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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간들의 복음과 하느님의 복음 (로마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25 조회수1,765 추천수1 반대(0) 신고

 

 

 

인간들의 복음과 하느님의 복음

(로마1:1)

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나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특별한 사명을 띤 사람입니다.

 

복음이면 복음이지 하느님의 복음은 뭡니까? 하느님의 복음 말고 다른 복음도 있다는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사도가 굳이 복음을 거론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이라고, 수식어가 붙은 어구를 사용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다른 복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후11:4)4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전한 것과는 다른 예수를 전하고 여러분이 받은 성령과는 다른 것을 주며 또 전에 받아들인 것과는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데도 여러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까 하는 말입니다.

이게 교회에게 쓴 편지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었던 초대교회 때에도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로 가면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다른 복음이 어떤 복음인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갈라1:6-10) 6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을 외면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라 가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사실 다른 복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뒤흔들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려 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8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9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겠습니다. 누구든지 여러분이 이미 받은 복음과 다른 것을 전하는 자기 있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10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 입니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존재하고 완료가 된다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반대로, 인간의 를 챙겨 인간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복음이 가짜 복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졌을 때 그 복음을 듣고 사람의 위상이 올라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기뻐지면 그건 다 가짜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성도의 육을 공격하여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복음에 부딪히면 일단 아파야 합니다.

 

지금부터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하느님의 복음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먼저 세상에 편만하게 퍼져 있는 다른 복음과 하느님의 복음의 차이를 여러분이 이해하시기 쉽게, 제가 범신론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도대체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판단해 보세요.

불교의 핵심은 마하 반야 바라밀다 입니다.마하라는 것은 절대적 존재를 말하고, ‘반야라는 것은 지혜를 말하고, ‘바라밀다극락의 세계로 건너감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을 실행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불교는 수도 정진을 통해 지혜, 즉 깨달음을 얻어, ‘마하’, 절대적 존재로 합일을 함으로 해서 바라밀다’, 극락으로 넘어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절대적 존재가 지혜를 얻어 극락으로 넘어가는 것이 불교 교리의 핵심입니다. 거기에서의 전제는 모든 존재의 절대성입니다. 모든 존재는 우주의 유일한 선인 브라만의 투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한 불교의 지혜, 반야를 요약한 경전이 반야경입니다. 이 반야경의 첫머리에 관자재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보살입니다. 이란 본다는 말이고, ‘자재스스로 있는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 뒤에 보살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어 설명하면, ‘보살은 스스로 있는 신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불교의 인간관이 잘 나타나 있지요? 스스로 있는 신인 보살이 깊은 반야 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수인 것입니다. 보살은 그러한 반야 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나고, 극락을 경험하며, 마침내 극락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신적 세계가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 안에서구현될 수 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들어가게 되는 것이 극락의 세계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신 인간의 노력과 열심과 고행과 수행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범신론입니다.

부처는 이 보살의 원형이며 부처를 뒤따르는 제자들이나 중생들도 깨달음을 통해 다 부처처럼 보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탈이라고도 하고, 열반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의 목적은 인간의 열심과 노력과 수행을 통하여 우주의 실체인 브라만과 합일이 되는 것, 즉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신이 깨달음을 얻어 신으로 귀소 하는 형국입니다.

 

그러한 부처들은 깨달음을 추구하되 자신의 해탈이나 유익만을 구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을 이롭게 하는 이른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가 부처이고 그가 보살입니다. 보살은 만인을 하나같이 여기며 사랑하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가지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불교에서는 누구든지 마음을 일으켜 작심을 하면 곧 보살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순수한 마음을 먹고 곧바로 수행 정진에 힘쓸 때 누구든지 보살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삶을 살되, 이타적 삶을 산다고 주장하거나 자랑하지 않을 때 진정한 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이지요.

 

석가는 최초로 반야를 깨달은 부처가 되어, 바로 이러한 보살들의 맏아들 역할을 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석가모니를 신앙하고 신봉하는 종교가 아니라 보살들의 맏아들인 석가모니처럼 반야를 깨달아 둘째 석가, 셋째 석가, 이렇게 자신들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무속신앙에 먹혀 버려서 불교도 이 세상에서 복을 받기 위해 연등을 달고, 삼천 배를 하고, 절 건축 할 때 기와를 사서 올리고 하는 무당 잡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차치하고, 그렇게 범신론 속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신이고,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삶이 어떤 절대자로부터 선택이 되고, 예정이 되고, 작정이 되고, 그 삶 속에 절대자의 섭리와 경륜이 개입하게 된다는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그들의 교리 앞에서 흰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보살이 바라밀다를 가능케 하는 수행, 즉 마하로 합일이 되어, 극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지상에서의 수행에는 6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보시(布施). 두번째 지계(持戒). 세번째 인욕(忍辱). 네번째 정진(精進). 다섯 번째 선정(禪定). 여섯번째 지혜(知慧).

 

어떠세요? 과연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복음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선배 격이 되는 불교의 범주 밖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들어보시기에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차이가 뭡니까? 천국, 극락 이름만 다르지, 그곳에 가기 위해 열심히 수행 정진하고, 선행을 쌓고, 기도를 열심히 하여, ‘라는 존재가 훌륭한 존재로 변화하여, 순전히 의 힘으로, ‘의 욕심인 천국에 가서 많은 상을 받고 남과 차별된 의 삶을 사는 것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공통된 목적 아닌가요? 바오로가 그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라는 존재에서 출발하여 라는 존재의 유익으로 끝나는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에게서 출발하여 하느님에게로 귀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아라는 존재에서 출발하는 신앙생활은 항상 자아라는 존재의 유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 여기 있고에서 출발하여 하느님 거기 있지요?’를 확인하려는 신앙은 엄밀히 말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단어는 믿고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 신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차압해 버리는 단어인 것입니다. 나는 없어지고 내가 바라 볼 대상만 오롯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은 자아의 확장과 자아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여 살게 되기 때문에 그 신앙의 대상으로 자아를 상정해 올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우상의 형성은 반드시 그 자신의 행위를 재료로 합니다. 인간은 사이의 간극을 자신들의 행위로 메우려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심은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신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교리처럼, 내가 신과 합일 되어, 나 자신이 신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라는 자리와 내가 되고 싶은 과의 갭을 행위로 메우려고 하는 메타형식을 제가 우상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성당에 와서 미사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헌금을 하고, 선행을 하고, 봉사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뭡니까? ‘나의 천국을 확보하기 위함 아닙니까? 아님, ‘라는 존재의 변화를 보고 싶어서 아닌가요? 좀 더 훌륭해 진 나, 좀 더 착해진 나, 좀 더 선해진 나를 보고 싶어서 아닙니까? 그리고 그렇게 훌륭하게 변한 가 다른 사람들이 못가는 천국에 가는 것, 그게 그리스도교의 궁극적 목적이 아니던가요? 그러면 지금 여러분이 바라보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신앙의 대상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걸 우상 숭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그 자기를 계발하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고, 멋지게 변화시켜 그 자기를 자기 소유로 삼고 싶어 하는 그 모든 추구가 절대자아를 추구하는 타락한 악마의 사고인 것입니다.

 

인간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을 섬긴다는 행위를 내어 놓고 그 신을 내 것으로 취하고 싶어 할 뿐입니다. 그걸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절대 자아와 종교의 형성 과정입니다. 그렇게 절대 자아의 추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 아무리 하느님을 아버지로, 야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른다 할지라도 결국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내 것으로 취하여, 내가 그 신의 자리로 가기 위한 교활한 연극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절대 자아를 추구하는 인간은 내 것을 내어 놓으면 반드시 그 힘을 돌려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절대 자아 안에서 빠져 나간 힘이 다시 어떤 모양으로든 자아 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 절대 자아가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러한 대자적 존재로서의 옛 사람을 깨부수고, 하느님께 완전히 의존해야 하는 대타적 존재로 만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걸 복음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복음은 진짜 하느님의 가짜 하느님들에 대한 전쟁 선포인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다가 복음입니다. 어떻게 그게 기쁜 소식인가? 그렇게 죽지 않으면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데 우리 스스로는 절대 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죽어주신다고 내려오셨으니 그게 어찌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행위를 보태어서 다른 이들과 하느님에게까지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그런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를 박살내 버리시고 예수의 피 공로만 의지하게 만들어주러 하느님이 내려오셨다는게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그러한 하느님의 열심과 수고로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예수의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복음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고 골수와 관절과 영혼까지 쪼개는 힘이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복음이 전해지면 교회 안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조작해 놓은 가짜 그리스도교가 진짜 그리스도교를 이단으로 몰아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되어버린 가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의 주류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교인들로부터 이단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어쩌면 진짜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구원파나 신천지나 다락방 같은 그런 류의 이단소리를 들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어떻게 성도를 자유케 하시는지 제가 예를 들어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마태5:17-20)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20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내용을 잘 보시면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첫 번째 부류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입니다. 20절에 의하면 그들은 천국에 못가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천국에는 가지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사람들과 천국에서도 큰 자라 일컬음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마치 천국에서도 차등과 서열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리고 그 차등의 근거는 율법지킴인 것 같잖아요? 신약 안에 구약이 들어와 있는 모습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한 번 잘 보세요.

주님은 지금 율법과 예언자, 즉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일점일획도 버려지면 안 된다고 강조에 강조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면 작은 자가 되고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잘 행하면 큰 자라 하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당시에 가장 율법을 잘 지키며 살았던 바리새인들과 율사들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로 분류해 버리시고 그들보다 낫지 않은 자들도 절대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야고보서로 가면 다 지키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되는게 하느님 나라의 율법관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 큰 자는커녕 작은 자로라도 여겨질 수 있는 자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 하러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어차피 자기 힘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 왜 번거롭게 이런 하라의 명령들을 반복하여 하셨을까요? 지금 주님께서 율법에 대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몸과 법의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떠나 신이 되어 버린, 인간이라는 몸은 항상 법을 대할 때 대상으로 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 즉 법을 떠나 버렸기 때문에 이제 몸과 법이 분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하느님의 법이라는 것은 인 내가 지켜야 할 대상입니다. 그렇게 몸과 법이 분리된 인간에게 있어서 법은 항상 왜곡되고 조작이 됩니다.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율법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반드시 성취되고, 그 자체로 선하고, 천국과 지옥을 구별하는 기준 역할을 하는 진리, 그 자체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말씀과 비교해서 타락한 인간은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고, 약하고 ,악하디 악합니다. 따라서 그 지고지순한, 살아있는 하나님의 법을 그렇게 악하디 악한,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 지켜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법의 파괴이며, 법에 대한 모독이며, 조작인 것입니다. 즉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악한 인간이 선한 법을 지킬 수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법을 지킨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얻어먹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연약함을 폭로하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로마3:19~20)19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은 말문이 막히게 되고 온 세상은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그렇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율법을 끌어 올 수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왜곡된 법이 인간의 몸에 투사가 되면, 죄라는 녀석이 그 인간의 몸 안에서 꿈틀거리며 그 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게 행위라는 것입니다.

지금 법을 해석하고 있는 주체자의 몸으로 직접 법의 요구, 즉 하라는 것을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는, 그런 요구에 부응하면 하느님의 거룩 앞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맞설 수 있는 멋들어진 자기 의로 무장을 할 수 있다는, 노림수를 부추겨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법을 지키려 노력을 한 존재는, 하느님이 주신 법을 지켜낸 대단한 존재가 되어 하느님의 거룩 앞에서도 자신의 생존을 주장할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도 하느님입니다를 주장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렇게 내 몸, 내 자아가 내 삶의 목적이 되고, 우상이 되면, 다른 말로 라는 존재가 살아 있으면 하느님의 법은 객체,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악한 주체가 선한 객체를 해석하고 소유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것이 죄라는 것에 있습니다. 악한 것이 선한 것을 해석하고 소유하여 선한 것을 아래로 밀어내려 하는 시도가 교만이며 죄이니까요.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해결책은 하나, 몸과 법이 하나가 되면 됩니다. 법이 몸과 분리 되어 몸에 의해 대상이 되고 객체가 되는 한 인간은 절대 그 지고지순한 법을 성취해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새 언약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뭡니까? 이제 더 이상 갱신될 수 없는 완전한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새 언약의 내용이 너무 쇼킹합니다.

(에레31:31~34) 31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32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 들어라. 33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34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새 언약이 뭡니까? 몸 안에 법이 새겨지는 것이 새 언약입니다. 하느님의 율법이 몸과 분리 되어 있지 않고 몸과 법이 하나가 되는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몸과 법이 분리가 되어 있을 때에는 몸이라는 주체가 법이라는 객체를 해석하고 지켜야 선이 됩니다만 몸과 법이 하나가 되어 버리면 몸이 법에 대해 주체의 노릇을 할 수가 없지요? 몸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몸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몸이 법을 지키던 지키지 않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법이 이미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한 마디로 새 언약 하에 있는 자들이 법 지킴은 의무사항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 몸과 법의 일체를 선물 받은 자들의 모든 행위는 하느님 앞에서 합력하여 선이 된단 말입니다. 이게 어떻게 성취가 되는지 보세요.

(요한1:1,14)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하느님의 말씀, 즉 법이 육신, 몸이 되어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은 그 모양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전부 선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과 몸이 하나인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독사의 새끼라는 욕을 해도 선인 것이고, 성전에 들어가서 남의 장사를 다 때려 엎어도 선이 되는 것입니다. 창녀와 포도주를 마셔도 선이 되고, 안식일을 비롯한 각종 율법을 어겨도 선이 되고, 간음한 여자의 편을 들어 돌을 든 사람들을 다 쫓아 버려도 선인 것입니다. 그게 몸과 법이, 말씀과 육신이 하나가 되신 분의 삶입니다.

아무튼 그러한 새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옛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 뭡니까? ‘하느님의 율법을 지켜라, 안 지키면 죽는다.’입니다. 그런데 그 옛 언약의 대상자였던 이스라엘이 그 옛 언약 앞에서 완전히 실패자로 드러나 버리지요? 옛 언약이 이스라엘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에 의해 파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자리에 새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 언약은 법과 몸의 분리 상태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너희 인간들은 옛 언약에 의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으므로 내가 새 언약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한시적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옛 언약은 새 언약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사전 광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언약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자들은 법과 몸이 하나가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법을 지킨 자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몸과 법의 일체로 오신 예수 안에서, 몸과 법이 일체가 된 자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어 놓는 모든 행위가 뭐가 되는 것입니까?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의 재료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남자와만 약속하시고 남자의 행위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 주십니다. 여자가 해 놓은 실수를 남자가 떠안으면 여자가 용서가 되는 그런 방식으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자로 존재할 수 있는 남자는 예수님 한 분 뿐이라고 했지요? 따라서 우리 모든 여자들은 누구의 행위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입니까? 이 세상 유일한 남자이신, 몸과 법, 말씀과 육신의 일체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안에서 구원들 받는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하고, 그게 바로 복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갈라3:26~27)26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27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우리의 옷, 우리 행위의 옷, 우리 의의 옷을 입고 하느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모든 법을 다 지킨 자가 되어, 27절의 말씀대로 표현을 하면,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새 언약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옷을 입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옷에 내가 다른 것을 첨가해버리면 그 옷은 못 쓰는 옷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새 언약 설명의 단초로 삼았던 마태복음 5장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천국에서의 큰 자작은 자어떠한 행위를 하면 큰 자가 되고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으면 작은 자가 된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큰 자와 작은 자의 구분은 인간의 행위로 구분 지어 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구분하시는 것이니 너희는 법을 지켜서 큰 자가 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종교를 깨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오히려 인간의 행위로는 큰 자와 작은 자가 갈리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든 성도가 다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데 어떻게 큰 자와 작은 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완벽하게 첫 창조를 마치시고 참 보기 좋다고 하셨지요? 그게 입니다. 그런데 그 창조에 인간이 손을 보태겠다고 나선 것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그때 의 상태가 ‘no good’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걸 타락이라고 합니다. 신랑이신 하느님 앞에서 그 신랑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여자로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남자 흉내를 내고 용사 흉내를 내는 것이 바로 죄이며, 악이며, 타락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라는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의 형상하느님의 보좌에서 나온 하느님의 뜻을 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었지요? 남자에게서 여자가 나와 둘이 연합이 되어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형상이 뜻하는 이었습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 절대 의존자로 살아야 하는, 여자로서의 인간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그분의 열심과 노력으로 창조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이 분리가 되면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창세2:18) 18야훼 하느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 하시고,

여 기에서 좋지 않으니토브 로, 선이 아니니’ ‘No good’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남자인 하느님과 여자인 인간이 따로 떨어져 분리가 되어, 여자는 여자의 삶을 추구하고 남자는 남자의 삶을 사는 상태가 바로 NG인 것입니다. 말씀과 법이 분리가 되어 인간이 그 말씀을 대상화 하여 지키려 하는 그 상태가 NG가 난 상태란 말입니다. 인간은 예수 안에서 비로소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만 하느님의 아들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이 선물로, 은혜로 거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에페2:8~9) 8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어서 된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9 이렇게 구원은 사람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자랑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야곱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 아버지의 축복을 받습니까? 무엇을 잘해서 축복을 받나요? 아니지요? 아버지가 좋아하는 맏아들의 옷을 입고 축복을 받습니다.

 

(창세27:4) 4 내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정성을 쏟아 너에게 복을 빌어 주리라.'

분명 축복 권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축복의 대가로 그 별미를 요구하십니다. 에서는 자신 있게 아버지의 별미를 만들러 나갑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낼 실력이 없습니다. 그때 야곱과 에사오의 어머니 리브가가 개입을 합니다. 리브가는 하느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언약입니까?

(로마9:10~13) 10 뿐만 아니라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사악과의 사이에서 한번에 두 아들을 잉태했을 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11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선행을 보시고 불러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대로 불러 주시며 선택의 원리에 의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13 그것은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오는 미워하였다.' 라고 기록된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 야곱과 에사오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잉태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의 택하심이 인간의 행함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리브가는 하느님으로부터 이사악 집안의 존재 양태에 대해 확인을 받은 것입니다. 이사악이라는 가장이 원래 없음에서 있음이 된, 약속의 자손 아닙니까?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라인은 그렇게 없음의 자리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로 있음이 되어야 하는, 은혜의 족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악이 자기 마음대로 누가 봐도 든든하고 멋진 큰 아들에게 유업을 넘기려 합니다. 강한 자에게 유업이 전해지는 인간 존재중심의 인본주의가 꿈틀 거리며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던 리브가가 이 집안은 하느님의 언약에 의해 지속되고 끌려가야 하는 집안이지 인간의 강함과 열심과 노력을 중심으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유명한 야아코브, 사취하는 자, 강도를 맏아들의 자리로 밀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별미를 만들 능력이 없는 연약한 야곱 대신에 어머니가 별미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연약한 야곱에게 에사오의 껍질을 씌워 버리는 것입니다.

(창세27:15~17). 15 리브가는 집에 보관해 두었던 큰아들 에사오의 옷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꺼내어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 염소 새끼 가죽을 매끈한 손과 목에 감아 준 다음, 17 장만해 놓은 별미와 구운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때 야곱이 한 것이라고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별미를 들고, 어머니가 입혀준 옷을 입고, 형 에사오로 위장하여 아버지 앞에 선 것뿐입니다. 자기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 이사악이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창세27:21~22) 21 이 말을 듣고 이사악은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오인지 만져 보아야겠다.' 하면서 가까이 오라고 하였다. 22 가까이 온 야곱을 만져 보고 이사악은 중얼거렸다. '말소리는 야곱의 소린데 손은 에사오의 손이라!'

 

이사악이 야곱의 음성을 알아챘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옷, 즉 에사오처럼 꾸민 야곱의 가죽을 만져보고 그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자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준비한, 아버지가 좋아하는 옷을 입은 자이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 앞에서 면목 없이, 다른 존재가 만들어 준 별미와 다른 존재가 입혀 준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인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 나라의 존재 양식이란 말입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자기가 만들어 입은 무화과나무 잎새 치마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거저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야곱이 그의 전 인생 동안에 왜 인간은 그렇게 거저 은혜를 받아야만 하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도취하고 나서 외삼촌의 집으로 쫓겨 갑니다. 그게 축복받은 자의 삶입니까? 맞습니다. 그때부터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확인하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열심과 노력으로 큰 부자가 됩니다. 그리고는 약속의 땅에서만 유효한, 아버지로부터 도취한 축복을 이루기 위해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그를 찾아오십니다. 외삼촌 집에서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도록 놔두셨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성취한 것을 하느님이 직접 전부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걸 성도의 신앙생활이라 합니다.

 

야곱은 자기 형 에사오가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전갈을 받고 얍복강가에 숨어 여전히 자아를 챙기고 있습니다. ‘만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그와 전쟁을 치르십니다. 그런데 야곱이 하느님께 지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의 자아 챙기기의 집요함입니다. 하느님은 결국 그의 환도 뼈를 치십니다. 그건 전인을 치는 것이라 했지요? 야곱이 거기서 사실상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대신에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대신에 죽은 이를 평생 의지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이 되고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지팡이 하나를 선물 받습니다.

그 지팡이는 자기가 평생 짚고 다녀야 할 의존대상이 됩니다. 이제 야곱은 그 지팡이가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죽을 때에도 그 지팡이를 의지하여 죽습니다.

하느님은 야곱의 전 인생 동안 야곱과 전쟁을 하시면서 왜 하느님의 백성은 자기의 힘과 노력과 열심으로 살 수가 없는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야곱이라는 가짜 하느님과 싸우셔서 결국은 승리를 이끌어 내시고야 마신 것입니다.

거기에서 야곱에게 지팡이가 주어지고 그 지팡이와 함께 이름이 주어지는데 그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람과도 싸워서 이기고 하느님과도 싸워 이긴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그건 모든 인간들의 마귀 적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이라 부를까요? 교회는 하느님 앞에 순종한 자들을 끌어 모아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싸워 이기려고 하는 작은 하느님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부수고 만들어 낸 발생론적 공동체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발생, 원인과 이유가 없이 뜬금없이 나타난 무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과도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신이 되어버린 와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엄밀히 말해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외부에 있는 대적들과 싸우는 자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절 같은데 가서 땅 밟기 같은 거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지근지근 밟으란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과 싸워서라도 라는 존재의 하느님 됨을 챙기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옛 사람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러한 이스라엘들을 당신 아들의 옷으로 덮어 은혜로 아들 삼아 주신 것입니다. 에사오의 털과 에서의 옷이 야곱에게 입혀져 하느님의 축복이 거저 내려 온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을 통해 바로 그러한 은혜의 현실을 경험하고 체험하며, 자신의 실체를 올바로 깨닫고 하느님의 은혜 앞에 온전히 항복해 가는 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난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의 열심은 하느님 앞에서 배설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쓰레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든지 지옥에 보내셔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라는 처음 자리, 죽은 흙의 자리로 밀려 내려가 하느님의 은혜만을 꼭 붙드는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렇게 온전히 비워진 자가 정말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율법주의자들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천국에서의 큰 자, 작은 자, 운운 하시면서 그들의 큰 자되기의 삶을 부수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천국의 장자는 이 세상에서 차자로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세요. 야곱이 그러한 하느님의 의중을 읽게 되자 곧바로 어떤 자리로 내려갑니까? 형 에사오의 앞으로 달려가 형을 내 주인라고 부릅니다. 뭡니까? 하느님의 언약 속에서 야곱이 에사오의 섬김을 받는 자가 될 것이라 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왜 야곱이 에사오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지요? 하느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삶의 원리라는 것을 거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복음을 깨달은 자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요셉의 삶입니다. 창세기 371절 이하를 보면 야곱의 역사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역사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히브리어 토레입니다.

야곱의 역사를 이야기 하겠다고 한 모세가 갑자기 요셉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의 삶이 바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야곱의 삶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삶이 어떠했나요? 처음부터 꼬이지요? 무죄한 자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 고난과 고통을 통과하여 자기를 죽인 자들을 살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야곱의 장자가 누구라고 나오지요?

(대상5:2) 2 유다가 동기들 가운데서는 세력이 컸으므로 그의 혈통에서 영도자가 났으나 장자권만은 요셉에게 있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를 장자라 부릅니다. 왜요?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차자에서 장자가 된 야곱의 삶을 가시적으로 역사 속에서 보여주는 인물이 요셉이기 때문에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가 다른 차자들을 위해 죽도록 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예수의 역할을 하고 역사 밖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왜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하지 않고 요셉의 아들들에게 축복을 하는지 아시겠지요? 요셉은 죽어야 할 차자 야곱의 삶을 대신 살아내어 야곱을 살려내는 예수의 역할을 하는, 인간 족보 밖의 인물을 상징하기에 야곱의 족보에서 빠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역할은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내시고 우리에게 그 삶을 전가시켜 주심으로, 죽어야 할 우리를 살려내시는 예수의 역할인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신의 아들들로 편입을 시킵니다. 그들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입니다. 그런데 장자인 므낫세의 머리에 왼손을 올리고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오른 손을 어긋 맞겨 올립니다. 야곱은 이 세상에서의 차자가 하늘의 장자가 되고 이 세상에서 장자 노릇하려는 자들이 차자가 되어 지옥에서 이를 갈게 될 것을 확증해 버리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이 세상 장자들이 유기되고 자격 없는 차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장자가 되는 이 은혜의 구원을 이해하십니까?

그래서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위가 하느님 앞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위와 됨됨이를 의지하여 하느님 앞에서 에서처럼 서고 싶어 하잖아요? 탕자의 형처럼 떳떳해 지고 싶어 하잖아요? 그게 불교란 말입니다. 우리의 행위, 율법지킴은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처럼 배설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말라기는 사도 바오로보다 더 격한 표현을 했습니다. 볼까요?

(말라2:3) 3 너희 팔을 자르고, 너희가 제물로 바친 짐승의 내장을 똥째 너희 얼굴에 끼얹고 내 앞에서 들어내어 버릴테니, 두고 보아라

말라기는 이스라엘의 절기의 희생, 즉 이스라엘의 율법지킴을 똥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그 똥을 내어놓은 자들의 얼굴에 그 똥을 발라 똥과 함께 제하여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똥은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다 빠져버린 허울 좋은 쓰레기입니다. 그게 인간들의 행위입니다. 율법지킴이란 말입니다. 그걸 깨닫고 하느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에게서 진짜 예수의 삶이 나오게 된다는 것을 깨달으시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신자가 맞다면 여러분은 이미 몸과 법이 하나가 된 새 언약 하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란 말입니다. 그 자유는 절대 방종으로 흐르지 않아요. 그러니까 먼저 그 자유 안에서 기뻐하세요.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그 은혜의 부어짐에 행복해 하며 감사히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한 자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 영광을 스스로 챙겨 가시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들이 손자들 사랑하는 것 보시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지요? 아들이 낳아놓은 자식이 아들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을 근거로 만들어 낸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입니다. 손자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기에 더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늘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가치 있는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제한 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공은 성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 안에서 자유하십시오. 그게 복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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