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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다니7,9-10.13-1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06 조회수1,55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18.08.06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다니7,9-10.13-14)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9)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9절부터 14절까지는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광경가운데 두번째 장면으로서,

2-8절의 벨사차르 제일년(원년)에서 보았던, 바다에서 나온 각기 다른 형상을 지닌

큰 네 짐승의 환시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네 마리의 각각 다른 짐승들이 온 세상을 점령하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세상은 하늘에서 그 옥좌를 두고 앉아계신 하느님에 의해 심판되며,

사람의 아들(인자)같은 분이 하느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아,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나라를 부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다니엘이 본장에서 본 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 및

그분의 궁극적인 심판과 승리를 예언하는 2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첫번째 꿈과

4장의 네부카드네자르의 두번째 꿈과 그 기조를 같이하는 환시라고 할 수 있다.

 

다니엘은 이와같은 꿈의 내용을 성경에 기록함으로써, 당시 바빌론 벨사차르 왕의

통치하에서 현재와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고 있던 하느님의 백성에게

소망을 부여하고자 했을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 짐승같은 인간 통치자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 및 하느님께서는 언젠가 당신 백성들에게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권세와 나라를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어두운 세상의 권력 하에 살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은 힘과 용기를 내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고, 하루하루를 승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는 '옥좌들이 배치될 때까지

나는 응시하고 있었다' (I kept looking until thrones were set up.) 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놓이고' 로 번역된 '레미우'(remiu)의 원형은 '레미'(remi)는, '던지다',

'배치하다' 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문맥에서는, 앞의 짐승들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옥좌가 던짐을 당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심판을 베풀기 위한 하느님의 옥좌가 새롭게 배치된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제 짐승들의  때, 특히 마지막으로 일어난 작은 뿔의 시대는 지나갔고,

온 우주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의 때가 도래하는 것이다.

하늘의 영들은, 하느님께서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갖추어 앉으시도록,

하느님의 옥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다니엘은 바로 그러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옥좌' 에 해당하는 '코르싸완'(korsawan)은 원형 '카레쎄'(karese)의 복수형이다.

그러나 '옥좌'에 앉으시는 재판관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따라서 수(number)가 호응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본문의 복수형은 문자 그대로 '옥좌' 가 여러 개 있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높고 영광스러운 재판관으로서의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 있다.

 

본문의 복수형 '옥좌'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정리해 보면,

이처럼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거나,

삼위일체 하느님 위격 각자가 동등한 심판자의 자격으로 앉을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

하느님의 우편에 인자같은 이가 동등한 자격으로 앉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이거나(마태26,64 ; 다니7,13),

하느님의 성도들이 심판자의 자격으로 하느님 곁의 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을 암시하기 위한

복수형일 수 있다(묵시20,4).

 

그런데 이어지는 문맥만을 고려한다면, 하느님의 위엄있는 심판자의 자격을

강조하기 위한 존엄 복수형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날들의 고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And the Ancient of Days took his seat)라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 영역본들이 번역되었고,

어떤 것의 경우는 '가장 존경할 만한 한 분이 좌정하셨다'

(one most venerable took his seat)로 의역하였다.

 

그렇다면, '날들의 고대'(the  Ancient of Days)란 표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무나 오래 되어서 측량하기 어려운 긴 시기를 나타내며,

이차적으로는 하느님의 영원성(eternity ;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영원 존재성)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연로하신 분'(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은 세상의 창조와 역사의 주관자되시는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만을 단독으로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원래부터 하늘의 옥좌에 앉아 계시지만, 이제는 특별히 세상 왕국들 및

적그리스도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심판의 옥좌에 좌정하신 것이다.

 

'그분의 옷은 눈처럼 희고, 마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은 흰 옷을 입고 계셨고, 머리카락 역시 흰 색이었다.

'그분의 옷' 에 해당하는 '레부셰흐'(lebusheh)의 원형 '레부쉬'(lebush)

어원적으로 예복이나 긴 겉옷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의 옷이 마치 흰눈(white snow)처럼 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도덕적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둘째는 하느님의 존엄성과 순결성을 상징한다는 견해,

셋째는 하느님의 풍성한 앎을 상징한다는 견해가 있다.

 

요한 묵시록에서 큰 환난을 겪어 내어 하늘에 올라간 사람들 역시 흰 옷을 입은 모습으로

제시되는데,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묵시7,13-14).

만약 이들의 흰 옷이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을 강조한다면, 여기서 하느님의 눈처럼 흰 옷 역시

그분의 거룩하심, 순결하심, 순수하심, 온전하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하느님은 흰 머리카락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묘사된다.

양털처럼 흰(깨끗한) 하느님의 머리카락은 사람들의 이해와 결부해 볼 때,

하느님의 나이가 매우 많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잠언서에 백발은 노인의 영광의 상징으로 나오며(잠언16,31 ; 20,29),

요한 묵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털도 희기는 눈과 같고,

양털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묵시1,14).

 

이상의 의미를 종합하면, 본문은 하느님께서 존재론적으로 영원무궁하시고,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고 온전하시어,

죄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분의 옥좌는 불꽃 같고, 옥좌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았다.'

 

다니엘의 환시 가운데서 보여지는 하느님의 옥좌는 화염으로 휩싸여 있거나 화염 그 자체였다.

그 옥좌에는 여러개의  바퀴들이 있는데, 그 바퀴들 역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이거나

또는 그러한 불로 휩싸여 있었다.

 

이와같은 영상은 의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엄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이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휩싸여 계신다고

말한다(1티모6,16 ;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다니엘이 본 그 불꽃, 혹은 이글거리는 화염은 물리적으로 무언가를 태우는 불이라기보다

악인들을 심판하는 심판의 두려움을 자아내고, 하느님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께서 임재하셨을 때, 동반된 여러 현상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이러한 화염이었다(탈출19,18).

또한 에제키엘이 환시가운데 본 하느님의 임재 및 그분의 옥좌 역시 불꽃으로 휩싸여 있었고,

또 그 옥좌에 여러 개의 바퀴들이 달려 있었다(에제1장).

하느님께서 엘리야 예언자를 하늘로 끌어 올리실 때에도 불 병거와 불 말들을 사용하셨다(2열왕2,11).

 

다니엘이 후에 티그리스 강가에서 본 환시 속의 한 분은 그 분이 횃불처럼 생겼고

그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다니10,6),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역시 그의 눈이 불꽃같고,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같이 생겼다(묵시1,14.15).

 

다니엘서 10장과 요한 묵시록 1장의 주체는 성자 하느님을 묘사한 것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와 성부와 동일한 본체이시며,

동일한 영광과 위엄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철저히 불꽃에 둘러싸인 분으로 묘사하는 본문은

하느님의 위엄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장엄한 것인지, 죄악된 인간이 

가까이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한 영광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면모 앞에 사람은 굴복하지 않을 수 없으며,

두려움과 떨림 외에 어떤 태도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법정이 열리고, 책들이 펴졌다.'  (10)

 

다니엘이 환시 가운데 본 하느님의 옥좌에서는 이글거리는 불이 마치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본문에서 '뿜어 나왔다', '퍼져 나왔다' 에 해당하는 '나게드 웨나페크'(naged wenaphek)

두 단어 모두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이 하느님의 옥좌로부터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 계속해서 진행된다는 지속성을 임시한다.

 

또한 '그분 앞에서' 라는 표현은 불꽃이 하느님의 몸 속이 아니라 하느님이 좌정해 계시는

그 옥좌로부터 나온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 흘러나오는 불의 양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니엘은 마치 강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흘러나오는 심판으로서의 불은 세상 나라들, 특히 작은 뿔이 상징하는 적 그리스도를

심판하는 불이다. 이 불은 적 그리스도를 포함한 모든 악한 세력들에 대한 심판을 끝날 때까지

하느님의 옥좌에서 게속해서 흘러나올 것이다.

 

한편, '백만'과 '억만' 에 해당하는 '엘레프 알르파임'(elep allpaim)'립보 랍베완'(ribo rabbewan)

고대 세계에서 형언할 수 조차 없는 많은 숫자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를 나타내는 데, 이처럼 헤아릴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를 들고 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그 명령을 수행하는 소임을 맡은 존재들이다.

이 문맥에서는 특히 심판과 관련된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문에서 '그분을 시중드는 이' 에 해당하는 단어 '예샴메슌네흐'(yeshameshunneh)

문자적으로 '그들이(백만) 그분을 시중들고 있다' 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지만, 문맥상 수많은 천사들이

하느님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확실하다.

 

또한 본문에서 '모시고 선' 에 해당하는 '예쿠문'(yequmun)은 문자적으로

'그들이(억만) 모시고 서 있다' 라는 의미이다.

천사들은 하느님과 나란히 옥좌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지위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하느님 옥좌 곁에 서 있으면서, 하느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동시에

그 명령을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숫자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사실은, 하느님의 위엄을 드높여 줌과 아울러

하느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크고 광대무변함을 암시한다.

 

한편, 하느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책들이 펼쳐진다.

'책들'에 해당하는 '씨프린'(siprin)은 어원상 '기록하다', '계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싸파르'(sapar)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펼쳐져 놓인 이 책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말들이 다 기록되어 있는 책이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구원받은 백성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이다.

 

모세는 이 생명책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탈출32,32), 사도 요한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말하였다(묵시21,27).

또한 사도 요한은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책으로서

그들의 행위가 기록된 책을 언급한다(묵시20,12).

 

본 문맥에서는 이 두가지의 책 가운데서 행위를 기록한 책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하느님께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심판이 행위를  기록한 책에 근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심판이 절대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매우 공정하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마르 9;5)

저는요?  뭘해드릴까요?

"니가 뭔데~~~ 너는 그분의 말만 들으면 돼~~~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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