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로마 5: 8-11)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8-31 조회수2,058 추천수0 반대(0) 신고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로마 5: 8-11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11 게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이 사진은 한국불교조계종 조계사 앞에 걸린 성탄축하 현수막이예요. 아래 사진은 서울 구룡사의 주지 스님이 천주교 포이동 교회 주임 신부님을 찾아 가서 성탄축하 선물로 란을 선물하고 있는 그런 사진입니다. 제가 이 사진을 설명하는 신문기사(동아일보.20011225,화요일 제25017,) 일부를 발췌해서 읽어 드리겠습니다. 구룡사 정우 스님이 이렇게 얘기했어요.

정우 스님은 부처와 예수 마호멧드께서 세상에 오신 의미와 정신은 모두가 같을 텐데 그를 따르는 분들이 서로의 아집과 편견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 같다며 세 분이 한 시대에 존재하셨더라도 결코 다투거나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신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보다 나은 인간다운 사람을 살아야 한다, 는 것을 몸소 실현하시기 위해서였고 전쟁보다는 공존이 우리들의 화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화답했다. 두 성직자는 내년에는 절과 성당에서 부처님과 예수님말씀을 서로 나누도록 하자고 약속 했다. 절과 성당에 축복처럼 서설이 내렸다.”

 

어떠세요? 마음이 훈훈해 지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게 모든 인류가 보다 나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나요? 예수님과 마호멧드가 석가모니가 한 시대에 태어났다면 정말 그들의 말대로 그 세 분은 서로를 사랑하며 공존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았을까요? 그 세 분이? 만일 그렇다면 절의 주지 스님과 성당의 주임 신부가 이렇게 악수를 하며 포옹을 하는게 맞죠.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보다 나은 인간상 구축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라 하느님의 원수들을 지옥에서 건져 올리기 위하여 오신 거예요. 석가모니와 마호멧드가 예수님 시대에 태어났다면 예수님은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을 거예요. 회개하라!!

 

예수는 인류를 교훈하고 양육해서 보다 훌륭한 인류로 성숙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그들의 불가능을 품어 안고 죽으러 오신 분이예요. 우리 그리스도교가 예수만을 구원의 길로 붙들고 있는 건 정우 스님의 말처럼 우리의 아집과 편견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길 이외에는 인간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걸 믿음으로 알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본문 10절을 보세요.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원수였어요. 아니,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지금의 현실도 역시 하느님의 원수예요. 창조주 하느님을 창조주로 대접하지 않고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반역자, 그 하느님만을 왕으로 주로, 삼아 살지 않는 그 모든게 하느님의 원수거든요. 그래서 반역아, 나라의 반역자만 달아내는 그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린 거란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자신만을 위하여 살 때가 얼마나 많아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러니까 지금도 원수예요.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죽고 있는 거가 맞는 거예요. 그걸 묵시 속에서 십자가로 완료해 놓으셨다. 라고 하는 것이지 지금 우리는 그 십자가로 인해서 성자로 변한 게 아니라 여전히 하느님의 원수로 살아가면서 나 떄문에 예수가 죽은 게 맞구나를 배우고 교훈 받고 있는 거라니까요.

그러한 올바른 자인식이 있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롯하고 선명하게 이해되어지잖아요. ,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가 선 것이구나. 그래서 하느님이 하느님의 원수로 성도를 이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원수로 여전히 그냥 살도록 놔두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아플 뿐이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력으로 벗어날 수 있는, 육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이러한 나를 위해 예수가 그 국가의 반역자들만 진다는 십자가를 진 것이구나! 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높이게 되는 것, 이걸 내가 날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내 십자가였구나! 를 올바로 고백하는 거, 그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 지는 거예요. 다른 게 아니라.

그런데 어떻게 불교가 바라보는 예수와 그리스도교가 바라보는 예수가 같은 예수일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예수와 석가와 마호멧드가 같은 목적을 갖고 이 땅에 왔다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느냐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하느님의 원수들을 위해 십자가를 졌습니까? 마호멧드가 하느님의 원수들을 위해 죽임을 당했나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만이 하느님의 원수들인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예요. 그래서 성경이 예수만 주님이요, 예수만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요한복음으로 가서 하느님이 이 세상에 예수를 던지신 이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16절 보세요. 이건 불교인들도 다 외우는 거예요.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복음에는 세상이 항상 둘로 나누어져 있다니까요. 그렇게 멸망 받아 죽을 세상, 거기서 구원받을 세상.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했을 때 그건 성도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온 세상, 마귀의 죄까지 짊어지고 간 게 십자가가 아니니까요. 그죠? 이 세상에, 세상의 모양으로 내려와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 그래요. 왜요? 그 외아들(독생자)을 믿는 자만 구원하시려고. 그 외아들을 감동시키는 자, 기쁘게 하는 자를 구원하는 게 아니라 외아들을 믿는 자, 외아들 아니었으면 난 큰일 날 뻔했네! 가 외아들 믿는 거예요. 그게 의존이거든요.

 

믿는다는 건 원래 하느님 거라니까요. 그 외아들을 믿는 자만 구원하려고, 그건 다른 말로 하느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그 행위나 가능성, 세상의 가치 등을 믿는 자리, 의존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는 자들로 지어져 가게 된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믿어주면 구원할게 가 아니라 그렇게 하느님 나라에서 이미 완료된 하느님의 백성이 이 땅에 내려와서 예수님만 의존하고 , 예수님만 붙드는 십자가만 의지하는 자로 지향되어 간다는 거예요. 그들의 삶이. 그들만이 멸망의 자리에서 건져 오르게 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신을 신 삼아 살던 당신 백성들의 오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그게 믿음이니까, 창조주 앞에 그 피조물의 자리로 끌어내기 위해 오셨다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예요. 그래서 그를 믿는 자만 구원하겠다. 이 말의 진의가 바로 그거란 말입니다. 믿는 자만,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셨다고 했는데 거기에서 이처럼 이 받는 내용이 바로 그 앞에 나오죠? 볼까요? 요한복음 314-15.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뭐를? 그를 믿는사람은. 뱀을 믿는 자? 놋 뱀이 장대에 달려 있는데 그걸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대요, 이게 무슨 말이냐고요? 자기 아들을 뱀처럼 장대에 매달라 죽일 만큼 사랑하셨다, , 이처럼 사랑하셨다 예요. 그런데 그 뱀이 어떤 뱀이냐하면 모세가 광야에서 장대에 매단 뱀입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다가 불 뱀을 만나게 된 사건이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 불 뱀들은 하느님께서 보낸 뱀들입니다. 하느님이 뱀을 보냈어요. 에덴동산에서 그 뱀을 누가 보냈는지 여러분 잊지 마세요. 하느님의 허락, 그 울타리 밖에서 우발적으로 존재하는 사건이나 존재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불 뱀을 이스라엘, 당신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이 보내서 물게 하시고 그 물린 자들에게 놋 뱀을 보게 하심으로 살려 내는 게 구원인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316절의 이야기인 거고 성경 전체의 이야기인 거예요. 그러니까 불 뱀에 물리게 한 건 하느님이라니까요. 그들만 놋 뱀을 보게 되어있어요. 멀쩡한 자들이 놋 뱀을 왜 봅니까? 불 뱀에 물린 자들만 놋 뱀을 보게 되어있어요. 그걸 하느님이 하신다니까요. 여러분은 이 역사 속에서 불 뱀에 물린 자라는 자인식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거예요.

불 뱀에 물리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나 그 장대에 달린 놋 뱀이 아무 가치가 없어요. 그렇다면 놋 뱀이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그 성도, 놋 뱀이 매달린 장대가 십자가니까, 예수님이 내가 그렇게 달린다고 했잖아요. 십자가를 이야기 하시면서, 그러니까 그 놋 뱀이 달린 십자가, 예수가 달린, 놋 뱀이 되어서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불 뱀에게 물려야 된다는 결론이되죠 반드시. 안 그러면 놋 뱀 못 쳐다봐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만 구원 받으니까. 그러니까 불 뱀에 물린 자만 구원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어떤 일을 했냐고요. 하느님을 오히려 종 취급하면서 왜 우리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드느냐고 모세와 하느님을 같이 원망했단 말예요. 자기가 더 높은 거죠? 이게 이 모습이 어디서 나타났냐고? 이게 에덴동산에서 그 뱀이 아담과 하와를 부추긴 내용 아니에요? 네가 하느님처럼 되라가. 그러니까 결국 불 뱀에 물린 자들은 어떤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뱀인 거예요.

 

그래서 하느님이 애굽에서 그들을 끌어내 오자마자 첫 번째 명령으로 준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한 거예요. 하느님이 바보예요? 하느님 말고 다른 신이 없다는 걸 하느님이 모르냐고요? 안다니까요!! 그런데 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그래요? 첫 번째 명령으로. 너희들이 지금 너희들 자신을 신 삼아 살려고 하는 그 것, 그게 바로 사망이다, 를 알려 주는 거예요. 절대 안 된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신 삼아 사는 것, 나를 종으로 부리며 너희들이 신이 되어 살겠다고 하는 것 내가 반드시 꺾어 버리겠다는 거예요. 그게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이었단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자기들을, 뱀인 자기들의 그 정체성으로 하여금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죽음의 자리로 내닫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불 뱀을 풀어 그들을 물게 하는게 성도의 삶이예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그거를 막아주는게 성도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 살아나는 자는 반드시 불 뱀에 물려야 돼요.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불 뱀에게 물려야 돼요. 물리면 어떻게 된다? 민수기에서? 살려주세요! 내가 뱀 이예요, 맞아요, 하느님 살려주세요! 이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게 되어있단 말이예요. 불 뱀에 물린 자들의 입에서만.

성도에게 말씀이 떨어지면 성도는 곧, , 나는 지금 죽어도 아무 할 말 없는 자네, 라는 자신의 죄인 됨을 폭로 당하죠? 왜 말씀이 불 뱀이라고 해요? 말씀은 누구? 예수. 예수가 이 땅에 내려오자마자 세상이 악으로 마귀로 폭로됐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바로 그런 뱀의 역할을 하신 다음에 그 뱀이 되셔서 죽는 거예요. 이해가 가세요, 여러분? 앞 뒤 다 잘라먹고 밖에 나가서 예수님이 뱀이래, 그럼 큰일 나는 거예요.

 

로마서 320절 보세요.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요일1:10)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나 죄인 아니에요, 라는 자들은 그 속에 말씀이 없는 거라 그러죠? 말씀이 들어가면 어떻게 된다? 나 죄인 맞아요, 라는 고백이 나온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불 뱀의 역할을 하는 게 뭐예요? 말씀이에요. 그렇다면 이 놋 뱀이 갖고 있는 메시지는 뭘까요? 왜 장대 위에다가 놋 뱀을 달라고 하셨을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냥 그 불 뱀 하나 잡아다가 매달면 안 돼요? 왜 굳이 놋 뱀을 달아요?

성경에 보면 항상 놋, 놋이 주석이에요. , 주석은 심판을 상징하잖아요. 그래서 다니엘서나 요한묵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손이나 발이 항상 놋이나 주석이에요. 심판의 란 뜻이에요. 그런데 이 놋은 구부러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항상 놋으로 어떤 조형물을 만들려면 불과 망치가 필요해요. 예수님을 잡으려고 할 때 횃불과 망치가 등장했다는 거 잊지 마세요. 불과 망치로 심판을 당하는 거예요. 놋 뱀은 불과 망치로 심판을 받은 뱀 이예요.

그러니까 이런 말 이예요.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상에 내려오세요. 그런데 이 세상이 온통 어두움이어서 빛이신 예수님을 못 알아봐요. 그게 요한복음의 네러티브란 말 이예요. 성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성도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게 아니라, 우리는 못 알아봐요. 일차적 말씀의 기근. 그런데 하느님이 그 주림을, 그 기근을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뒤집어 내는 게 성도의 인생이란 말예요.

 

내가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 안에서 불 뱀에 물린 자다, 라는 이 자각을 갖게 하는 게 말씀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하고 예수가 놋 뱀이 되어 달린 십자가 그것만 바라보게 되는게 성도의 신앙생활이라고요. 그렇게 놋 뱀에 물린 자, 내가 불 뱀입니다, 라는 자각이 있는 자들이 어떤 부르짖음을 토해내는지 민수기로 한번 가볼게요. 민수기 217. 백성들은 마침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야훼와 당신께 대든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뱀이 물러가게 야훼께 기도해주십시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를 드리자,

이 뱀들을 나에게서 떠나가게 하소서. 내가 뱀이네! 그러는 거예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 좀 건져줘, 그러는 거예요. 그때 하느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보세요. 민수기 218. 야훼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뱀에게 물린 사람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여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이게 십자가예요. 이게 그리스도교이고 이게 구원이에요. 놋 뱀에게 열심히 기름칠 한 자? 아니에요. 그 앞으로 열심히 기어가서 그거 붙든 자? 아니에요. 바라보는 자. 그걸 믿음이라고 해요. 맞아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길입니다. 이걸 고백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하느님처럼의 삶을 수호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죽이는 하느님 살해범, 하느님의 원수로 남게 되는 거예요. 그걸 사망이라고 그래요. 그게 멸망이에요. 그런데 말씀에 의해 공격을 당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성도들이예요. 말씀이 물어버려요. 안 놔요, 말씀이 물고 안 놔요. 그냥 세상이 가는 그 길을 그냥 갔으면 좋겠는데 이 말씀이 물로 안 놓는 거예요. 불 뱀처럼 물고 안 놓는다니까요. 그리고 결국에는 너는 죽었어!!이걸 자각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살려주세요, 라는 이 단말마의 비명을 반드시 토해내게 만들어요. 말씀이 물어서. 그들은 말씀에 의해서 자신들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폭로당해요. 그들은 말씀 앞에서 자기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폭로당합니다.

 

선악과 입에 문 불 뱀으로서의 자기자아의 실체를 직시 하게 되고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산 자일수도, 살아갈 수도 없다는 자기의 처음자리를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게,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라는 그 하느님의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 사람들의 인생이에요. 따라서 이처럼 사랑의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아실현, 자아 확장의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니라 자기상실 자아 해체의 십자가를 지게 되는 거예요. 그거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정말 그게 기쁘기만 하세요?

히브리서 1117절 보세요. 17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독자, 외아들인데 히브리서에서는 모노게네스, 독생자예요. 요한복음 316절의 그 독생자와 같은 단어예요. 이 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이 아니라 모노스, 기노마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316절에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다, 는 이해가 되죠? 하느님이 성자 하느님을 우리를 위해 죽인 게 십자가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독생자를 드렸다는 게 무슨 말이냐는 말예요? 여기서도 그냥 독자, 외아들이라고 써야지 왜 성경에 두 번밖에 안 나온 단어가 여기에 쓰였냐고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교회의 대표가 교회를 품어 안고 하느님께 예수를 드린 거라니까요.

 

자기가 낳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육적 생산물을 드린 게 아니라 모노게네스, 예수, 하느님을 드렸어요. 하느님에게. 그러면 그게 무슨 이야기냐 말예요? 도데체가.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을 살려내는 중보자의 모형임과 동시에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에서 나오죠? 동시에 모든 성도들의 조상, 즉 믿음의 조상이기도 해요. 이중적 상징을 담고 있는 거예요. 이사악도 마찬가지구요.

야훼이레의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그 어린양의 죽음으로 약속의 후손인 이사악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것을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하느님이 죽이라고 하신 이사악은 마땅히 죽어야 돼요. 에덴동산에서 보세요. 받드시 죽으리라,

하느님이 명령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는데 살아난단 말예요. 이사악도 마찬가지예요. 약속의 후손인 이사악이 죽여!’ 그랬는데 살아난단 말예요. 어떻게 살아나는가? 그 십자가를 설명하는게 성경이란 말예요. 히브리서 1118절 보세요. 18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서 너의 후손이 퍼져 나가리라' 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죽이려고 하다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어린양을 대신 죽이고 이사악이 살아난 것, 이게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예요. 그래서 엔 파라볼래, 예요. 이건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 라는 이런 말 이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 이라고 해요. 헬라어 원문에 보면은. 그 어구는 직역을 하면 죽은 자 안에서 도로 가져온 것, 이런 뜻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그렇게 어린양 안에서 살아나려면 아브라함의 평생과 이사악의 헌신과 모든 게 다 거기서 죽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만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모리아 산의 이야기란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모리아산 사건은 시험이라는 단어로 축약을 해요.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그러죠? 요 시험이 예수님이 받은 시험, 페이라죠와 똑같은 시험이에요. 예수가 받은 시험이 뭐예요?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기를 입증하고, 하느님이 나를 도우신다고 하는 이런 것을 절대 드러내지 못하고 그냥 하느님의 뜻에 의해 죽음으로 하느님의 영광만 드러낸 시험이었어요. 그게 예수가 받은 시험이거든요. 그 시험을 지금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사건에서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 시험이 요렇게 통과된 거다. 그래서 페이라죠인 거예요. 자기증명이냐 하느님의 영광이냐?

 

여러분 이 시험이 우리에게 떨어져 보세요. 정말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를 죽일 수 있어요? 일시적인 기분이나 감정으로 술 한 잔 먹고 그냥 홧김에 이런 거 말고 진짜 그게 아주 변함없이 영원히 그러한 마음이 여러분 안에서 지속될 수 있냐고요? 천만의 말씀이에요. 나를 위해 하느님을 죽이면 죽였지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못 죽이는 존재예요. 우리는 이 패리라죠, 이 시험에서 항상 탈락 이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의 가슴에 못 꽂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거기서 꽂아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인간은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그래서 하느님이 아들의 심장에 꽂은 거예요.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겠다는 거예요. 왜 그걸 할 수 있다고 독려해주지 않고 격려해주지 않느냐는 거죠.

이게 진짜 네 아들이냐? 아니면 내 아들이냐? 물으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리 변화되고그래 영생을 얻고 구원을 얻었어요, 그게 여러분이 생산해 낸 겁니까? 하느님의 은혜로 주신 겁니까? 이거 물으시는 거예요. 그게 내 꺼였을 때는 절대 거기에 칼 못 꽂아요. 하느님 겁니다. 라는 이 고백이 있어야 그거 끊어낼 수 있어요.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낳을 때 아브라함은 마른 장작이었어요. 생식 능력제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도 없었어요. 비웃었다고요. 그 상태에서 하느님이 약속 하셨음으로 하느님이 주신 거니까 이사악은 하느님의 아들이에요. 하느님의 것이에요.

 

묵시록에 보면 여자가 교회가 쇠지팡이를 든 아이를 낳죠? 예수를 낳는 거예요. 교회가 예수를 낳는다는 건, 예수가 우리를 위해 오셨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오신 게 아니라 하느님이 은혜로 그 아들을 보내주신 거라니까요. 자격이 있다면 내가 낳은 거지만 하느님이 은혜로 준 거기 때문에 하느님의 약속의 자손이 그냥 온 거예요. 우리의 자격과 됨됨이와 상관없이. 그러니까 나의 구원도 내 것 아니고, 나의 됨됨이나 성숙도 내거 아니란 말예요. 그런데 하느님이 그토록 미워하는 그 죄,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의 쾌락만을 위해서 사는 그 죄 때문에 아들을 죽였다는 이 인식이 내 안에 오롯하게 새겨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벗어나려하는 지향성이 생기는 거지 열심히 노력해서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게 성도의 삶이 아니란 말입니다. 요걸 이해하시라는 거지~~ 어떻게 우리가 막사냐고요? 성령이 내 안에 있는데~.

 

불 뱀에 물렸을 때 우리는 어! 내가 뱀 이네~?, 뱀에게 속은 하와가 아니라 내가 뱀 이네~ ,이렇게 올바로 고백하는 거예요. 그들이 놋 뱀이 달린 장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느님, 당신의 나라 임할 때 나 좀 생각해주세요. 이 고백 하는 거예요. 하느님은 성도의 삶에 시험으로 개입하셔서 그 인생의 갖가지 이삭들을 전부 그렇게 끊어내심으로 하느님만 바라보는 하느님 바라기로 만들어 내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과연 나에게 이 역사 속, 내 인생 속에서 어떤 유익을 주었는가. 이걸 계산 하면 사실 성탄절이 기쁘지 않아요. 그러니까 술 먹고 그냥 취해서 에이 x, 이러는 거예요. 다들 기쁘다 그러는데, 난 하나도 안 기뻐. 그죠? 다 망했잖아요. 지금 여기 . 그걸로, 예수님의 오심이 고작 그딴 거 갰느냐고요. 아니란 말예요. 오히려 그런 걸 그렇게 끊어 내고 놋 뱀으로 달린 예수만 바라보라고 예수님이 오신 거기 때문에 그걸 아는 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진짜 찬송할 수 있는 거예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