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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독서 (예레14,17ㄴ-2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7-31 조회수1,601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독서 (예레14,17ㄴ-22)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나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 (17ㄴ)

 

앞선 15절, 16절에서는 하느님의 심판이 백성을 거짓 예언으로 유혹하는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유혹을 받아 참 예언을 배척하고 죄를 범하였던 백성들에게도 미침을 예언하였다. 이제 17절과 18절은 하느님의 심판이 시행된 결과로 야기된 참혹한 참사을 부각시킴으로써,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임할 것임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그들에게 이 말을 하여라' 란 하느님의 명령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명령하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며, 명령을 받는 '너'는 예레미야이고 '그들'은 파멸을 겪게 될 남부 유다 백성들이다.

 

본절의 1인칭 표현은 예레미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즉 이 부분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레미야가 심판을 당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 자신의 슬픔을 전하되, 전하는 예레미야 자신을 '내' 라고 칭하면서 전하라고 명령하는 주문으로 이해한다.

 

그럴때, 이러한 본문은 눈물의 예언자로서의 예레미야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 된다. 즉 이 부분은 예레미야가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심판받고 고통받는 동족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는 예언이 소개되는 구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본절 후반부에는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처녀 딸, 내 백성' 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원문에는 '뻬툴라트 빠트암미'(bethullath bath-ammi)라고 되어 있다.

'처녀'(the virgin)에 해당하는 '뻬툴라트' '딸'(daughter)에 해당하는 '빠트'는 모두 한 단어처럼 연결되어 있는 연계형이다. 이러한 연계형의 의미를 정확하게 살려 이를 다시 번역하면, '내 백성의 처녀 딸' (the virgin daughter of my people)이 된다.

 

특히 '빠트'와 '암미'(내 백성 ; my people)사이에는 두 단어를 한 단어로 결합시키는 연결 부호 '막켑'(magkep ; '-')이 있으므로, 이것은 '딸 내 백성' 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내 백성의 딸' 로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처녀 딸, 내 백성' 이란 의미로 볼 경우,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 백성' 인 남부 유다 백성이  순결한 '처녀' 처럼 다른 민족에게 유린당한 적이 없는 사랑스러운 '딸'이었으나, 지금은 유린당한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내 백성이 처녀 딸' 이란 표현으로 볼 경우에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장에서, 남부 유다 백성 가운데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이며, 남자가 아닌 연약한 딸조차 멸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표현이 된다.

 

또한 고대의 전쟁에서는 패배한 쪽의 처녀들이 무자비한 모욕을 당했으므로, 전쟁에서의 패배와 큰 모욕을 받게 됨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 결국 남부 유다의 멸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본문은 전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연약하고 어린 여자들까지 큰 파멸과 중한 상처를 입는 끔찍한 현상에 대하여 또한 전쟁에 패하여 극한 수치와 모욕을 받게 된다는 사실로 인하여,  예레미야가 너무나 슬퍼 밤낮으로 눈물을 그치지 않고 흘린다는 의미가 된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오,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18)

 

본절은 남부 유다가 함락되는 날의 참상을, 성 밖의 들과 성읍 안의 광경을 예언함으로써 눈에 보는 듯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에는,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그런데 보라'(then behold)로 번역할 수 있는 '웨힌네'(wehinneh)란 표현이 2회 등장한다. 이것은 들에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이 널려 있고, 성읍 안에는 기근으로 병든 자들이 널려있는 참혹한 상황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이러한 본문의 표현은 14장 13절에 나오는 '너희는 칼을 보지 않고 굶주림이 너희에게 닥칠 리도 없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너희에게 참 평화를 주겠다'거짓 예언자의 예언이 완전한 허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본문 서두에는 '정녕', '진실로' 로 번역된 접속사 '키'(ki)가 나오는데, 이 의미로 보면, 예언자나 사제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도 하느님의 심판으로 인한 전쟁과 기근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비참한 지경에 처해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접속사 '키'(ki)'오히려'로 번역하면, 백성들이 적의 칼에 죽고 기근으로 죽어가는 상황에,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위로하며 하느님께 기도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그 장소를 떠나 도망다닌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를 취하더라도, 종교 지도자들도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의미만은 동일한다.

 

그리고 '헤매고 다닌다' 에 해당하는 '싸하루'(saharu)의 원형 '싸하르'(sahar)기본적으로 '배회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재앙의 땅 남부 유다를 떠나 방황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보다 보편적인 해석은, 그들이 종교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며, 고통당하는 동족을 버리고 도피하여 이리저리 헤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비록 남부 유다 땅을 빠져나왔지만, 어디로 가며 어떻게 해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지, 혹은 장래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를 알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바빌론의 침공 때 주로 귀족 계층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포로로 잡혀갔다는 점에서, 18절의 의미를, 그들에게 있어 익숙하지 않았던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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