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저주 받을 세상의 심판자들 (로마2:1~5)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28 조회수1,692 추천수0 반대(0) 신고

  

저주 받을 세상의 심판자들

(로마2:1~5)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2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마땅히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 자기도 같은 짓을 하면서 남이 그런 짓을 한다고 심판하는 자가 있는데, 그런 자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것 갔습니까? 4 더구나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크신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니 될 말입니까? 5 그러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으니 이런 자는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이 내릴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벌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가 성경의 독자들인 성도들에게 경고하고 강조하는건 여기에 나열된 죄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쳐 내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세목들을 인간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단죄하고 판단하여 사람들을 선인과 악인으로 갈라내려 하는. 진짜 죄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라는 것의 본질이 피조물의 하느님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21절에 판단(크리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판단, 크리노라는 단어는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죄의 내용과 질, 형량 등을 선고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사도는 이미 1장에서 성도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유죄라는 것을 선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무리에게 거저 부어진 것이 은혜라는 것과 그러한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 구원을 받은 자들임을 분명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전가 받은 그 의인만 의인이며 산자라는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 외에 다른 그 어떤 행함으로도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가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 어떤 인간도 하느님의 은혜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살아날 수 없음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것이 인간들이라면 그 누가 있어 다른 이를 자신의 선악구조 하에 심판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1절부터 차근차근 보겠습니다.

 

(로마2:1) 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는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부분의 내용을 다 포괄하고 함축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의역을 해 보면 이러한 것이 모든 인간들이 처해진 상황이라면다른 말로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게 되는 것이라면정도가 되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은혜로만 살아 날 수 있는 그런 존재이고. 그러한 은혜에 의해 살아난 자들이 교회인데 너희 중 누가 함부로 다른 이의 선과 악을 판단하여 단죄하는 심판관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편지를 교회에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자연인의 그 죄를 여전히 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자신들의 구별됨을 주장하고 자랑하기 위해 교묘하게 자신들을 위장하는 법을 고안하고 획득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하느님은 들을 들어서 진짜 를 지적하시고 발라내시기 위해 우리 성도들을 죄 생산 공장인 역사 속으로 넘겨 버리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역사 속에서 죄를 많이 안 짓는 경쟁을 하다가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하느님 나라로 회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명16:19) 19 법을 왜곡시키면 안 된다. 체면을 보아도 안 된다. 뇌물을 받아도 안 된다.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죄없는 사람의 소송을 뒤엎어 버린다.

(요한7:24) 24 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공정하게 판단하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김새나 입성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나, 외양으로 나타난 성숙과 변화의 정도, 됨됨이의 모양 등을 가지고 그 사람이 선인이다, 악인이다를 갈라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입니다.

선인과 악인은 그들의 행위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전적으로 의존하느냐 아니냐로 선인과 악인이 갈라집니다.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선하게 바뀌었느냐, 그들이 착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로 갈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놓는 자가 구원받은 자이지,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러한 행위를 내어 놓는 자신을 신뢰하고 칭찬하는 그런 자가 구원받은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심판의 기준은 성도들의 성숙이나 변화가 아니라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2절이 이렇게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2:2) 2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하느님께서 마땅히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심판은 진리대로 되는 것이지 사람의 행위나 외모를 근거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마땅히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카타 알레떼이안진리에 의해서, 진리를 따라서입니다. 심판은 진리를 기준으로 내려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1장에서 그 진리는 ‘true thing, 실체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들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함부로 사람들의 선인됨과 악인 됨을 규정하고 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자들이 유대인들이었고요. 그 유대인은 바로 그들처럼 종교인으로 전락해 있는 우리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님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욕을 먹은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이런 천인공노할 인간들이라는 생각을 하는 건 정말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지금의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잘 보세요.

(요한8:15~16,31-34) 15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 16 혹시 내가 무슨 판단을 하더라도 내 판단은 공정하다. 그것은 나 혼자서 판단하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와 함께 판단하기 때문이다. 31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32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무한데도 종살이를 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더러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따졌다. 34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들은 분명 하느님의 백성들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던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죄의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우리가 왜 죄의 종이냐?’라고 따지지요? 그랬더니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게 죄다라고 일갈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오직 진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는 것이라는,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 후 너희는 죄의 종이다라고 선언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은 존재다. 그래서 남을 외모로, 육체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자격이 있는 자다이렇게 선악 판단의 주체로 서는 그 자체가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선인과 악인을 가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 발휘를 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행위와 사유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근거로 사람들을 이리저리 가르는 것은 하느님의 자리를 타고 넘어온 마귀들의 행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절 말미가 남을 판단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로 끝나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 행위 자체가 정확하게, 스스로 자신을 죄 있는 자로 심판해 버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똑같은 경고를 합니다.

(야고2:1,9,1013)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9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10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13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다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규율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율법 어긴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하느님이 주셔서 구원을 해 내신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한 자들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받지 못한 자들은 반드시 자비 없는 심판에 던져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사도 바오로의 경고가 더욱 엄중해 집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붙잡으라.

 

(로마2:3) 3 자기도 같은 짓을 하면서 남이 그런 짓을 한다고 심판하는 자가 있는데, 그런 자가 하느님의 심판을 면할 것 갔습니까?

그렇게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행실로 그 사람들의 선악을 판단하는 자들은 그들이 악하다고 심판을 해 버린 자들과 똑같은 일을 행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에서 죄라는 것의 정의가 조금 더 선명해 집니다. 사도 바오로가 1장 말미에서 나열한 죄의 세목들은 분명 죄의 증상들이 맞습니다.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의 증상들의 뿌리는 라는 존재에 대한 가치 부여와 무한 신뢰에 있는 것입니다. ‘라는 존재의 무용함과 무력함을 인정치 못하는 그 자체가 죄인 것이고 그 죄에서 죄의 증상들이 격발되어 터지게 되는 것 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역사 속에서 역사의 잣대로 악하다고 선고를 받은 이들이나 ,그들을 악하다고 선고를 한 사람들이나 모두 하느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이들이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예수의 공로와 은혜를 의지하며 전적인 자기존재 의뢰의 삶을 살게 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본문 4절은 그러한 성도됨의 근거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로마2:4) 4 더구나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그 크신 자비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자가 있다니 될 말입니까?

넌 어떻게 성도가 됐니?’를 묻는 것입니다. ‘넌 네가 훌륭한 행위를 내어 놓아 구원을 얻은 거라 생각해? 너도 하느님의 인자하심에 의해 인도되어 회개의 자리로 간 거 아냐? 근데 그런 네가 누구의 행위를 가지고 선하다, 악하다, 가망 없다, 등등의 판단을 한단 말이냐? 그건 하느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행위 아니냐?’ 이게 4절 안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5절에서 그렇게 계속 제 잘난 맛에 사는 자들은 절대 천국 못 간다.’로 확인 도장을 찍습니다.

 

(로마2:5) 5 그러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으니 이런 자는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이 내릴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벌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구원 받은 성도는 끝까지 그렇게 인간의 가치와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근거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자로 살 수 없도록 되어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건 회개하지 않은 자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기관차에 끌려오는 인간 측에서의 수동적 반응인 것이지 인간들이 생산해서 내어 놓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반드시 믿음을 동반하게 되는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성도의 믿음 또한 하느님의 믿음에 의해 주도되어지는 것이지 성도 안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님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라고 설명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지금 끌려가는 중에 있는 자도 있기에. 갈라디아서로 가면 사도 바오로가 그 하느님의 믿음에 대해 잘 표현해 놓은 곳이 있습니다.

(갈라5:4~6) 4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끊어졌고 은총에서 벗어났습니다. 5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6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선한 행위로 의에 이르려 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완성되는 의에 의해 산 자가 되는 것인데 그 예수라는 의 앞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 같은 인간 측에서의 행위가 아무런 가치 발휘를 못 한다는 것입니다. 효력이 없어요.

 

그렇다면 성도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믿음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가? 그게 6절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성도를 살게 하는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하지요? 그 어구를 헬라어로 풀면 피스티스 디 아가페스 에네르구메네입니다. 직역을 하면 사랑에 의해서(by) 믿음이 일 한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기인한. 하느님의 믿음이 성도에게 가입되어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역사하다라고 번역이 된 에넬게오의 주어가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의 믿음은 성도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의 믿음을 낳았고 그 하느님의 믿음이 성도에게 역사하여 성도가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포도원 농부의 비유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그 나쁜 농부들을 건축자들에 비유를 하시지요? 건축자라는 것은 건축의 전문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라는 것들이 진짜 머릿돌 하나를 분간을 못하고 계속 그 머릿돌을 가져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상의 건축자들은 진짜 머릿돌이 아닌 가짜 머릿돌로 집을 짓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금방 무너져 내리게 되는 그런 저주의 집이 된단 말입니다. 그게 이 세상 건축자들이 짓고 있는 역사라는 집인 것입니다. 성도는 그 실체를 보는 자들인 것입니다.

왜 포도원 농부들, 세상의 건축자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과 심지어 아들까지 때려죽였습니까? 첫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열매는 자신들의 소유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그 비유에서 그 포도원의 주인은 따로 있었고 그 농부들은 그 포도원을 세를 얻어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다셨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의 의미는 고용이라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포도원에서 열리는 열매의 일차적 소유권은 포도원 주인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 농부들은 그 포도원 주인이 삯으로 주는 것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챙겨야 순리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소득의 열매를 내어 놓으라고 종들을 자주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 농부들은 주인의 은혜를 싹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신에게서 나오는 모든 열매의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의 판단하는 자들을 바라보세요. 하느님은 너희들은 은혜가 아니면 존재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들을 역사 속으로 넘기셨는데 그렇게 넘겨진 자들이 이 역사 속에서 난 저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야라는 자아실현의 삶을 사는 것 자체가 뭐라는 말입니까? 그게 판단이잖아요? 그게 주인의 아들을 때려죽이는 일인 것입니다. 주인의 은혜를 찬송하라고 역사를 세 주었더니 그 셋집에서 주인의 영광까지 가로채 버리는 것이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이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이 내릴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벌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진노를 받을 진짜 죄라는 말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진노를 받게 되는 자들에 관한 것이지요. 그런데 외모로 남을 판단하는 자들을 가리켜 하느님의 진노를 쌓는 자들이라고 한다고요. 그 말은 하느님의 은혜 앞에서 자기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는 그것 자체가 바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고 그것이 죄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저마다 라는 주인공을 무대 위로 올려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하느님의 은혜만을 찬송하며 사는 곳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하느님 나라에서는 라는 존재를 기준으로 하여 선과 악, 좋고 나쁨을 가리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히브12:2) 2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믿음의 시작이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앉으신 보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기신 것처럼 이기는 자들에게 그 안식의 보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예수처럼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모양으로 이 땅을 살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발가벗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을 당하는 자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 아래에서 그걸 개의치 않는 자로 사는 것. 그게 이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데에 열을 올립니다. 세상의 힘으로, 가치로, 명예로, 도덕으로, 윤리로 자신의 진짜 내면 인격을 위장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면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미 결정이 되어 이 땅에 차례대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루가3:23,38) 23 예수께서는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는데 사람들이 알기에는 그는 요셉의 아들이요, 요셉은 엘리의 아들이며, 38 에노스, , 아담,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께 이른다.

예수님부터 시작하여 위로 차근차근 올라가니 맨 위 조상이 누구입니까? 하느님이십니다. 그 예수 안에 여러분과 제가 있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조상이 누구라는 말인가요? 하느님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창세전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셔서 이 땅에 차례로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구원의 이야기를 너무나 일관성 있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창세5:1~3,32) 1 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어 내시던 날,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대로 사람을 만드시되 2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다. 그 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 이름을 아담이라 지어 주셨다. 3 아담은 백 삼십 세에 자기 모습을 닮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32 노아가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을 때의 나이는 오백 세였다.

하느님에서 시작된 하느님 백성들의 족보가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나오는 하느님 백성들의 족보인데 그 족보가 누구에게서 끝나요? 셈에서 끝납니다. 두 번째 족보를 볼까요?

(11:10,26) 10 셈의 후손은 다음과 같다, 셈은 홍수가 끝난지 이년 뒤 그의 나이 백세가 되어 아르박삿을 낳았다. 26 데라는 칠십 세가 되기까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다.

창세기 5장에서 셈에서 끝난 족보가 창세기 11장에서 다시 셈에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에서 끝나지요?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즉 교회의 조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낳고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족보의 끝에 예수가 계시고 그 예수 안에 성령으로 잉태된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연결이 되고 있지요? 그런데 창세기 10장으로 가면 그 아브라함의 조상인 셈이 좀 색다르게 설명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21~24) 21 셈에게서도 아들이 태어났다. 에벨의 모든 후손이 그에게서 나왔는데, 그는 또한 야벳의 맏형이기도 하다. 22 셈에게서는 엘람과 아시리아, 아르박삿, , 아람이 났다. 23 아람의 아들들은 우스, , 게델, 마스였다.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았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다.

아브라함으로 끝나는 족보의 맨 앞인 셈을 부연하는데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이 노아의 아들 셈을 에벨을 머리로 한 그 아래 모든 이들의 조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 셈은 하느님에서부터 시작된 족보의 끝이었고요.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에벨은 셈의 증손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굳이 셈을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셈 아래의 족보 전체를 에벨이라 부른단 말입니다. 왜 일까요? 셈으로부터 시작된 족보가 어디서 끝나요? 아브라함에게서 끝납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족보는 예수와 그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교회에게서 끝나고요. 그러면 그 아브라함을 대표로 하는 믿음의 백성 전체가 에벨이라는 말인데 왜 모세가 우리를 에벨이라 부르지요? 에벨이라는 단어는 히브리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을 히브리라 부르지요? 그리고 성경이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라고 부릅니다. 그 때에는 히브리 민족이라는 것이 없었던 때잖아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 히브리라는 단어가 이브리’, 에벨 족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을 에벨, 히브리라고 부릅니다. 에벨이라는 단어는 건너간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어디에서 어디로 건너간 자들이라는 말인가요?

 

여러분, 이 에벨, 히브리가 살던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다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인간들의 구음()이 흩어지게 된 그 때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노아가 500세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년 후인 600세 때 홍수를 맞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노아가 홍수 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셈이 홍수 후 2, 그러니까 약 100세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그로부터 30년 후 아르박삿이 셀라를 낳습니다. 셀라가 30살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이 삼십 사세에 벨렉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 에벨의 아들 벨렉 때에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창세10:25,31-32) 25 에벨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 중의 한 아들은 벨렉이라 불리었다. 그의 시대에 인종이 갈라졌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의 아우는 욕단이라고 불리었다. 31 이상이 씨족과 언어와 지방과 부족을 따라 갈려 나간 셈의 후손들이다. 32 각 부족의 계보를 따라 나누어진 노아 후손들의 씨족은 위와 같다. 그들에게서 부족들이 세상에 갈라져 나간 것은 홍수가 있은 뒤의 일이었다.

벨렉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하지요? 여기에 쓰인 파라그라는 단어와 3절의 나뉘었다가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파라그와 같은 의미의 단어인 푸쯔라는 단어가 11장에 나옵니다.

(창세11:9) 9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을 온 땅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온 땅에 흩으셨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푸쯔입니다. 그러니까 벨렉 때에 바벨 탑 사건이 일어난 것이고 그 사건으로 방언이 갈린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나라가 나누어져 생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0장 말미의 족보가 벨렉에서 멈추고 11장에서 바벨탑 사건이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 것은 넉넉잡아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후 100년 안팎의 일인 것입니다. 그때는 노아도, 셈도, 에벨도 다 살아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의 모든 인간들의 상태가 바벨탑 쌓기로 설명이 되었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지 않나요? 그래서 인간은 불가능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셈의 후예들이 똑같이 바벨론 안에서 바벨탑 쌓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나친 추론입니까? 아닙니다. 창세기 10장에서 셈의 족보 맨 마지막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지요? 그 셈의 후예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보세요.

(여호24:2-3) 2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말씀하셨소. '옛적에 너희 조상들은 유프라테스강 건너 저 편에 살고 있을 때 다른 신들을 섬겼었다. 아브라함과 나홀의 아비 데라도 그러했다. 3 그런데 나는 그 강 건너 저 편에서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다가 이 땅을 샅샅이 밟게 하고 많은 후손을 보게 해 주었다. 그에게 이사악을 주었고

보세요.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를 비롯한 아브라함의 조상들, 즉 셈의 후예들이 강 저편에서 뭘 섬겼다고요?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의 현장에는 함의 후예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셈의 후예들도 함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 중 아브라함으로 대표되는 교회를 강 저편에서 이편으로 끌어내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 힘으로는 절대 그 바벨론에서 못나오니까요.

아브라함이 살던 곳이 갈대아 우르지요? 그곳 갈대아바벨론이잖아요? 그리고 그 바벨론이 요한묵시록에서 그대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강 저편 바벨론에서 강 이편 가나안으로 건너온 자들이 에벨, 히브리인 것입니다. 어떻게요? 믿음으로요.

 

(히브11:8) 8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전체의 주어가 뭐라 했습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이 아브라함을 땅 저편으로 끌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주체가 누구라고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여전히 바벨론이라는 도시에 대한 연정을 품고 바벨탑 쌓기에 열중인 자들인 것인데 하느님의 열심과 믿음이 그들을 강 저편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저주의 풍랑과 저주의 홍수를 하느님이 은혜로 건너하게 하신 것처럼 성도의 인생 또한 하느님의 믿음과 열심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에벨, 히브리인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꼭 홍해나 요르단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진군을 하는지 이해가 가시지요? 여전히 바벨론에서, 애굽에서, 광야에서, 뭉개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강 이편으로 이끌어낸 자들이 교회라는 의미에서 교회 전체를 에벨, 히브리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하느님의 은혜로 이 저주받을 바벨론에서 끌려나와 가나안으로 밀려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와중에 우리는 노아와 셈과 에벨과 같이 하느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바벨탑을 쌓는 자들임을 폭로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탄식하시는 소리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탄식 속에서 절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당신의 나라로 열심히 이끌고 계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시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너무 조바심들 내지 마세요. 지옥이 원래 우리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여러분 자신에게 무척이나 부끄러운 폭로를 계속 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절망으로 가지 마시고 예수님의 은혜에 여러분을 다 맡겨 버리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