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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제1독서(예레13,1~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30 조회수1,258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제1독서(예레13,1~11)

 

 

 

 

 

 

 

 

"나도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그처럼 썩혀 버리겠다. 

 이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하였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부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 주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9~11)

 

'나도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그처럼 썩혀 버리겠다.'(9)

 

본문은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이 보여왔던 교만에 대한 응분의 심판으로

그들을 물가에 두었던 아마포(베) 띠와 같이 썩혀 쓸모없게 만들겠다는 예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의 이면에는 과거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이

찬란한 영광 가운데에 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에서 두 번 쓰이며 모두 '교만'으로 번역된 '께온'(geon)의 원형

'까온'(gaon)이 많은 경우 '교만', '오만', '거만'이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만

(잠언16,18; 아모6,8; 나훔2,3), 때로는 하느님의 위엄이나 크심(탈출15,7; 이사2,10),

혹은 어떤 대상의 화려함이나 영광스러움(이사4,2; 60,15; 아모8,7)을 나타낼 때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하느님께서 선택한 백성 남부 유다와 하느님의 현존(임재)를 상징하는

처소인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큰 위엄을 가졌었고, 영광과 화려함을 누렸었다.

 

그러나 남부 유다가 하느님의 선민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고

또한 하느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우상을 숭배하는 처소로 변함에 따라

하느님께서는 남부 유다의 위엄과 영광을 썩게 만드셔서

남부 유다를 이방의 포로로, 예루살렘 성전과 시가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본문에는 하느님께서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제거하신다는

의미와 더불어 당신께서 과거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축복으로 주셨던

영광과 탁월함을 빼앗아 버리신다는 의미까지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악한 백성이 내 말을 듣기를 마다하고, 제 고집스러운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좇아 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예배하였으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띠처럼 되고 말 것이다.'(10)

 

본절에서 남부 유다가 썩은 아마포 띠같이 쓸모없는 민족이

되는 이유로 세가지 죄 지적된다.

 

첫째는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것이며,

둘째제 고집스러운 마음의 완고함 안에서 행하는 것이며,

셋째다른 신들의 뒤를 좇아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원문의 표현은 문법적으로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의 점진적 움직임을 묘사하는 효과를 전달한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절하는 남부 유다의 마음 상태가

보다 동적인 상태, 즉 자신들의 마음의 완고함 안에서 행하는 상태로 발전하고,

급기야는 활발하게 다른 신들의 뒤를 좇는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는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선택받은 남부 유다가 우상을 좇아가는

망령된 자들로 변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지선악과를 따먹은 인류 최초의 아담의 범죄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범죄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결국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최대의 범죄인 극악한 우상 숭배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임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와같이 타락한 남부 유다는 본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결국 썩어서 쓸 수 없게 된 띠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부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 주님의 말씀이다.-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11)

 

본절은 양보절과 귀결절이 결합한 구문이다.

양보절 전체는 구약 성경에서 60회 정도 사용되었는데,

'~처럼 ~그렇게' (as ~ so)란 직유적 의미를 전달하는 구문에 사용된다.

 

따라서 본문은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하여 있는 것처럼, 바로 그렇게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하느님께 속하게 하였음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양보절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이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을 때의 결과를  네 가지로 전달하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내 백성','명성','칭송','영광'이 되게 하는 것으로 전달한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내 백성'

되게 하신 것은 그들을 선민으로 부르셨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을 '명성'(이름)이 되게 한다는 것은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그들을 '칭송'이 되게 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찬양이 된다는

의미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선민들의 삶을 보면서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선민들로 하여금 '영광'이 되게 한다는 것은 선민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도구로 삼으셨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내용은 선민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아주 소중하게 여겨져

축복을 받고, 하느님께 중요한 사명을 부여 받았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구약의 선민 뿐만 아니라 신약의 선민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는 하느님의 백성이며 하느님의 이름(명성)이고,

하느님의 칭송(찬양, 명예)이며 하느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11)

 

앞선 양보절은 길게 기술된 반면, 귀결절은 단 두 단어로 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양보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선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노력은 너무나 컸으나 선민은 너무나 쉽게 그리고 너무나 단호하게

하느님의 사랑과 노력을 거부하여 버렸다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본문에 나오는 부정어 '로'(lo)가 강한 부정을 나타내듯이 선민은

하느님의 모든 관심과 배려를 일거에 단호하게 배격했던 것이다.

선민의 모든 불행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로 하여금 아마포(베) 띠를 구입하고 착용하여

유프라테스 강가에 은닉한 후 다시 회수를 명령하는 지금까지의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까닭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계시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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