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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물이 영생이다 (로마서 6:23-7:7)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03 조회수1,916 추천수0 반대(0) 신고

                           선물이 영생이다

로마서 6:23-7:7

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법률에 정통한 사람들이니 말씀드리겠는데, 법률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구속력을 가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2 결혼한 여자는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자기 남편에게 법적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남편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3 따라서 자기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른 남자와 사는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그 법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더라도 간음하는 것이 아닙니다. 4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5 전에 우리가 육적인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는 율법 때문에 우리의 온 몸에 죄스러운 욕정이 발동하여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6 우리는 율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죽어서 그 계약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낡은 법조문을 따라서 섬기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을 가지고 섬기게 되었습니다. 7 그러면 율법이 곧 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던들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 아멘.

 

성경이 말하는 사망, 죽음, , 생명, , 선 뭐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가진 국어사전의 개념과 많이 달라요.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가 죽는 그 죽음을 죽으시겠습니까? 이 호 코스모스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건 진리를 설명하는 모형이라 그랬잖아요? 아기의 탄생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결혼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고 육신의 죽음도 진리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죽음이라는 게 정말 끝입니까? 그럼 그건 정말 나쁜 건가요? 그건 정말 더럽고 무서운 겁니까? 그걸 누가 결정한 거죠? 그러니까 이미 그런 결정이 내려져 있으니까 그건 악하고 더러운 거니까. 그걸 누가 그렇게 결정해 놓은 거냐는 말이에요?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금방 우리의 선악 체계로 돌아가서 이건 나쁜 것, 이건 좋은 것, 이렇게 판단을 하고 그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요. 그래서 우린 그리스도가 아니면 쓰레기라고 하는 거예요. 진리를 알고 있어도 항상 그리로 돌아간다니까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모형으로 주신 세상 속 죽음이라는 건. 진리와 분리된 그 피조물의 상태와 결국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영원의 나라에서 보면 그 죽음이 찰나에 불과한 역사 이면의 죽음, 그리고 나가는. 죽음이 시작이라니까요.

 

그렇잖아요? 모든 존재는 영원히 삽니다. 지옥에서, 천국에서. 그러니 차라리 나지 않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났으면 진리를 알고 가야 되는 거거든요. 든 존재는 영원히 사는데 역사는 찰나란 말이에요. 그럼 그 죽음은 영원으로 들어가는 시작이에요. 문이란 말에요. 그런데 인간들의 제한된 이성 안에서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끝처럼 보일 뿐이란 말에요. 그러니까 나쁜 거, 무서운 거, 더러운 거. 이렇게 자기들이 결정하는 거라니까요. 그리고는 에녹과 엘리야를 부러워하는 거죠? 안 죽었다고. 그들이 죽었다니까요.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달라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리고 여러분이 보는 그 죽음과 다르단 말입니다.

육의 죽음이라는 건, 영의 생명인 그 진리라는 호흡. 그래서 르와흐라고 하는 거예요. 생기. 그게 호흡이잖아요. 그게 성령이라고도 하잖아요? 영의 생명인 그 호흡. 호흡이 딱 끊어지게 되면. 진리가 끊어지게 되면 인간의 상태가 그저 썩어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주는 모형이란 말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건. 시청각 교재란 말이에요.

그 죽음에서 그러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 죽음은 무엇보다 가치 있고 선한 거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그 죽음마저도 선악의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우리 육이 죽는 건 나쁜 것이라고 결정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 마음 안에, 복음.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그러한 죽음을 죽어도 되는 겁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죽음이 뭔데요? 죽음이라는 건 하느님 나라에서는 완성이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어요. 모든 것의 끝은 영원으로의 완성이에요. 역사에서의 끝은. 어떤 이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 그리로 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비 진리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 그 둘이 다 완성이 된 존재로 영원을 살아요. 편의상 그렇게 이야기하자고요. 영원을 살아요. 영원이란 말이 그건 아니지만 한 쪽을 천국이라고 하고 다른 한 쪽을 지옥이라고 해요. 그래서 전자의 죽음을 ’() 이라고 해요. 여기서 종이라는 건 완성하다, 마치다, 예요. 그래서 임종이에요. 후자의 죽음은 라고 해요. 그냥 죽음이에요. 후자의 죽음은 사라니까요. 종이 아니라.

  

여러분 죄를 더럽고 추악하게 그렇게 상상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의 죄는 이 아담들의 율법세계에서의 죄는 그렇게 멋지게 보인다니까요. 깨끗하고 정의롭고 순수하고 순결해 보인다니까요. ? 율법을 먹고 율법과 결혼해서 율법과 낳는 행위라는 자손이 뭐겠어요? 그 열매가 뭐 겠느냐고요? 인간들이 좋아하는 그 열매란 말입니다. 물론 더럽고 추악하고 어둡고 지저분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게 아니에요. 그것도 죄예요.

그러나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리고 인간세상이 보편적으로 정해놓은 상식을 갖고, 선과 악을 구분하여 이건 죄가 아닌데? 라고 생각하지 말란 말예요. 그게 더 무서운 것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래적 마음인 선악구조 속에서 선하다고 선택한 것이나 악하다고 택한 것, 그래서 안 하는 거. 이게 전부 죄예요.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공부한 것처럼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들을 때 ,우리의 이 두 마음으로 판단을 해서 옳게 듣던 그르게 듣던 그 들은 것으로 듣는 족족 죄로 만들어내는 신기한 능력을 갖고 있어요.

 

산상수훈이 전부 어떻게 시작해요? 아쿠오로 시작해요. 너희가 들었지? 그렇게 들었지? 어디에서? 에아르케. 태초에 내가 한 이야기를 너희는 그렇게 들었잖아?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뭐라 그래요? 살인하지 마! 희생제사 드리지 마! 라고 내가 말했을 때, 너희는 어떻게 들었다는 거예요? 율법에서 뭐라 그래요? 희생제사 드려로 듣잖아요. 우리는. 그리고는 열심히 희생제사 드려서 죄 짓죠? 그럼 간음하지 마! 라고 하면? 어떻게 들어요? 간음하지 마!로 들어요. 그거는 또. 그래놓고 간음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세상과 간음하죠? 살인과 간음 배웠잖아요? 그럼 이제 척 알아먹어야지요, 그러잖아요?

  

 

어떤 농부가 자기소를 남의 밭에다가, 배추 밭에다가 묶어 놓고 너, 남의 밭 배추 먹지 마! 그리고 가서 한 삼일 있다가 왔는데 진짜 그 소가 안 먹고 있었어. 거기서. 그건 아픈 소 아니면 미친 소예요. 소는 너, 남의 밭 배추 먹지 마라는 주인의 말도 못 알아들어야 되고 나는 이거 먹고 싶다, 라는 자기의 본능을 억제할 수도 없어야 소예요. 피조물은 하느님의 말을 못 알아들어야 돼. 못 알아들어야 정상이에요.

그래서 하느님이 그러는 거예요. 예언자들이, 하느님, 쟤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주세요. 그랬더니 그냥 가서 알아듣던지 못 알아듣던지 전해. 그러신 거예요. 자연스럽다, 라는 건 그렇게 되는 게 맞다, 라는 거예요. 그렇게 해 놨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런데 하느님이 피조물이 그런 수준이라는 걸 몰랐을까요? 그럼 그게 무슨 하느님입니까? 그게 무슨 옴니셔스의 하느님이에요?

하느님은 인간들이 원하는 바, 그 에피뚜미아를 가지고.. 하느님의 원하는 바, 에피뚜미아가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줬다는 거예요. 그러한 두 마음을 가진 인간들이 자, 율법을 하느님이 줬습니다. 받자마자 그 율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어요? 요건 해야 될 것, 말아야 될 것. 정한 거. 부정한 거. 깨끗한 거, 더러운 거. 즉시 둘로 나누죠? 그래서 율법은 둘이에요.

 

바오로가 그동안에 자기가 열심히 율법 지키면서 한 그게 죄잖아요? 그 죄가 바오로에게 해가 된 겁니까? 바오로에게 유익한 거였어요. 그게. 그럼 죄가 뭐 그렇게 나빠요? 바로 그게 말하는 성전으로, 말하는 율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가 하신 일이에요. 똑같은 일이에요. 옛 성전은 말하지 못하는 성전이었고 말하지 못하는 율법이었잖아요. 소리가 없는 율법. 문자로만 줬거든요. 그런데 그 율법이 와서 말을 하네요. 그건 이런 거였어, 라고 말을 하는데 그것도 못 알아들어요.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단 한 사람도.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이 옛 성전과 함께, 이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져야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 번째 성전으로 서리라.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로마서 714-16절 보세요. 14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육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서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지으면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에요? 이것이? 율법이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면 율법이 죄냐? 이렇게 물어요. 여태까지는 그게 죄야, 그것만 죄야, 그래놓고 갑자기, 야 율법이 진리를 가르쳐 주기위해 우리에게 준 거라면 그게 죄냐? 이렇게 물어봐요.

그래놓고는 율법이 신령한 것이다, 그래요. 푸뉴마티코스, 푸뉴마가 영이잖아요? 성령, 옳은 말, 깨끗한 말. 푸뉴마티코스. 깨끗한 말이 된 거. 신령한 거예요. 율법은 원래 그 진리를 담고 있는 거라는 거예요. 율법은. 신령한 거라는 거죠. 그런데 율법을 육신에게 주면 육신들은 그걸 사용하여 죄만 낳더라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자기들이 낳는 것의 실체를 올바로 알지도 못해요. 이게 뭔지도 몰라요. 자기들이 낳는 걸. 지금 그 말 하는 거예요. 바오로가. 알지도 못하더라. 자기들이 행하는 일을 알지도 못 하더라.

 

로마서 320절 보세요.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712-13, 12 그러나 율법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입니다. 13 그러면 그 좋은 것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죄가 그 좋은 것을 매개로 해서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죄는 죄로서 드러나게 되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얼마나 악독한 것인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도 자기가 하는 일들, 자기들이 하는 일들을 죄 아니라고 하니까 계명이 와서 그것도 사실은 죄야, 하고 드러내게 하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을 받은 내가 진리가 뭔지를 알았는데 여전히 자기가 어느 틈엔가 그리고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아, 율법이 바로 이걸, 나의 처음 자리를 이렇게 드러내려고 온 게 맞는 거구나 하면 율법이 선한 거죠? 잘 한 거잖아요? 그 일을. 그 말하는 거예요. 로마서에서 바오로가.

그러면 내가 그렇게 죄 덩어리라. 나는 그냥 뭐를 주기만 하면 그냥 바로 선악으로 갈라서 하느님이 미워하는 그 죄를 짓는 자다. 에피뚜미아가 나고, 내가 죄잖아요. 보면. 나는 그냥 죄 덩어리네? 그걸 알았으면, 내가 한 그것이 다 죄라는 걸 알았으면 이제 그거 안 하면 되잖아요. 희생제사 드리는 게 잘 하는 건 줄 알았는데 하느님한테 칭찬 받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죄라네. 그럼 희생제사 안 드리면 되잖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예배드리러 올 때 소 한 마리씩 안 가져 오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이 지금? 그거 알았기 때문에.

진리는, 생명은 땅의 것이 아니에요. 그쵸? 그런데 어떻게 땅에다가 생명나무를 심어요? 못 심습니다. 성경이 그래요.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 안에만 생명이 있더라. 그래요. 그러면 이 땅에다가는 그 생명 못 심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서 거기에 생명나무 열매가 안 열려 있는 게 맞는 거라니까요. 땅에는 그게 안 열려요. 아니, 땅에 온통 죄와 어둠 밖에 없어요. 그게 피조세계의 한계란 말에요.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이 온통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라 그러는 거예요. 내용도 없고 틀도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땅이라는 게 실체가 그렇다니까요.

 

 율법, 율법 하니까 자꾸 십계명이나 레위기의 계명들만을 떠올리는 거 같은데 율법은 선악과 먹지 마! 라는 명령에서 시작되어서 십계명으로 주어지고 모세 오경으로 주어지고 성경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모든 말씀을 총칭하는 거예요. 그게 율법과 계명이에요. 그 모든 말씀이 인간이 가진, 아니, 인간자체라고 할 수 있는 아담의 그 생래적 본성인 에피뚜미아, 그 탐심을 올바로 보게 만들어 주기 위해 하느님이 허락한 선한 것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묶이면 그게 악한 것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무엇인지 가르쳐서 하느님을 설명하는 도구가 호 코스모스요. 말씀이란 말에요. 하느님을 직접 설명을 못하니까. 문자에, 소리에 갇힐 수 없는 그분을 어떻게 설명해요. 인간이 뭔지를 설명해서 그분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린 하느님이 아니니까.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 백성들에게 죄 짓지 마! 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 죄가 뭔지 알았어? 이걸 물어보시고 싶은 거예요. ‘’= ‘탐심’= '‘. 이 공식 잊지 마세요. 그거 알아먹으라는 거예요. 그걸 확실히 깨닫고 와는 다른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거. 이걸 구원이라 그래요. 그래야 진짜 완성품이 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를 품은 ‘. 창세기 1장부터 하느님이 계시해주신 그 진짜 사람‘. 그걸 그리스도인 이라 그래요. 이 그릇 안에 그리스도, 진리를 품은 거. 그게 우리의 목적지에요. 창세기 1장에서 자칼과 네케바의 이야기가 나오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 사람이 되는 거. 자칼이 남편, 하느님의 역할이고 네케바가 하느님을 담는 그릇이에요.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어, 연합하여 사람이 되더라! 그런 거예요. 이게 목적이라는 거예요.

 

하느님은 피조물의 한계인 두 마음, 하느님일 수 없는 그 마음을 율법을 통하여 밝히 보여주시고 그것을 죄라 이름 하여 그 잘못된 과녁을 진리로, 은혜로 바로 잡으심으로 해서 당신과 한 방향으로 가는....그게 에이레네라 그랬죠? 둘이 멍에 같이 지고 한 방향으로 가는 거그렇게 한 방향으로 가는 벗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거예요. 여러분의 존재의 목적이에요. 그 전체 과정을 그 진리의 차서, 체계를 피스티스라 그래요. 굳이 한국말로 번역하면 그게 믿음이에요. 하느님은 미쁘시다, 하느님은 신실하시다, 그럴 때 그게 피스티스예요. 그 말은 하느님은 믿음이란 얘기잖아요? 무슨 말이겠어요? 하느님은 믿음이다? 그리고 너희들에게도 믿음이 되어라. 그랬잖아요.


그 죄가 없었다면 나를 내가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거예요. 내가 나를 모르고 어떻게 신을 논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그 신도 나의 수준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죄라는 것을 육의 세상과 다르게 보는 걸 성경이 뭐라 그런다고 했어요? ‘메타노이아회개, 라고 한다. 그랬잖아요. , 저게 사실이야? , 그렇게 파르르 떨게 아니었구나! 하고 바르게 보는 거. 그러면 그에게 있어서 그걸 그렇게 보는 순간 죄라는 게 삭제되죠? 그러한 죄의 삭제가 용서라고 하는 거예요. 원래 죄 없음! 이렇게.

그걸 못 보니까 계속 거기에 묶여서 여기 와서도 울고불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아닙니까? 울고불고의 신앙.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는데 보면 다 울어. 왜냐 하면 거기서 못 벗어났거든. 자기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시어머니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남편 죄에서도 못 벗어나고 그러니까 오면 설움만 북받쳐서 다 울어.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는데. ! 그게 사실은 나를 선으로 이끄는 하느님의 선물이었구나, 라고 알면 왜 울고불고만 해야 되느냐고요?


야고보서 113-15. 13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 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14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되는 것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

 

 죄가 완전히 성취가 되면 사망이 된대요. 그런데 무슨 말일까요? 이 사망은 뭐예요. 그러면? 여기서 사망이 다나토스에요. 신약성경에서 사망이라고 번역을 한 헬라어 단어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여러분이 지금 본 이 사망이에요. 다나토스’. 그리고 다른 단어가 네크로스인데. 다나토스는 아까 종, 말씀드렸죠? 완성의 의미로써의 죽음이에요. , , , 점 죽어가다가 확 죽어서 뭔가를 완성이 되는 게 다나토스에요. 바오로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을 때 그 죽노라가 다나토스에요. 날마다 죽어서 어떻게 되죠?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맞네, 라고 완성되는 거예요. 요걸 다나토스, 사망이라 그래요. 이건 나쁜 게 아니란 말에요. 네크로스는 그냥 우리 네페쉬가 숨이 뚝 끊어져서 죽는 거. 시체. 고걸 히브리어로 바꾸면 이 다나토스의 죽음을 히브리어로 바꾸면 무트라고 했죠? 무트 타무트.

  

주님께서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그러죠?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왔다, 그래요. 완성하러 왔다. 그래요. 그러면 그 분이 그 아버지의 뜻을, 말씀을 완성하면 어떤 죽음으로 끝나야 돼요? 다나토스의 죽음으로 끝나야 돼요. 그래서 내가 다 이루었다하고 죽는 거예요. 그 죽음이 왜 나쁘냐고요?

 

우리가 바로 그렇게 죽다가 죽고 죽다가, 날마다 죽다가 결국은 그렇게 언약의 십자가에서 아니네요 ! 난 죄인 중의 괴수 맞네요! 라고 죽는 게 구원의 차서라는 거예요.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예수가 그렇게 죽은 거예요. 근데 그게 왜 나쁘냐고요? 그걸 보고 하느님이 죽을 수 있어요? 이렇게 물어봐야 되냐고요?

 

여러분,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갖고 오신 분이다. 라고들 말하면서 거기서 예수님의 신성이 죽은 겁니까? 예수님의 인성이 죽은 겁니까? 이렇게들 물으시는데 성경 어디에 신성이라는 말과 인성이라는 말이 나와요? 그 분은 하느님으로 오신 사람이에요.

신성은 뭐고 인성은 뭐예요? 아세요? 모르는 말 좀 쓰지 마세요. 제발.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라니까요. 그분은. 그러나 성경에 주어로도 등장하지 않는 그 하느님은 아니에요. ? 그 하느님은 세상이 듣고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창세기 11절에 엘로힘으로, 그 주어로도 나오지 않는 그 하느님이 아마르하셨다고 하는 거예요. 엘로힘으로 너희들에게 맞는 하느님을, 그 수준에 맞는 하느님을 제시해 줄게. 하느님이에요. 그거 하느님.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우리가 그 분이라고도 말 할 수 없는 그 분은 아니라고. ?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위격이 다르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one substance three persons 는 뭐냐고요? 위격이 뭔지는 아느냐고요?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는데 그게 뭔지는 아느냐고요? 위격이 뭐예요? 그런데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고 자꾸 그런 얘기들을 한다니까. 그냥 성경말씀 그대로 이해하세요. 그리고 그거라고 갖고 있으면 돼요. 삼위일체가 있느냐는 등. 없냐는 등 그딴 소리를 뭐 하려 하느냐고요?

그 우리가 담을 수 없는 피조세계, 호 코스모르는 도저히 감지도 할 수 없는 그 하느님을 우리 수준에 맞는 하느님이 오셔서 제시해주시는 건데 그 큰 하느님은 아니란 말에요. 그걸 굳이 하자면 위격이 다르다고 하잔 말이에요. 그리고 이 하느님도 못 알아먹었기 때문에 이제 진리의 하느님이 우리의 마음이 되셔서 들어오시는 걸 그래, 또 다른 위라도 하자고요.

  

우리 인간들이 어느 정도 기고만장한가 하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그 하느님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직접 내려와서 나를 위해 죽어야, 죽어 줘야 된다고 우기는 게 인간들이라니까요. nothing 들이. 하느님의 법, 그 말만 쑥 빼버리면 그냥 허깨비인 것들이 그 하느님이 인간의 탈을 쓰고 직접 와서 나를 위해 죽어줘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리고는 그게 마치 그리스도교인양.

예수님은 장차 하느님의 아들로 영원을 살게 될 성도들의 역사 속 대표이신 거예요. 하느님이세요. 그분이 왜 율법으로 오셨겠어요? 그거는 말 못하는 율법, 그저 서 있는 옛 성전. 아무도 못 알아먹어. 자연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이야기하는데,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그냥 말 못하는 이 호 코스모스, 그 역할을 하러 오신 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도 못 알아들어야 돼요

단지 그 옛 성전이 세상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그 옛 성전의 진의를 설명하시고 간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말하는 율법이었어요. 율법이 뭐예요? 말씀이 뭐라 그래요? 요한복음 11절에서. 말씀은 하느님이다. 그러죠? 그 말씀이 어디에 적혀 있어요? 성경에. 그러면 여러분 성경을 보고 아이고 하느님! 이래요? 그거 하느님이라 며요? 성경이 말하는 바잖아요? 그거 하느님이라면서? 그러니까 거기에 하느님 말씀이 적혔다고 아이고 하느님 하면서 들어가면서 나오면서 절하고 그러나요?

 

예수님이 하느님이에요. 그분은 하느님이에요. 그런데 그게 진리로 깨달아지지 않으면 성경이 쓰레기인 것처럼 그 사람에게도 예수는 쓰레기라니까요. 진리를 못 알아먹으면. 창녀들하고 술 마시는 거 좋아하고 먹기를 탐한 그냥 목수의 아들. 그것일 뿐이에요. 예수님은 성도가 어떻게 하여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가를 직접 보여주시는 분이에요. 말씀이시란 말에요.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성도의 구원의 원리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느님이 죽어서 마귀들이 살아난다? 마귀에 불과한 우리들이 살아나는 거. 이런 저급한 공식을 역사에 새기러 온 게 아니라 호코스모스의 세상. 그 율법이 죽어야 그리스도라는 영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피조 세계의 그 한계를 밝히러 몸소 오신 거예요. 그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주어진 야훼, 엘로힘의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렇게 날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만을 추억해요. 아니, 그게 나와 상관이 있어야 돼요. 우리는 그걸 알아 예수님과 십자가를 통하여 가 누구인지를 밝혀주시고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늘의 아들들이 어떤 방식으로 탄생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그 하느님을 찬송해야 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을 추억하면 안 돼요. 그러면 그만큼 나에게 또 가치를 부여하게 되고 그분을 섬기게 된단 말에요.

그 분을 섬긴다는 건 십자가 이전의 예수는 죽어야 되는데 그분을 죽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여전히 살려두고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계속 희생제사 드려야 되는 거예요. ? 영단 번에 드려진 그 제사가 이 사람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날도 계속 율법을 지켜야 돼요. 율법, 율법 그러니까 무슨 뭐 레위기의 그 율법? 아니요!

 

우리는 진리를 알았다고 하면서도 과거의 나를 절망하고 미래의 나를 희망하면서 현재를 불안하게 살아요. 그럼 여러분은 그 십자가와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그 미래에 여러분이 가야할 그곳은 뭔지는 알기는 아세요? 그거는 여러분이 소망할 것이 아니에요. 사실은. 오늘날 그게 진리로 내 것이 되어야 비로소 소망이라는 게 생기는 거지. 막연히 미래에 어디 가야할 그곳, 확실하지도 않은 그것. 그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란 말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보세요.

7,4 친애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한 몸이 되어 죽음으로써 율법의 제약에서 벗어나 다른 분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께 유용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죽었어요. 그런데 율법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 방법이 나오는데 호소마’, ‘호 크리스토스예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이런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뭘까요? 그리스도의 몸이 뭐예요? 예수예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라 그랬잖아요. 적어도 그 예수는 아닐 거 아니에요. 그리스도는 영이죠? 그리스도는 그러면, 영은 반드시 그릇이 필요하죠? 자칼과 네케바처럼.

그 그릇이 뭐예요? 여러분이 그릇이라 며요? 보배 담은 질그릇. ‘란 말에요. ‘’. 내가 그 진리를 담은 질그릇이 되어버리면 그리고 나는 질그릇에 불과한 자라는 걸 알아버면 그 때, 그 법이 나에게서 죽는다, 라는 말이에요. ‘호소마’, ‘호크리스토스. 그 그리스도를 담은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그래요. 그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바꾸면? 메시아. 메시아를 만난 자. 과거의 그 예수님, 그 분의 하신 일을 추억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이 뭔지를 내가 알아서 그것이 진리를 담고 온 어떤 모형이었다면, 내가 그것이 담고 있는 걸 알았으면 그거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사악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약속의 후손이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준 건데 아브라함이 그걸 알아버렸잖아요? 더 이상 그 아들은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그 아들을 죽이고 남편이 사는 게 출애굽기 4장의 피 남편이야기였잖아요? 그게 구원이다.

 

예수는? 그 아들의 모형이었으니까. 이사악의 모형. 예수의 모형이 이사악이었으니까. 내가 그 진리를 알면 내가 그 예수를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진리를 택하여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예요. 그 역사 속 예수를 계속 섬기는 게 아니라. 그분은 죽었다니까요. 그 세상은 죽어야 된다니까요. 그리고 다른 것으로 왔잖아요.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왔잖아요. 그러니까 그 예수를 추억하면 안 된다고요. ‘를 위해 십자가를 진 하느님. ‘를 위해 그 수모를 당한 그 하느님. 여전히 여기에 머물면 안 된단 말이에요. ‘가 뭔데? 도대체 ?

진리를 담은 예수님은 당연히 죽으셔야 했던 분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167절 보세요. 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예수가 떠나가지 않으면 진리인, 그리스도,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가면 그를 너희에게 보낸다고 그랬는데 나를 그로 보낼게내가 가서 왜? 내 얘기는 못 알아먹잖아. 너희가. 나와 함께 먹고 자고 다니면서 화장실도 같이 가고 그러면서 내가 얘기해 줬는데, 너희들이 못 알아먹잖아. 그러면 옛 성전은 당연히 없어져야지. 가야지! 어디로? 문 밖으로. 라고 쓰여 있어요. 문 밖으로.

내가 가야 그 그리스도의 영, 진리가 너희들에게 올 거 아냐? ? 내가 간다는 건 이 호 코스모스의 대표가 되어 간다는 건 너희들 전체를 지금 부정해버리는 거니까. 그게 부정이 안 되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진리가 너희에게 와? 어떻게 그게 너희 것이 되겠어? 그러니 내가 가는 게 유익 아니야? 그래요. 그리고는 내가 그로 올 거야. 그랬어요. 내가 그로 올 거야. 그가 와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뭐해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 그래요. 우리를 책망하는 거예요. ? 세상 죄가 되어 죽었으므로. 호 코스모르를 책망하는 거예요. 어떻게? 죄에 대하여, 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죄가 뭐라는 거죠? 예수가, 옛 성전이 와서 율법으로 말을 했는데 그것의 진의를 못 알아먹고 계속 희생제사 지내드리면서, 율법 지키면서 이 진리인 그분을 죽였잖아요.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게 죄야. 너희들이 내 말이 뭔지 알아먹었으면 안 죽지 그런데 그런 안 되는 거거든. 그게 죄야. 의에 대하여도 책망할 거야,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이건 아버지로 가니 예요. 아버지께 로가 아닙니다. 원어로 보면. 내가 아버지로 가니, 아버지가 뭐라 그랬어요? 아브, 하느님의 집. 내가 성전이 되면, 그리스도 성령을 담은 성전이 되면 내가 성전이, 하느님의 집이 되죠? 그때 이걸 아버지라고 읽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이야기한 거예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라고 이야기 한 거란 말입니다.

, 내가 아버지로 가면 그러면 그 전의 역사 속의 그 예수가 필요 있어요? 없어요? 진리를 설명해주는데 직접. 아버지로 가서. 너희가 더 이상 이 예수, 나를 보지 못하는 게 의야! 그러는 거예요. 나를 보지 못해야 의야. 나를 자꾸 살려내려고 하지 마! 그건 사탄이라 그랬잖아요. 왜 나를 못 죽게 해? 왜 자꾸 나를 추억하면서 나를 살려 내어서 나를 섬기려고 해? 그게 베드로였잖아요. , 사탄아 뒤로 물러가거라, 그랬다니까요. 나를 못 봐야 그게 의야! 그랬어요.

 

, 세상 임금. 이 임금이라는 말이 첫 째, 대표라는 거예요. 세상은 뭐? 호코스모르. 예수님이 뭐를 지러 왔다 그래요? 세상 죄를 지러 왔다 그러죠? 그러면 세상 죄를 짊어진 세상의 대표가 누구예요? 이 세상에 죄인 중의 괴수로 온 분이 누구예요? 그 세상 죄 다 짊어지고 갔으니까. 예수! 여기서 세상 임금이 누구? 마귀예요? 예수님이란 말이에요. 그러면서 뭐라 하느냐 하면 심판에 대하여, 라 함은 이 세상 임금으로 내가 심판 받을 게. 그러면 예수님이 세상 임금으로 심판을 받은 그 사실을 아는 그들에게 하느님이 심판 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걸 내가 알았어요. 이미. 그 사람들을 하느님은 심판 못해요. 그걸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 임금. 그게 사실은 나죠? 죄인 중의 괴수가 나니까.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나는 자격 없어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심판 받았잖아요. 라는걸 아는 나를 그 하느님이 심판 할 수 있느냐고요? 없어요. 그걸 생명이라 그래요. 그게 구원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231절 보세요. 31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이다. 이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게 되었다.여기에 엑소’, 문밖, 예수님이 영문 밖으로 나갔다 그러죠? 히브리서에서. 문밖으로 나가는 거. ‘엑소’. 이 세상 임금이 문밖으로 던져지리라. 그래요. 포도원 농부들이 아들이 왔더니 울타리 밖으로 던져 버렸죠?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세상 임금이 문밖으로, 옛 성전 문밖으로 던져지리라. 라 그래요. 32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 , 그 세상 임금으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던져질 텐데 내가 땅에서 그렇게 들리면)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수 있어, ? 그게 씨 심는 죽음이니까) 33 이것은 예수께서 당신이 어떻게 돌아가시리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자 세상 임금이 누구? 자기란 말에요. 지금.) 34 그 때에 군중이 '우리는 율법서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사시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영원하대. 그러니까 넌 죽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런데 선생님은 사람의 아들이 높이 들려야 한다고 하시니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는 거예요?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봐버리면 우리를 위하여 죽으러 온 그 하느님으로 보고 그걸 섬기려고 하면 이분은 죽으면 안 되는 거예요. 내 섬김의 대상이 되는 거니까. 그러면 요 바리새인 같이 된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들이 예수 때려 죽였잖아요. 그리스도는 죽으면 안 된다며? 그러잖아요. 지금? 나는 가서 그리스도로, 아버지로 와야 되는 거지. 지금 내 말을 너희들은 하나도 못 알아듣잖아. 그런데 내가 안 가면 어떻게 되겠어? 내가 계속 남아서 가르친다고 그거 알아듣겠어? 그럼 내가 가야지. 나를 죽여야지. 내가 너희들이 되어, 이 호코스모스 모형이 되어 죽어야 그 진리가 오롯이 밝혀지고 드러날 거 아냐? 그러는 거예요.

 

묵시록 132-3절 보세요. 2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같았는데 그 발은 곰의 발과 같았고 그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습니다. 그 짐승은 그 용으로부터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받았습니다. 3 그 짐승은 머리 하나에 치명상을 입어서 거의 죽게 되었었지만 그 상처가 나았습니다. 이것을 본 온 세상 사람들은 놀랍게 여기며 그 짐승을 따라 갔습니다.

여러분이 그 율법에 여전히 묶여 있으면 여러분은 하느님을 용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 예수를 짐승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라니까요. 그러면 보세요, 죄인 중의 괴수. 세상 임금인 내가되어서 세상 임금으로 예수가 죽었어요. 나에게 세상 임금이 있어요? 없어요? 이제. 그런데 뭘 두려워해요? 왜 여러분에게 마귀라는 게, 사탄이라는 게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돼요? 세상 임금이 죽었다며? 그런데 왜 세상 임금의 종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죽었다면서? 안 죽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에요? 세상 임금이 죽었다면서? 성도들에게만 그 세상 임금이 죽었어요. 그래서 자유예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임금 아래에서 율법의 종노릇 하게 되어 있어요. 잘 알아듣고 계신 건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니까. 제발 잘 들으세요.

 

세상의 임금, 짐승, 용 같은 건 뭐 여러분을 괴롭히는 어떤 그런 거 아니에요. 밤에 이상한 거 보는 거 그거 밥 잘 안 먹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그런 거 혹시 나타나면 저한테 보내세요. ? 그렇게. 그런 거 없어요. ? 없다니까. 모르니까 당하는 거예요. 모르니까. 모든 게 다 그래. 모르면 당해요.

그러면 십자가가 서기 전에 구약시대에 어떻게 구원 받아요? 그 진리를 깨달아 구원 받아요. 그 진리를 십자가로 설명해준 것뿐이지 그것 자체가 우리를 구원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진리 깨닫잖아요. 깨닫고 아 그거, 그 예수, 그 십자가? 모리아 산에서 죽여야지. 그거. 그렇게 구원 받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의 실체인 그거는 못 본 거 아녜요? 십자가는. 그러나 증거는 받았잖아요. 하느님의 글로. 히브리서 저자가 그 얘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로, 우리가 훨씬 유리하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그 예수가 진짜, 그 하느님이 진짜 죽으셨는데 우리가 그 진리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그들은? 거짓말쟁이라는 거 아니에요? , 그 실체가 직접 왔는데 우리가 그게 안 됐는데 걔네들이 그거 헛소리 한 거 아니냐? 이게 히브리서의 논리에요.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온전하지 못 해. 이랬어요. 심지어 하느님도 거짓말쟁이 인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인이 안 되면. 진리가 안 되면. 그래서 주님이 아브라함이 나를 봤다, 그러는 거예요. 진리를 봤다, 라는 거예요. 내가 담고 있는 진리를 그가 봤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 하 아담’ ‘하 벤’, 그 인자의 라인이 전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이지만 무트로 끝나요. 무트. 그리고 와우 계속 형, 현재 진행형이에요. 아니, 옛날 사람인데 죽었더라, 라고 완료나 과거로 써야지 왜 그들이 죽고 있다, 라고 쓸까요? 죽던데? 이렇게? 그들이 계속 그 다나토스의 무트예요. 지금 말씀으로 완성되는 죽음을 죽었다는 거예요. 그렇게 죽으면 결국 사망에 이르면 어떻게 돼요? 다나토스에 이르면? 진짜 사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야. 나는. 그런데 죽었잖아요어떻게 죽었어요? 무트 다나토스로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진짜 산거니까, 나는 산 자의 하느님이야. 하느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 죽음을 죽는 거예요. 예수가 바로 그 죽음을 죽은 거라니까요. 아니 그건,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에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 생명력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죽어가는 거예요. 없어지고 하느님이 영광과 능력만 찬송 받아지는 것. 그 죽음이, 그 다나토스의 죽음이 가득찬 곳이 천국이라니까요. 하느님이 그렇게 죽으시는 분이에요. 자기를 비워서. 그런데 하느님이 왜 죽으시느냐니요? 안 죽으면 안 된다니까요. 죄가 나고, 내가 죄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걸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그 죄를 밖으로 터져 나오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들만 그걸 감지해요.

 

다른 이들은? 나 잘했죠? 라고 한다니까요. 성도만 그 죄를 낳아요. 그리고서는 아, 이게 죄야? 율법에 탐심이 죄라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몰랐을 뻔했네?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맞구나! 그게 뭐예요? 나의 사망이에요. 다나토스. 그러면 그게 사는 거예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완성되어 사망을 낳고 그게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사요. 거기서 사는 거야. 생명이야. 하는 말이 갖고 있는 내용이란 말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어줍잖은 그 얕은 수준에서 갖고 있던 그거는 빨리 깨버리세요. 그래야 하나라도 더 이해가 가요. 그거 붙들고 있는 한 자꾸 이걸 튕겨내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이 그 인본주의와 율법주의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리를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 왜 율법, 에피뚜미아가 죄를 낳게 하시고 그 죄는 사망을 낳고 그 사망이 곧 우리의 선물이며 영생인지 아시겠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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