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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제12,1-12)?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16 조회수1,287 추천수0 반대(0) 신고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제1독서 (에제12,1-12)

 

 

 

치드키야의 아들들이 아버지 앞에서 죽음(2열왕25,7)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 갈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11~12)

 

'그들은 유배를 당해 끌려 갈 것입니다.'(11)

 

여기서 3인칭 복수형으로 묘사되는 '그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

 

어원상 '유배를 당해'(포로로)로 번역된 '밧셰비'(bashebi)

'벌거벗은 상태로'라는 의미이고,

'끌려'(사로잡혀)로 번역된 '빡골라'(baggolla)

'포로의 상태로'라는 의미다. 

 

그런데 이 둘 중 한 단어만을 가지고도 포로로 끌려간다는 개념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제키엘이 본문에서 두 단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은

B.C.586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파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상황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보다 생생하게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옷이 다 벗겨진 채로 손과 발이 결박을 당해 약속의 땅 밖으로

이방인에 의해 끌려가는 그들의 모습주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

끝까지 범죄할 경우, 어떤 결과를 당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 있는 수장은 어두울 때에 짐을 어깨에 메고,

 사람들이 그를 내보내려고 벽에 뚫어 놓은 구멍으로 나갈 것이다.

 그는 자기 눈으로 그 땅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릴 것이다.'(12)

 

본절에서는 치드키야 임금이 도주하는 광경을 매우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그가 처한 절박한 상황과 비참함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임금은 '짐을 어깨에 메고' 피난길에 오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팔을 늘어뜨려 운반하지 못하고, 어깨에 지고 운반한다는 것

그 짐이 매우 무거움을 암시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 피난가는 것도 치욕스럽지만, 너무나 다급하고 절박한

상황에 쫓겨 무거운 짐까지 져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이것은 짐을 질만한 신하가 없거나 혹은 적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사람으로 도망가야 하기 때문에 비롯되었을 것이다.

 

평생 힘든 노동을 해보지 않았던 그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피난을 가야 했던 것은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주는 '어두울 때에' 이루어졌다.

원문에 '빠알라타'(baallatah)인데, 이것은 어스름한 상태가 아닌

'짙은 어두움'을 의미한다.

 

이동하기에 매우 불편한 시간에 체면을 버리고 도주하였음을 나타내고,

너무나 다급한 나머지 적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깊은 밤에 비겁함과 나약함으로 도주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은 남부 유다 임금이 사람들이 다니는

'성문'이 아니라 '성벽'을 통하여 나갔음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는 치드키야 휘하의 가신과 군사들일 수도 있으며,

혹은 바빌론 군사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본문에서 언급하는 벽은 가신들이 치드키야를 도망시키기 위해

일부를 파쇄한 성벽일 수도 있고, 혹은 바빌론 군사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기 위해 일부가 훼손된 성벽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일개의 임금이 사람들이 다니는 성문이 아니라 동물과 같이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도망간다는 사실 드러나고 있다.

 

특별히 본문에서 구멍을 뚫음을 나타내는 동사 '야흐테루'(yahtheru)의 원형

'하타르'(hatar)도둑질을 하기 위해 구멍을 뚫는 것(욥기24,16)과

죽음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요나3,2)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이런 용례는 치드키야의 비참함을 묵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치드키야 임금이 취하게 될 이러한 행위 역시 에제키엘이 취하였던

상징적 행위와 동일하다(에제12,7).

 

여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크나큰 슬픔과 비통한 마음 때문에

치드키야가 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이제는 두 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예루살렘 땅을 애써 외면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치드키야는 예루살렘에서 도망쳤으나 바빌론 군대에 의해 붙잡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서 두 눈이 뽑힌 후, 바빌론으로 끌려가

감옥에 갇힌 후,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었다(2열왕25,1~7; 예레52,11).

 

그런 점에서 본다면, 치드키야가 도망치면서 땅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두 눈이 뽑힐 것에 대한 예표라기 보다는, 그후로는 두 번 다시 자기가

통치했던 그 땅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될 것에 대한 예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에제12,13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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