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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제1독서(예레15,10.16~2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01 조회수1,555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7주간 수요일 제1독서(예레15,10.16~21)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 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16.18~19)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 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16)

 

예레미야서 15장 16절이하 18절에서는 악한 시대의 고독한 예언자로서 영육간에

고갈을 호소하는 내용이 소개된다.

 

"Thy words were found, and I did eat them ;

 and thy word was unto me the joy and rejoicing of mine heart ;

 for I am called by thy name , O LORD GOD of hosts !"

 

원문따라 문자적으로 풀어본 영역본의 하나를 소개했다.

여기서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로 번역된 '니므체우 데바레카'(nimtseu debareka)에서

'발견하고'에 해당하는 '니므체우''찾다'(1열왕21,20), '드러내다','발견하다'

(신명24,1)란 뜻을 지닌 동사 '마차'(matsa)의 수동형 3인칭 복수형으로서

그 주어는 '데바레카'(debareka) '당신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것은 '당신의 말씀이 발견되었다'는 의미이고, 이 표현은

주 하느님의 말씀이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임한 사실 가리킨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마치 음식을 먹듯이 그 말씀을 '내가 받아먹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참된 기쁨이 되었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제게 기쁨'이란 표현과

'제 마음에 즐거움'이란 표현을 중복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이름 뿐인 예언자가 아닌,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사모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참된 예언자임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그리고 이어서 하느님의 말씀이 기쁨이 되는 그 이유를 자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의 원문의 문두에 나오는

접속사 '키'(ki)'왜냐하면'이라는 뜻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서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예언자 예레미야의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는가를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주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그대로 전하는 예언자가 됨으로써

어떤 부나 명예가 따라와서가 아니라 주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직책을 부여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의 진정한 기쁨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순수하고 진실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그분의 말씀을 대변했는가 드러내는

일종의 변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끝으로 예레미야는 '주 만군의 하느님'이란 감탄의 부르짖음으로

주 하느님의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순수성과 진실함에 대한 고백을 마무리한다.

 

이러한 본절 전반의 표현은 15절('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아십니다.

저를 기억하시고 찾아 주소서. 저를 뒤쫓는 자들에게 복수하여 주소서.

당신 분노를 늦추시다가 저를 잃지 마시고, 당신 때문에 제가 수모를

당하는 줄 알아주소서.')에서 그가 호소했듯이, 자신이 당하는 박해와  치욕은

온전히 주님의 예언자로서 주님을 위해 일하였기 때문이며, 주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그대로 전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토로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레미야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제 고통은 끝이 없고, 제 상처는 치유를 마다하고 깊어만 갑니다.'(18ㄱ)

 

'어찌하여'라는 뜻의 의문사 '람마'(lamma)로 시작되는 본절은

앞서 15~17절에서 피력했듯이 예레미야가 오직 주 하느님만을 위하여

주님의 예언자로서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싸웠고, 또 그로 인해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자신의 처지가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는가를 하소연하고 있는 내용이다.

 

즉 예언자 예레미야는 영육간의 극도의 피곤함과 고갈됨을 경험하고,

이것을 하느님께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극한의 고난과 곤경, 고독 속에 자신이 처하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조차 베풀지 않으시는 듯한 하느님을 향하여

도대체 언제까지 자신이 상처와 고통에 붙들려 살아야 하는지,

또 어째서 이처럼 고통스러운 일들이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는지를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하느님께 버림받은 듯한 상황속에 처하여 곤경과 핍박을 호소하는 본문의 표현

메시아의 버림받음과 대속적 수난을 예언적으로 노래한 시편 22장 2절과 3절 연상시킨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소리쳐 부르건만, 구원은 멀리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온종일 외치건만 당신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니

 저는 밤에도 잠자코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에게 가짜 시냇물처럼, 믿을 수 없는 물처럼 되었습니다'(18ㄴ)

 

'믿을 수 없는'으로 번역된 '로 네에마누'(lo neemanu)에서

'로'(lo)는 히브리어에서 가장 강한 의미를 지닌 부정어이며,

 '네에마누''참되다', '진실하다'(창세42,20),'믿다'(탈출4,8), '참되다', '확실하다'(시편93,5),

 '믿음직하다','견고하다'(1사무2,35),'성실하다', '충성되다'(2사무20,19) 등을 뜻하는

  동사 '아만'(aman)수동 완료형 3인칭 복수형이다.

따라서 '로 네에마누'는 '(물이) 확실하지 않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기에는 물이 풍부하게 흐르지만, 건기에는 물이 말라버리는

팔레스티나 지역의 기후적 특색과 간헐천(wadi)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예레미야는 주 하느님 지체를 물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지만, 물을

얻을 수 없게 되버린 '가짜 시냇물'(속이는 시내)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는 '생수의 원천인 나'(예레2,13), 주 하느님을

의지하여 그 구원하심을  믿어 왔던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만일 끝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면, 주님은 곧 '가짜 시냇물'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예레미야의 절박한 반어법적인 호소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 내가 주님의 구원을 믿고 찾아 왔는데,

만일 그 생수를 얻을 수 없다면, 당신은 가짜 시냇물이 되시렵니까?

정녕 그리하실 것입니까?' 라고 예언자는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례미야의 간절한 표현과 더불어 다소 과격해 보이는 표현은

단순히 하느님을 향한 불신과 원망의 표현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같은 본문의 표현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생수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갈급하고 고통스런 상황을 굽어 살피시고 도우시는 은혜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의미, 곧 예언자의 하느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와 구원의 간구가 함축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네가 돌아 오려고만 하면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 내 앞에 설 수 있게 하리라.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19)

 

'네가 돌아오려고만 하면'에 해당하는 '타슈브'(tashub)'돌아오다',

'돌이키다' 뜻을 지닌 '슈브'(shub)의 능동 미완료 2인칭 단수형이다.

 

'나도 너를 돌아오게 하여'에 해당하는 '와아쉬베카'(waashibeka) 역시

동일한 '슈브'동사의 사역형 미완료 3인칭 단수형에 접속사 '와우'(wau)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를 결합시킨 형태로서 문자적으로는

'그러면 내가 너를 돌이킬 것이다.'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전자의 '타슈브'예레미야가 하느님께로 돌아옴, 즉 현재의 고통으로

인한 불신앙적 절망이나 회의에 빠지지 말고, 처음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예언자적 소명을 지킬 것을 촉구하는 말이다.

 

후자의 '와아쉬베카'는 만일 그러한 불신앙적 흔들림을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지금의 고통스런 상황에서 돌이켜 회복시키길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본문은 동사 '슈브'의 상호 교차적인 사용으로

하느님과 예언자 양자의 역학 관계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동사는 하느님과 예언자와 그 백성

삼자의 역학 관계 묘사하기에 이른다.

 

본절 후반부에서 '그들이 너에게 돌아올망정, 네가 그들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언자가 나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슈부'동사를 거듭 사용하셔서 현실적인 고통과 절망이 아무리 클지라도

결코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저버리고 백성들과 같은 길에 빠져서는 안되고,

백성들이 약함을 본받거나 그들의 약함에 유혹 당해서는 안되며, 

더 나아가 오직 백성을 그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예언자가 가야할 길임을 각인시키고 계신 것이다.

 

'네가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값진 말을 하면, 너는 나의 대변인이 되리라.'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에 해당하는 '밋졸렐'(mizzollel)은 동사 '잘랄'(zallal)

분사형에 '분리, 이탈, 구별' 등의 의미를 지닌 전치사 '민'(min)이 결합된 형태로서

'헛된 것들로부터'(쓸모없는 것들로부터)란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헛된 것들로부터' '귀한 것(값진 것)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금속 제련의 과정을 연상케 한다.

이 과정에서 순수한 금속은 불순물로부터 분리되어 만들어진다.

 

여기서는 현재의 고통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불만이나 불평, 혹은 그것이

어떤 것일지라도 모든 불신앙적 요소들을 제하여 버리고, 오직 순수한 신앙으로

하느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예레미야는 '너는 나의 입' 진정으로

주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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