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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9.10)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10 조회수1,617 추천수6 반대(0) 신고

 


 2018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제1독서 1코린 5,1-8

형제 여러분,

1 여러분 가운데에서

불륜이 저질러진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이교인들에게서도 볼 수 없는

그런 불륜입니다.

곧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2 그런데도 여러분은

여전히 우쭐거립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슬퍼하며,

그러한 일을 저지른 자를

여러분 가운데에서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나는 비록 몸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것과 다름없이,

그러한 짓을 한 자에게

벌써 판결을 내렸습니다.
4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6 여러분의 자만은 좋지 않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린다는 것을 모릅니까?

7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

복음 루카 6,6-11

6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7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8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10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11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를 많이 이용합니다.

저 역시 새벽 묵상 글을

공유하기 위해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친구가 되어서

함께 해주십니다.

우연히 어떤 분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가 너무 많은 친구의

숫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분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저처럼 글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상의 사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사진뿐인 이분의 일상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왜 방문해서

 볼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특별한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고,

좋은 글을 남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진을 통해

“저는 이렇게 예쁘게

 잘 지내고 있어요.

저 좀 봐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의 일상을 보러온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해하기가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남의 일상을 왜 알려고 할까요?

나의 일상과 다를 수밖에 없는

남의 일상에 대해

굳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자신의 일상을 멋지게

 만들기 위해 남의 일상을

보시는 분은 적습니다.

그보다는 자신과 비교를 하면서

 스스로를 비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비판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이렇게 남의 일상을 알고자

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안에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들은

 쓸데없는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알아야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데,

쓸데없는 것을 알려고

 노력하다보니 시간낭비뿐만 아니라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알려는 것이 아니라,

고발하기 위해서 즉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알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중요한 것도

보지 못합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계명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예수님을

고발할 마음만 갖게 됩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 같은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열심히

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단죄하려는 부정적인

마음이 쓸데없는 것에만 관심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골이 잔뜩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하느님의 뜻을 알려는 삶,

그 삶을 통해 우리는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온갖 기적 속에

파묻혀 살면서

그걸 알아보지 못한다.

 파란 하늘, 흰 구름,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아이의 눈동자,

그것들을 보는 우리의 두 눈,

이 모두가 진짜 기적이다.

(틱낫한)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지(진례성당)

43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지(진례성당)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1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입교 후 부친 박민혁과 형제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를 만나게 됩니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힙니다.

박대식은 경상 대구 감영에서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면서도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지켰고,

혹형을 받아 뼈가 부러지고

몸이 뒤틀렸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했습니다.

가족들이 면회를 왔을 때는

험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몸을 가렸다고 합니다.
1868년 8월 27일(음)

조카 박수연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치명했습니다.

 당시 박수연은

예비 신자 신분이었습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모셔 와 선산에 모시려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인들이 반대하자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 삼 형제와 형제들이

마을 뒷산인 챗골

유씨들의 문중 산에 평장

(시신을 화장 후에 유분을

보관하지 않고 자연으로

회귀하는 뜻으로 빨리 썩도록

나무유골함 같은 것에 넣어

 땅에 묻는 방식)

으로 매장했습니다.
그 후 120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하여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습니다.

이때 순교자의 세례명이

명확하지 않아 세례명이 임시로

 ‘노렌죠’라고 명명했으나,

2001년에 순교자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을

밝혀내게 되었습니다.
주소는 경남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 30이고, 관할 성당은 진례 성당으로

전화는 055-345-3226입니다.

 

 

마산교구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지(진례성당)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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