고 있다면 기적을 체험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보다 더 큰 이상을 품어야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안엔 주님께서 깨우시려고 하는 거인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그 거인은 주님의 만짐으로 깨어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거인이 됩니다. 내가 거인이 되었다면 나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내가 더 잘 알기에 하느님께 대한 확신이 더해집니다. 그러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한계는 내 힘으로가 아니라 한계를 극복한 누군가의 만남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주실 분을 만났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합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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