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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의 희망 한 스픈(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20 조회수1,540 추천수4 반대(0) 신고

 



"베르나르도야, 너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Ad quid venisti?)

제 개인적으로,

최근 요 며칠 사이에,

별의 별 기가 막힌 일들로

힘겨워하는 이웃들을 만났는데,

그들 앞에서 뭐라 딱히

위로의 말을 찾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언제나 항상 옆 자리를

지켜줄 것만 같았던 사랑하는

배우자와의 갑작스런 사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쪽 같은 자식과의

0.1퍼센트도 준비되지 않은 이별,

그리도 건강하던 사람이었는데,

난데 없이 다가온 감당하기

힘든 치명적인 병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다들 망연자실,

할 말을 잃습니다.

자연스레 원망의 화살이

주님께로 향합니다.

이거 정말 너무 한 것 아닙니까?

도대체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곰곰히 생각해보고,

또 생각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주님께로만

돌려서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나 결핍 투성이의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이기에,

언제나 흔들리는 불안정된

이 한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그 누구나 자연스레 겪게 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들렀다가는

여인숙이요, 우리네 인생은

잠시 동안의 여행길이며,

이 땅은 영원히 머무를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년도 하루 같은 영원하신

주님 앞에, 30,

40찰라와도 같은

시간 차가 있을 뿐이지,

이 세상 살아가는 그 누구든

예외없이, 언젠가 떠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앞차로 가는가, 뒷차로 가는가,

결국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큰 총애를 받았던

위대한 대 예언자 에제키엘도

그런 거대한 주님의 시간과

계획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언제나 주님께 충실했던 에제키엘

예언자께서 그날도 그분께서

건네시는 예언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메시지,

슬프고 혹독한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 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

(에제키엘서 2416~17)

오늘따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분위기가 으스스합니다.

예언의 말씀을 들어보니

상가집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가족과 친척들은 곡을 합니다.

머리에 쓰개와 신발을 벗으며

대신 콧수염을 가립니다.

또한 상가는 부정한 장소로 여겨져,

그곳에서 음식을 장만하지 못했기에,

상주들은 친척들이나 이웃들이

장만해온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언의 말씀은

모두 그 정 반대입니다.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고 당부합니다.

조용히 탄식하지

곡도 하지 말것이며,

머리에 쓰개를 쓰고

신을 신으라고 합니다.

콧수염을 가리지도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도

먹지 마라고 강조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멸망이

임박했으며, 그로 인한

대재앙은 상상을 초월할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제키엘 예언자 입장에서

더욱 기가 막힌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내리신

그 혹독하고 쓰라린

예언의 말씀을 아침 나절에

백성들에게 선포하였는데,

그날 저녁에 아내가

세상을 뜬 것입니다.

아무리 대예언자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이지 참혹한 예언자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고통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아내와 사별한 그의 깊은

슬픔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한

느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집니다.

이렇게 주님 예언의 말씀은

글이나 말로써만이 아니라

에제키엘 예언자의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백성들에게 전해집니다.

오늘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깊은 슬픔, 견딜 수 없는 좌절,

원치 않은 바닥 체험,

역시 길게 크게 바라봐야겠습니다.

짧은 우리들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겠지만, 크신 주님의

시선과 전망으로 바라볼 때,

그 역시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는

그 엄중한 트라피스트회의

모든 규칙을 준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 아니라,

개인적 고행의 실천에도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의

책상 앞에 베르나르도야,

무엇하러 여기 왔느냐?”

(Ad quid venisti?)

라는 질문을 붙여두고 스스로를

자극하고 격려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의 희망 한 스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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