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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제1독서(하바1,12~2,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11 조회수1,358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8주간 토요일 제1독서(하바1,12~2,4)

 

 하바쿡 예언자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2,3.4ㄷ)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3)

 

앞선 2장 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답변으로 주시는 것을 판에 기록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제 본문에서는 판에 기록된 내용 '환시'(hazon)라 표현하며, 이 환시는 당장 이루어질 것이 아닌 정해진 때,이루어질 시기가 따로 정해져 있음 밝힌다.

 

여기서 '정해진 때'에 해당하는 '모에드'(moed)는 시간과 장소에 모두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본문에서는 시간과 관련해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특히 선민 이스라엘이 매년 정기적으로 지키는 '절기'(레위23,2) 내지는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계절'(창세1,14)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환시'가 이루어질 때는 '정해진 때'(모에드)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은 겨울이 가면 봄이 반드시 돌아오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하바쿡 예언자에게 판에 기록하라고 말씀하신 종말론적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본문 후반부에서는 이 '정해진 때'를 다시 '끝'(종말)이라고 표현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케츠'(qets)하느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사람의 죽음(창세6,13)이나 악한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을 날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에제7,3).

 

본문은 후자의 의미가 더 강한 것으로서 심판으로 인한 형벌 자체보다는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은 여기서 심판의 날이 '~을 향해 치닫는'이라고 강조한다. 이에 해당하는 '웨야페아흐'(weyapeah)의 원형 '푸아흐'(puah)기본적으로 '숨을 급하게 내쉬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종말의 때가 아직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 때가 임박하였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종말이 마치 누군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종착지를 향하여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는 것처럼 긴박하게 닥쳐오고 있음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본문이 말하는 종말의 때가 구체적으로 역사의 어느 시점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첫째, 바빌론 군대의 침공으로 말미암은 남부 유다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선민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된 바빌론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선민 뿐만 아니라 바빌론도 선민에 대해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했고,  하느님께 대한 교만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했던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으로 인해 모든 나라들이 무너지고, 하느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남부 유다 위정자들의 백성들에 대한, 또는 백성들 상호간에 행해지는 불의와 폭력에 대한 하바쿡 예언자의 고발을 기록하는 1장 2~4절의 내용을 고려하면, 이것은 남부 유다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 바빌론 여러 나라들에 대한 불의와 폭력, 잔인함, 교만을 고발하는 하바쿡서 1장 12~17절의 내용을 고려하면, 바빌론의 종말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종말은 남부 유다나 바빌론 어느 한 나라에 대한 종말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 이 모든 것을 포괄함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로운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종말론적 심판의 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때를 다윗 임금이 통치할 때의 영광을 재현하는 정치적인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지만, 신구약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문맥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며, 그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 그리고 그의 재림과 심판을 통해 도래할 세상의 종말로 귀결되는 것이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

 

본문은 종말이 반드시 올 것이며, 그 때가 더디지만 지체되지는 않을 것임을 내용으로 한다.

 

여기서 '늦어지는 듯하더라도'(더디다)하는 것은 '어떤 움직임이나 일에 걸리는 시간이 오래다'는 의미이고, '지체하다'라는 단어는 '때를 늦추거나 질질 끈다'는 의미이다.

 

즉 본문은 종말의 때가 느끼는 사람에 따라 금방 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말의 날 자체가 연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종말의 때에 대한 인간의 판단은 더딘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확정하신 것으로 결코 바뀌거나 연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주어가 새 성경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원문으로 보면 '늦어지는 듯하더라도'에 해당하는 '이트마하마흐'(ythmahamah)'지체하지'에 해당하는 '예아헤르'(yeaher)남성 3인칭 단수 주격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거의 모든 영역본들은 '그것'(it)이라는 주어를 번역에 포함시킨다.

 

그런데 본절의 내용을 인용하는 신약 성경에서는 이 주체를 인격으로 보아서 본절이 단지 종말이 임할 것이라는 내용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재림하실 것을 예표하는 내용으로 본다.

 

먼저 히브리서 10장 37절"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는 내용은 본문을 인용하면서도 종말의 때보다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드러낸다.

 

이것을 감안하면, 본문은 일차적으로는 범죄한 선민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선민 이스라엘을 멸하고 압제한 바빌론과 같은 나라를 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장차 메시아 즉 구원자이시요 심판자로 오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택한 백성들이 온전히 구원에 이르고, 하느님을 부인하는 세상의 모든 권세들이 멸망하며,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궁극적인 측면의 종말의 날이 도래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4)

 

본절 상반절에 기록된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악인은 교만하고, 하느님 대전에 합당하지 않은 자 언급되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구원의 대상이 되는 의인의 면모를 묘사한다.

여기서 제시되는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그런데 본문의 '성실함'(믿음)에 해당하는 '에무나'(emunah)거짓이 없고, 진실하시고, 불의가 없으시며, 의로우시고 올곧으신(의인들의 참된 의지가 되시는) 하느님의 신실성을 묘사하는 표현이기도 하다(신명32,4).

 

그리고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일차적으로 진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강한 신뢰를 의미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하느님을 향한 사람의 태도와 면모를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들에게 신실하며 진실한 태도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잠언12,22).

 

사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도 신실하며 진실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성실함'(믿음)이라는 표현은 하느님께 대한 강한 신뢰를 의미할 뿐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며, 타인들에게도 결코 속임이나 거짓을 행치 않는 진실한 면모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의인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신실함과 진실한 태도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선언은 당시 신흥 제국인 바빌론이 고대 근동의 강자로 떠오르면서 남부 유다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을 무너뜨리는 상황 속에서 많은 이들이 극한 고통을 겪으며 절망 속에서 살아갈 것이지만, 오직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때를 기다리며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믿음을 근거한 신실한 삶, 진실한 삶을 살 것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이같은 메세지는 당시 남부 유다 백성들이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면서 동시에 이웃의 것을 약탈하는 이중적 삶을 살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변화된 삶을 살 것을 촉구하는 의미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본문은 선민 이스라엘을 향해 바빌론의 불의와 폭력, 약탈 속에서도 하느님의 참된 백성으로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의롭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 제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간질병에 걸려 몹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주 불 속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또 자주 물속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제자들에게 데려가 보았지만 그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마태17,15-16)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마태17,20)

 

그런다고 산을 옮기려 행위는 믿음이 아니다.

참된 믿음엔 산을 옮길 필요가 없다

그 걸 아는게 주님의 말씀의 진의가 아닐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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