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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편견과 오만)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06 조회수1,979 추천수0 반대(0) 신고

 



"편견과 오만"

+찬미예수님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이 쓴

베스트 셀러 편견과 오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편견은 한자 그대로 하면

한쪽으로 몰려있는

생각 견해를 말합니다.

풀이하면 그 내용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 못하게

만드는 것이 편견입니다.

편견에 가득 사로잡혀있는 사람은

타인을 볼 때 순수하게

바라보질 못합니다.

, ‘넌 아냐, 넌 엑스야

그래서 그 결과

어느 누구도 사랑을 못해요.

판단하다가 세상 끝나요.

그런데 문제는 그 판단이

딱 맞으면 좋은데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거예요.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만한 사람 곁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가시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잘난 것도 없는데

언제나 주위에 사람이 많아요.

사람들이 어려운 일 있으면

그 사람에게 가서 영적도움을 청해요.

그런데 오만한 사람은 잘났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곁에 가지 않아요.

그래서 그 결과가 외롭고 고독해요.

그런데 편견이 있는

사람은 대부분 오만하고,

오만한 사람들 대부분

편견을 가지고 살아요.

마치 동전의 앞과 뒷면 같아요.

동전 한 쪽은

서로 다른 쪽을 못 보듯이,

함께 있지만 서로를 못 봐요.

편견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오만한 것을 모르고,

오만한 사람은

자신은 편견이 없다 해요.

이것이 비극이지요.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 나자렛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망신을

당하시고 갑니다.

오죽하면 그들이 믿음이

없는 것을 참 이상하게

여기셨다.’ 라고 하십니다.

단지 몇 사람에게 손을 얹어

치유해주셨을 뿐,

예수님은 그 후 고향을

가지 않으셨어요.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못 받는다.’ 라고 하셨어요.

예수님을 맞이하던 나자렛

사람만큼 편견과 오만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업었던 겁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고향에 왔건만,

편견과 오만이라는 기계로

예수님을 깔아뭉갭니다.

물론 예수님의 생애가

수모의 삶이었습니다.

수많은 예수님의 수모 중

가장 가슴이 아프셨던 곳은

어디 었을까?

아마 당신이 뛰어 놀던 고향,

나자렛에서 받은 수모를 가장

뼈아프게 느끼셨을 거예요.

나자렛 피하고 다른 고장을

가실수도 있었을 텐데,

왜 고향에 와서

매몰찬 수모를 당할까?

왜 편견과 오만에 가득 찬

사람들의 그 화살을 맞고

버티셨어야만 되었을까?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이

고향 나갔다 돌아오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한 사람의 랍비,

스승으로서 찾아오셨던 겁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처음에는 눈을 감고 설교만

들었을 때는 감탄을 합니다.

, 참 설교 잘한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보니!

, 인간 목수 아냐?

죽은 요셉 아들,

우리가 형제도 아는데

여기서 형제는 사촌,

6촌을 의미하지 친형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신교신자들은

이 부분을 가지고 성모님이

동정녀가 아니라 주장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쓴 형제는

희랍어가 다릅니다.

친형제에 쓰는 형제와

사촌 육촌을 지칭하는

형제가 다릅니다.

이렇게 눈을 뜨고 보니,

이제까지 가지고 있던

존경심은 사라집니다.

아니, 감히 우리에게 가르쳐?’

예수님의 가르침은 편견에

사로잡혔던 나자렛 사람에게는

일종의 경멸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는

분개하였다라고 나옵니다.

너 같은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

감히 우리를 가칠 수 있어?’

오늘 복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한

이유가 두 가지 나옵니다.

첫 번째, ‘이 사람 목수가 아닌가?’

목수는 나무로 일하는 사람,

노동자입니다. 일반인입니다.

이런 이유로 목수를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피 직업 1위는

돼지치기, 2위는 목수와 같은

손으로 만드는 기술자입니다.

게다가 요셉은 큰 집을 짓는

목수가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을

고치는 목수였습니다.

여러분들 교황하시다 돌아가시어

성인 요한바오로 2세 아시죠?

그 분이 예전에 고향인

폴란드에서 탄광 노동자를

오래 하셨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식의

유혹을 많이 받아요.

직업으로 사람 판단하고,

직업이 그 사람의 인격이요

인성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을 평가할 때, 직업,

출생 등으로 하고 싶은

유혹을 우리는 많이 받습니다,

선입견의 노예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두 번째 이유는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했어요.

마리의 아들이라 불린

사실로 짐작하건데 요셉은

이미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이

삼십이 되어서야 나자렛을

떠나신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좀 더 일찍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을 텐데,

구원 선포가 늦어진 이유가 없을까?

그 이유는 양아버지

요셉은 돌아가시고,

홀로 된 마리아를

예수님께서는 돌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경멸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힘 있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분위기가 나쁘면 행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인이 병 낫기를 거부한다면

아무리 명의라 해도

고쳐줄 재간은 없습니다.

살려는 의지가 없는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의사는 없습니다.

영적으로 살려하는 그 의지를

우리는 신앙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보시기에 병 들어서

고쳐주고자 하시는데,

그것을 거부하면 어찌되겠는가?

거부하는 의지까지,

예수님은 어떻게 못하십니다.

한탄만하고 떠나십니다.

또 나쁜 분위기에서 예수님의

어떤 설교도 관중들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알려고 하고

분위기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불을 붙일 수 있지만,

시작부터 비판적이고

냉랭한 곳에서는 어떤 힘 있는

설교도 힘없이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미사 오며 오늘 강론 듣고

치유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말씀은

쌍날칼이 되어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만,

오늘 강론 엄청 기네하는

분위기에게는 아무리

예수님이 옆에 나타나시어

설교를 하신들 그것이

은혜로 들어가겠습니까?

나쁜 분위기에서는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나자렛을 내 마음이라고 합시다.

나자렛을 내가 다니는

성당이라고 합시다.

나자렛을 내가 사는

가정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서로 미워하고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그 장소에는 예수님이

서 계실 곳이 없습니다.

나쁜 분위기에서는 예수님은

그 어떤 말도 하실 수 없습니다.

나자렛을 이천년 전

예수님을 몰아낸 못된

동네라고만 생각하지 맙시다.

나자렛을 현재 우리의 마음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 문을 열어 드릴수도 있고,

예수님 면전에서 문을 꽝

닫아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묵시록 320절에

그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나자렛은 내 마음이요,

가정이요, 우리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쫒아내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쫒아내는

가정이 있습니다.

방마다 십자가가 있다 한들,

예수님은 그곳에서 아무 말도

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이미 내보낸

내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이천년 전에 고향을 찾아온

예수님을 편견과 오만을 가지고

밀어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듣지 맙시다

예언자들은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신부님들에게

불문율이 하나 나옵니다.

신부님들은 자기 출신지가서

본당신부 못합니다.

교회법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2천년 전통입니다.

저희 집은 몇 대째 내려오는

구교집은 아닙니다.

지금은 친척 90프로 이상이

신자가 되어 행사에 가면

어르신들도 제게 신부님이라 합니다.

그런데 십여 년 전까지는

집안모임에 가기가 싫었어요.

집안이 골수 유교집안이라

어르신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면 이러십니다.

자네, 이제 신부한지 꽤 되었지?

이제 할 만큼 했으니 나와.

좋은 규수 준비해놨어

오늘 꼭 머리에 담고 가세요.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 못하게 하는 것이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 못하게 한 것이다.

편견을 갖은 사람은 판단만하다

사랑을 못하고, 오만한 사람은

늘 외롭고 고독합니다.

똑똑한 것과 오만은 다릅니다.

오만은 교만이고, 교만은

자기 우상숭배라고 했죠?

자기가 만든 우상 밑에서

한 평생을 살아야 해요.

얼마나 비참합니까?

편견이 많다고 느끼시면

오만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깨세요.

편견과 오만으로부터

예수님은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나자렛은 이천년 전

예수님을 몰아낸 장소가 아니라

현재의 상태입니다.

따뜻하고 온유한 모습을 가진

내 자신, 내 가정, 내 교회로

변화되길 노력합시다.

2018년 연중 제14주일 (7/8)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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