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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제1독서(에제2,8~3,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14 조회수1,373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제1독서(에제2,8~3,4)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3,3)

 

에제키엘 3장 3절인 본문은 주님께서 먹여 주시는 그 두루마리를 에제키엘 예언자의

몸으로 완전히 흡수하여 몸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일부분으로 만들어 버리라는 명령이다.

 

에제키엘이 말씀에 완전히 동화될 때에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 주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의 배와 창자속에 들어가 채워진 말씀이 그의 살이 되고 피가 되어

그 자신을 말씀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본문에서 '배''속'(창자)에 해당하는 '뻬텐'(beten)'메에'(meeh)

각각 위(stomach)와 내장(bowel)을 의미하는 단어들로서

인간의 신체 내부를 대표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소화기관이나 내장 조직 정도의 의미가 아니라

히브리인들에게 감정과 인격의 자리로 인식되는 곳이다.

 

따라서 이것을 주님의 말씀으로 채우라는 것은 그의 감정과 인격,

내면을 모두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우며 그 말씀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를 함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채워라'에 해당하는 '테말레'(themalle)는 원어의 뉘앙스를 고려할 때

차고 넘치도록 가득 채우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에제키엘 예언자 자신의 영혼을 말씀으로 충만히 채우라는,

그가 말씀으로 충만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상징한다.

 

예언자는 말씀에 충만하여지고, 그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혀

그의 생각이 말씀과 같고, 말씀이 곧 그의 생각이 되어

그가 전하는 것마다 모두 말씀이 되는 차원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의 두루마리로 에제키엘의 내면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에는

자신의 생각이나 타인의 사상, 세상의 이론들을 추가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 충족하게 채워졌다는것은 동시에

그가 충분히 그 말씀을 대변할 준비가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실로 말씀이 에제키엘 안에 깊이 인격화됨으로써 예레미야처럼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하여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20,9)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참되고 의로운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로막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사도4,20)하고

담대하게 선언한 것처럼, 예레미야 자신도 자신에게 임하였을 뿐 아니라, 그 내면에

차고 넘치도록 충분하게 채워져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본문에서 '꿀처럼'에 해당하는 '키드바쉬'(kidbash)의 원형 '떼바쉬'

(debash)벌이 만드는 꿀(honey)을 의미한다(탈출3,8; 1사무14,25).

 

꿀은 강한 단 맛과 높은 영양분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였다.

구약 성경에서 주님의 율법 및 말씀은 흔히 꿀보다 더 달콤한 것으로

묘사된다(시편19,11; 119,103).

 

"금보다, 순금보다 더욱 보배로우며 꿀보다 생청보다 더욱 달다네."(시편19,11)

 

"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도 답니다." (시편119,103)

 

한편 본문은 사도 요한이 받아 삼킨 두루마리가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다는 사실(묵시10,9~10)과 비교할 때,

뱃속에서는 쓰렸다는 내용이 없는 문장이다.

 

삼킨 말씀이 뱃속에서 쓰렸다는 것은 그 메시지의 내용이 혹독한 심판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또는 그 말씀을 인격화하는 작업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반(反)하기에 그만큼 처절한 자기 인내와 수련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인데,

에제키엘이 받은 메시지의 경우도 동일하다(에제2,10).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속에서의 상태는 기록되지 않고

단지 입 속에서의 상태만 기록된 것은, 반역적이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전해지는 그 메시지의 내용이 옳고 정당하다는 사실과,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로

선택받은 것을 아는데서 오는 기쁨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18,3)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루가23,42.43)

 

회개기 유턴이란다. 유턴~~~~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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