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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완전할 때에 도살할 양으로 죽는 자면 (로마8:36-39)|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11 조회수2,167 추천수0 반대(0) 신고

 

 

완전할 때에 도살할 양으로 죽는 자면 이김으로 살아난다는 불편한 진실

(로마8:36-39)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모든 피조물이 전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으로 창조가 된 거고 그치요? 그리고 천사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라는 뜻이잖아요 앙겔로스가. 뭐 닭 날개 달린 어떤 존재가 아니란 말이에요.

천사는 영이라며요. 그래요 영이 말이라면서요. 뭐 천사들이 나중에 우리를 수종든다는데. 그러면 그런 천사의 수종을 받아야 비로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존재면 그런 존재가 무슨 천국에 아들입니까? 그런 수종을 바라세요? 그건 우리가 원하는 이 육신이 원하는 편안함 아닙니까? 근데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까요 진리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런 천사가 도대체 우리에게 뭐, 사탄이라고 해도 좋아 그게 무슨 거치는 돌이 되겠냐고요. 우리의 가는 길에. 그리고 다나토스, 죽음이 거기에서 단수인데. 다나토스가 단수로 쓰이면 예수의 죽음이에요.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의 완성으로 죽은 그분. 그것도 그리고 생명 '조에'. 그것도 그 생명을 우리의 목숨 정도로 밖에 이해 못해요. 안다고 하지만 그게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런데 우리가 갖고 있는게 이거니까 이걸로 설명을 해 주는 거 아냐 생명을. 그러니까 그것도 그리고 깊음이나 아니면 현재 일이나 이 피조물들이나 그리고 장래의 그것도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두려움의 대상이 되며 무슨 거리끼는게 되겠느냐 이 말이에요. 그건 다 우리에게 그 진리를 설명해 주기 위해 하느님이 동원하신 관념들일 뿐이란 말이에요. 개념들일 뿐이란 말입니다. 소재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생명, 죽음, 천사, 피조물, 이런 것들을 우리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정의된 그런 우리가 가진 사전적 정의로만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항상 불안에 떨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도대체 천국에서는 어떤 생명으로 살게 되는지? 또 어떤 존재로 살게 되는지? 천사는 우리를 위해서 수종들게 하기 위해 만든 존재라는데 그건 대체 어떻게 생긴 건지? 에제키엘서에 보면 날개가 여섯 개도 있다고 그러는데, 그거 징그러워서 어떻게 같이 살겠습니까? 이게 그 말이겠어요? 그리고 걔네들이 또다시 반란 일으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나리오 대로라면. 그런 말 아니란 말이에요 성경이 말한 내용은. 아직도 이솝 이야기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천국에도 이런 피조 세계가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영교 같은 혼령들이 꼬마 유령 캐스퍼 같은 것들이 돌아다니는 그런덴지. 불안하지요 솔직히? 아니면 관심이 없던가.

둘 중에 하나라니까요 여러분은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우세요? 그러한 것들이 어떠한 모양으로 주어지든 아무 상관없이 그런 자유를 지금 갖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중에 천국이 우리가 원하는 그런 그림으로 우리에게 안 주어져도 지금의 이 자유로 어디에 가든 여러분이 가는 곳이 천국이어야 된다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만약에 자기가 그리는 그런 곳이 아닌 다른데 갖다 놓으면 그곳이 천국이라 할지라도 여기 뭐야? 지옥이잖아! 이럴 거라니까요. 그게 안되면 지금 근사하게 연극은 할 수 있을망정 굉장히 속으로 불안할 거란 말입니다. 그건 여러분에게 반드시 하나로 지금 이해되어져서 마음이 되어져 있어야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에게는 need 라는게 있지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게 이런 need 가 있어요 뭐냐면, 배고프면 먹어야 되고 졸리면 자야 되고 추우면 걸쳐야 되고 하는 이런 아주 기본적인, 이건 동물들도 다 갖고 있어요 그치요? 그런데 동물들은 이거( need ) 이상 원하지 않아요. 사자들이 이 초원에 소가 수백 마리 돌아다닌다고 해서 자기가 배고플 때 소를 두 마리 이상 잡는거 보셨습니까? 자기가 먹을 만큼 잡아서 먹고 남은 것은 독수리에게 주고 떠납니다. 저금하지 않아요. 인간들만 보이는 족족 다 죽여서 썩히더라도 저축합니다. 근데 그렇게 자기가 필요한 것 이상의 그 잉여까지도 자기의 소유로 가지려고 하는 그거를 demand 라고 한단 말이에요.. 이거는 사실 우리에게 꼭 필요한거 아니잖아요. 짐승들은 필요로 만족하며 사는데 유독 사람만 이리로 간단 말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아기 때 여러분, 인간들만 나면서부터 아예 무력자로 시작이 돼요 그죠? 다른 짐승들은 나면서부터 걷습니다. 나면서부터 지가 음식 먹고. 근데 인간만 그냥 나면은 속수무책이야, 그치요? 안 먹여주면 죽어요. 사람만 하느님의 아들이 될 자격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사람이란 존재는 내가 먹이지 않으면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하고 그때 하느님이 뭘 먹여 기던 자리에서 서게 하는게 인간이란 말이에요. 이게 구원이라고 한단 말이지요. 근데 인간이 나자마자는 하느님이 그렇게 먹이는 대로만 먹어요. 고 상태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상태인 거예요. 그래서 이때에는 그 어떤 다른 욕구도 need 이상 그에게 필요치가 않아요. 그래서 애기들은 배고플 때 뭐 주면은 먹고 쌔근쌔근 잔다니까요. - 내일 집세를 뭐 어떻게 내야 되는지? 내일 주가가 올라갈까 내려갈까? 이거 고민 안 한단 말이에요, 애기때는. 그러니까 필요한 것만 딱 먹고 마는데 이 애기들이 어떠한 요것 이외에 사물들을 인식을 하고 그 사물들이 호코스모스가 뭐라고 그랬어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 게 말 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말이라는 게 그 아이에게 하나하나 주어지게 되면 그때부터 need 에서 이리로 (demand) 간다니까요. 그때부터는 꼭 필요한 이게 (need) 아닌 어떤 다른 그 잉여의 어떤 것까지도 추구하게 돼요. 그러면 요 demand 에서 요거를 빼면 desire 라는 거예요. 이게 락캉의 이론인데, 사람들은요 요기까지 밖에 몰라요. 도올 선생도 요기까지 밖에 몰라요. 근데 보면은요 요 desire 욕망이라는 건 뭐냐면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왜 우리가 꼭 필요한 이거 ( need ) 이외에 다른 어떤 것들을 욕망으로 갖게 됩니까? 내 주변에 있는 나 말고 타자들의 어떤 욕구, 나를 향한 요구들이 있어요 그죠? 그것들을 내 요구로 이 사람이 수용해 버리게 되면, 그걸 타자의 답론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이들의 기대라든지 이런 평가라든지 시선을 내 걸로 받아 버리면 그 사람은 반드시 욕망을 갖게 된다니까요. 그러면 노자도 그렇고 락캉도 그렇고 여기서 끝이에요. 분석은 잘해놨지요. 그래! 근데 뭐.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인제 그때 성경이 말하는게 뭐냐면, 진리가 말하는 게 뭐냐면, 그러면 니가 알고 있는 그 말을 깨라는 겁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그 세상, 그 말, 그게 뭔지를 알아 그걸 깨버리고 그걸 벗어나면 너는 충분히 여기에서 만족할 수 있다라는거에요. 근데 이거는 하느님이 주는 거래니까요. 근데 우리는 다른 이들의 그런 기대나 평가나 그런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왜? 내 육이 살아 있어서. 그래서 말씀은 뭐 하는 거냐면 그 육을 죽이겠다라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근사하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그래서 바오로가 본문 36절에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바오로가 그 구절의 앞뒤로 진열해 놓은 환란, 기근 , 핍박, 적신, 위험, , 죽음 , 생명, 천사, 높음, 깊음, 현재일. 장래일, 피조물, 이러한 것들은 우리 육신이 여전히 살아 있을 때에만 우리에게 걱정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기대와 희망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도살당해 죽었다는 것이 확실한 사람에게 그러한 것들이 의미와 가치를 상실해 가는 거에요. 물론 한순간에 되는게 아니에요. 그러나 이걸 깨달음으로 갖고 있는 이와 그걸 깨달음으로 갖고 있지 못한 이들에게 똑같은 현실이 닥쳤을 때 대처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진다니까요. 여러분이 금방 성인군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성경이 성도에게 이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카이로스를 분명히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해요. 예수님이 다 하셨으니까 이제 너네들은 막 살어! 이게 아니라 너희는 이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육신 안에서 쉬운 말로, 육신 안에서 그 영의 삶을 반드시 경험해야 된다 그래요.

 

진리는 여러분이 경험하지 못하면 그건 남의 진리에요. 아세요? 그게 무슨 진리에요 나와 아무 상관없는 게. 그게 동시에 양자를 다 사는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다 사는걸 '샤네'라고 하는데, 그렇게 우리는 그 둘을 다 살아야 해요. 그러면 그 둘이 뭐냐면, 여러분이 이 역사 속에서 죽고 다시 살고, 하늘이 되고 다시 내려오는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감지가 되고, 인식이 되고 경험이 돼야되요.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면서요? 연합했으면 예수와 함께 죽은 거네요. 무수히 읽어 봤자나요.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 그러면 죽은 걸로 끝이에요? 예수님은 다시 살았잖아요. 승천하셨잖아요? 여러분 안으로 다시 오셨지요? 그럼 부활, 승천, 재림 다 된거 아니에요? 물론 나중에 완전한 그때에 그분이 확 나타나실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 육신과 시간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건, 그거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인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됐다면, 그게 여러분 거가 돼야 되지요? 그러면 여러분 인생 속에서 일어나야 된다니까요. 언젠가 있을 재림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언젠가 있을, 내가 승천할 그 일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나는 천국에 갈꺼야가 아니라. 주님은 그랬잖아요. 천국은 너희들에게 내려오는 거라고. 우리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거기로, 성경의 진술은. 그러면 그게 여러분에게 경험이 되냔 말이에요. 그게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같이 사는 거 아닙니까? '솨네' 잖아요 그것이.

로마 63절 보세요. 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연합이에요 이게 )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 함께 죽었네요 그치요? )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 완전히 죽었습니다. 그지요? )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 걸어가게, 어디를? 이 인생을 새 생명으로 걸어가게 하기 위해 어떻게? 살려서,) 그걸 반드시 인생 속에서 여러분은 살아난 경험을 해야 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생명으로 걸어가야 되는겁니다. 그걸 세례라 그래요. 그걸 올바로 안 사람에게 물세례가 의미 있어요? 그거 안 받아도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난 군데에서 한 3번 받았는데. 사람이 하두 많으니까 호수로 막 뿌려줘요 ^^ 실지로 그런다니까요. 여기 군인도 계시잖아요, 이게 뭔가!! 그래도 빵 주니까 매주 가는 거예요. 받고 또 받고. 받으면 빵하고 요구르트 줬거든요. 그게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게?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된 거지요. 그분은 살았으니까. 그러면 우리도 같이 산거예요. 그러면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부활은 경험된 겁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죽었고 주님이 영으로 살아나실 때 다시 살아난 거예요. 그렇게 살아난 자들은 육신을 입고 있다 할지라도 새 생명 가운데서 그들은 걸어간다는 거예요. 육신을 입고 사는게 크로노스인데 카이로스가 그 인생에서 같이 경험 되는 거예요. 바오로가 그 성도의 부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죽은건 해결됐어요 이제.

고전 1542-47절입니다. 42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3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44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 육의 몸이 죽고 영으로 살았는데 그에게 여전히 육의 몸도 있어요. 근데 그 몸 안에 신령한 몸이 있어요.) 45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47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부활이 뭐예요? 육의 몸, 쏘마푸쉬케코스 거든요. 푸쉬케는 목숨이 달린 그냥 생명이 아니라 이 목숨, 목숨이 달린 기식하는 것이에요. 그걸 푸쉬케라 그래요. 노아의 홍수 때 다 죽은게 기식하는 거지요. 그냥 푸쉬케에요 그것이. - 육의 몸이 죽고 신령한 몸이 뭐냐면 푸뉴마틱코스에요. 영적인 존재라는 뜻이에요. 영은 말이고 그 말이 뭔질 깨달은 존재를 푸튜마틱코스라고 그러는데 푸쉬케코스로 죽고 푸뉴마틱코스로 사는걸 부활, 아나스시타스 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건 일차적으로 예수라는 그 율법의 죽음과 그리스도라는 영의 살아남, 그 진리로의 살아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함께 죽은 우리의 육과 그 육안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이 된 그 진리의 말씀 있지요? 성경이 그게 생명이라고 그러잖아요. 그것을 가리키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45절에서 첫 사람 아담을 뭐라고 그러냐면? 푸로토스안트로포스 아담, 그 창세기 때 그 아담 이야기하는 거죠. 근데 그 아담 안에 우리도 들어가 있는 거잖아요. 아담이라는 단어 자체가 붉다, 죄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냥 사람이란 뜻이에요 그게. 그걸 뭐라고 그러냐면 '푸쉬케 자오' 라고 그래요 산자. 그냥 푸쉬케 목숨만 붙어있는, 히브리어로 바꾸면, '하이' 지요. 살려둔 것, 진리로 살리거나 아니면 죄인으로 멸망시키거나 하기 위해 그냥 살려둔 상태를 '푸쉬케'라 그래요. '네페쉬 하이' 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고런 푸쉬케의 상태. 첫 사람 아담은 그 상태인데 육이라고 그러지요. 근데 마지막 아담, 에스카토스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해요 '푸뉴마 조 포이에오' 에요 이거는요. 완전히 다른 거지요.

 

첫사람 아담은 살려둔, 살아있는 네페쉬 푸쉬케 에요 목숨만 붙어있는. 근데 마지막 아담, 에스카토스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영이라고 그래요 영. 그러니까 살아 있다라는건 그가 영인가 아닌가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 영은 곧 말씀, 진리라고 하니까 그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나는 살려 주는 영이 되지요 왜? 내 입에서 그 열매가 맺힐 거니까.. 내가 바로 그 양식이 될 거니까.. 그러면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의 이야기는 그때 그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일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안에 그 첫 사람인 아담이 육으로 존재하고 그 마지막 아담이 영으로 존재한다니까요. 그러나 그 영에 의해 이 육은 함몰되어가기 시작 한단 말이에요.

예수가 그랬잖아요. 예수가 육으로 와서 영으로 살아나셨어요. 그랬더니 그의 육이 이 진리에 의해 재해석 되자 이거는 없어지는 거죠 삭제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냐면 내가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안에 들어있는 여러분도 그 처음과 마지막을 여러분이 갖고 있는 거라니까.. 그게 알파요 오메가라는 뜻이에요. 알파라는 단어 자체가 시작이에요 시작. 예수님이 내가 알파요 오메가고 내가 시작이요 나중이다라고 한게 그런 말이란 말이에요. 내 안에서 다 일어난단 얘기에요. 여러분 안에서 그게 다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그게 아담이라니까, 사람이라니까요 그것이. - 이건 순서란 말이에요. 반드시 육 있는 자에서 시작을 해서 그 육이 죽는 경험이 전재해야 되고 그다음에 신령한 자의 출현이 과정으로 있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선악과에서 출발해서 생명나무로 가야 되는 거고, 율법으로 시작하여 진리로 가야 되는 거고, 죄인으로 시작하여 의인으로 가는 거예요. 그렇게 안 될 수도 있었는데가 아니라. 여러분도 지금 이제 부활한 거 맞네요. 아나시스타스, 아나시스타스 단어 자체가 위로 이스테미, 똑바로 서다니까. - 그거구나라고 위로 똑바로 서면 그걸 부활이라고 하니까. 여러분은 부활 한거잖아요. 그래야 주님이 우리의 머리라는 명제가 참이 될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다. 땅이 뭐예요? 그 하늘을 설명하기 위해 준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거기에 호 라는 관사가 붙으면 호게 하면 항상 성전이에요. 첫 사람 아담은 그 성전, 그 율법, 땅에 속한거지만, 마지막 아담은 하늘에서 난거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너는 거듭나야지, 위로부터 나야지! 할 때 그게 아나 그쵸? 아노뗀 그게 위로나다 라는 말이잖아요. 그게 하늘에서 낳다 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냥 막연히 여러분이 추측하여 그냥 상상하여 정의할 것들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거는 그냥 명쾌하게 해석이 되는 거라니까요.

그렇다면 주님이 승천하실 때 우리는 어디 있었어요? 역시 그 안에 있었어야지요. 그러면 여러분도 승천한 게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승천하냐구 여기 있는데. 그럼 먼저 이거부터 물어볼게요. 승천에서 그 하늘이 어디예요? 저기 토성 뒤에 있는건가? 아니면 ,,,,,,,,명 명왕성 뒤에 있는건가? 어디 있어요 거기요? 만약에 그런 공간 안에 있는 거기라면 인간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요. 로케트 할아버지를 만들어서라도 거기 간다니까 인간은요. 적어도 그 하늘은 그런 곳은 아니어야 해요. 그래서 인간들이 그들의 능력과 그들의 노력으로 절대 도달하지 못하는 곳이어야 돼요. 그게 하늘이에요. 근데 여러분이 언제 거기 갔냐구요?


그 승천이란 단어, 아날렙씨스 라는 단어가 아날남바노 에요. 무슨 말이냐면, 쉽게 풀어서, 위로 넘겨지다 이런 뜻이에요. 위에다 두다 이런 말이에요. 하늘로 올라가다가 아니에요. 하늘이란 말도 없고 그냥 위로 넘겨주다, 위로 두다, 위에다 두다 이런 말이에요. 아날남바노.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위의 존재가 되었으면, 아랫것으로 그 위에 것을 알아 위의 존재가 되었으면 여러분이 승천한 거예요. 위에 두워진거에요 여러분이요. 고린도후서 122절 보세요.

2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교인 하나가 십 사년 전에 세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 간 일이 있었습니다. -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

몸 안과 몸 밖이 그 하늘에,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갔더니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는 얘기에요.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여러분이 가고 싶은 곳이 여기 아니에요? 거기에 갔더니 뭐가 있어요? 말할 수 없는 말, 사람의 말로는 말이 되지 않는 말 이란 뜻이에요. 그 말이 있어요.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원하는 그런 것들이 있는게 아니라. 하늘에 올라갔더니, 낙원에 갔더니, 사람의 말로는 말이 되지 않는 그 말이 있어요. 그 말이 내게 들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하느님께서 하늘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 첫 번째로 준 하늘이 뭐지요? 하늘을 담아 준게? 성전, 율법입니다. 그래서 호우라노스 하면 단수로 쓰면, 그 성전이에요 그것이요. 창세기 때도 그러잖아요. 레시트 바라 엘로힘 에트 솨마임 에트 에레츠 가 뭐냐면, 내가 땅으로 그 하늘들을 만들기 위해, 설명하기 위해, 내가 엘로힘을 담아서 그것으로 너희들에게 창조를 했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면 거기서도 하늘들, 복수거든요, 그 하늘들은 땅이 뭔지를 알아 그것을 마음으로 가지면 그들을 하늘들이라고 그래요. 하늘이라는 단어 자체가 솨마임 이잖아요. 그 단어가 파자하면, 하느님이 분석하여 말씀을 주시는데 진리로 준다 라는 뜻이, 하늘이에요. 그걸 반으로 잘라버리면 하고 마임이니까, 거기에 물이 있다, 진리가 있다, 그것이 하늘 이란 말이에요. 거기에 진리가 있네요. 여러분 마음 안에. 그러면 여러분을 하늘이라 그래요.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라고 얘기 한단 말이에요. 그것이 나를 낳는 진리의 말씀이 되면 그게 내 아버지가 되니까. 그럼 그게 하늘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하늘로 오신 분이 누구지요? 내가 말 못 하는 성전으로 너희가 오해를 하기 때문에 이 성전이 왔다라고 이야기하는 두 번째 성전이 예수잖아요. 근데 그것도 못 알아먹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세 번째 성전으로 온게 뭐예요? 우리에게 그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파고들어 왔단 말이에요. 그걸 세 번째 성전이라고,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냐면, 이 성전은 헐어. 두 번째 나를 헐으라는 얘기에요. 내가 이 첫 번째 성전으로 온 거니까 나도 헐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세 번째로 사흘 만에 가 아니라 세 번째로 세워줄게라는 뜻이에요. 어디 안에? 니 안에.

그래서 바오로가 뭐라고 그러냐면, 니들이 성전이잖아 그러잖아요. 고린도후서에서. 너희들 안에 성령 있잖아. 너희들이 성전이잖아 이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그 세 번째 성전이 됐어요. 그러면 세 번째 하늘이네요. 그 세 번째 하늘에 바오로가 두어졌어요. 아날남바노.

그렇게 세 번째 하늘로 두어졌어요. 넘겨졌더니 어떤 일이 일어나요? 사람의 말로는 말이 되지 않는, 은혜는 무슨 개뼉다귀 같은 은혜냐! 이러잖아요 사람들이. 말이 되지 않는 그 말이 내 귀에 들리더라는 거예요. 그걸 세 번째 하늘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면 자기가 거기에 갔다 왔다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럼 승천했다는 얘기 아니에요 이 사람은. 그럼 여러분은? 말이 하늘이 된 거지요. 그럼 그걸 승천이라고 그래요. 아날남바노. 그럼 승천하셨네요. 꼴까닥 갔단 얘기가 아니라.

그러면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를 가지게 된 성도들이 이웃들에게 자기 안에 그 아버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그에게로 가야 돼요. 하늘에서 그에게 가야 되지요? 이걸 파루지아 라고 그래요. 재림이라고 그러지요 성경에서, 강림이라고 그러지요. 파루지아 라는 단어 차체가 파라 에이미예요. 그러니까 옆에, 에이미가 be 동사니까 옆에 있다 이런 말이에요. 나타났다. 멀리 있는거 같았는데 옆에 있네! 나타났네! 어느 정도 가까이 옆에 있냐면 내 안에 내 마음으로 내 말로 있다고 그래요 성경에서.


그러면 그게 감춰있던 그게 내 옆에 있네! 내 안에 있네! 내 말에 있었네! 라고 알았을 때 그걸 재림이라고 그래요. 예수님이 멀리 저 - 하늘로 가신것 같았는데 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뭘로? 영은 말이니까, 말로, 진리로 들어와 버렸단 말이에요. 그걸 뭐라고 그러냐면 성경이, 강림, 재림, 파루지아 라고 그래요.

나타나 버렸어요 내 안에. 그 이 나타남을 경험하지 못한 이는 나중에 그분이 나타났을 때 저게 뭐야? 그럴꺼라니까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내 밖으로 강림하는 그분을 보면 심판입니다. 여러분 밖에 그분이 존재하고 그분이 여러분에게 백마를 타고 오면 여러분은 심판이에요. 죽습니다. 내 안에 그분이 나타나야 된다니까요. 그걸 파루지아라고 그래요. 여러분이 이웃들에게 가서 그 진리를 내 말로 전해주면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 안에 그게 마음으로 들어가지요. 그러면 내가 그에게 재림한 자가 되는 거예요. 어디서? 하늘에서. 그러면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로 경험 되는 거예요.. 그렇죠?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과 무관한, 내가 주워들은 진리는 내 진리 아닙니다. 그냥 소문으로 들은 거예요. 그게 내 것이 되어야 나에게 진리고 그게 나의 생명이며 그게 나의 구원이 되는 거예요. 근데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도 그냥 제 말을 듣는 거예요.. 그걸 마음으로 갖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아요.

 

베드로후서 33절 이후보세요. 3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곧 마지막 시대에 ( 말세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오시면 그때부터 말세다 그래요) 자기들의 욕정을 따라 사는 자들이 나타나서 여러분을 조롱하며 (에피뚜미아의 마음을 쫓아 행하며) 4 '그리스도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게 재림이에요 파루지아) 그 약속을 기다리던 선배들도 죽었고 모든 것이 창조 이래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지 않으냐?' 고 말할 것입니다. ( 언제 오니? 조상들이 잔 후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부터 그냥 있다 하니, 지금 이것을, - 미련한 놈들, 이걸 어떻게 강림을 부인하고 있어! 그렇게 남을 욕할게 아니라 지금 내 안에 일어난 그 파루지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언젠가 올 그 파루지아를 기다리고 있는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요. 언제와? 이거? 내 안에 와 있다며요. 뭘 언제와? 이러고 있어.) 5 그들은 아득한 옛날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서 땅이 물에서 나왔고 또 물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부러 잊으려 함이라는 말은 깨닫지 못 했다 이런 말이에요. 이 말이 맨 앞에 나와 있어요. 이 문장에.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저희가 깨닫지 못했다 뭐를? 하늘이라는 건 옛적부터 있는것 그 안에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거고 땅이라는 것도 바로 그 마임. 물에서 나와 그 물로 존재하는 거,, 뭘 하기 위해? 그 물이 가리키는 생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존재하는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게 말씀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는 주님이 언제 와?? 이런 질문이 당연히 들 거야!! 이런 말이에요.

6 그리고 물에 잠겨서 옛날의 세계는 멸망해 버렸습니다. 7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느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자 하늘과 땅은 그게 뭔지를 모르는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왜? 그거 안에 진리가 들어 있는데 못 알아먹으니까 그때까지 반드시 놔둬야 되는 거야. 근데 마지막 때가 되면 그 하늘과 그 땅이 도르르 말려 없어져 버리지요. 필요 없어요 그때는. 이제 진리가 된 이들, 마지막 그 사람까지 승천, 하늘이 되어 버리면 그때부턴 옛 하늘과 옛 땅은 필요 없다니까요. 도르르 말려 올라가는 거예요..

 

따라서 재림이라는 건 우리 곁에 와 있는 눈에 보이는 모형들과 그 말씀들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들을 수 있으면 그 존재가 우리 가까이에 와 있는 재림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진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때 우리가 그 옆에 존재, 나타난 존재, 나타내는 존재, 파루지아의 존재가 되는 거예요. 또 앞뒤 뚝 잘라 갖고 내가 재림, 뭐 이런식으로 얘기 해 버리면 이단 나오는 거예요. -^^-

 

설명할 수 없으면 말을 말아요. 그렇다면 육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은 우리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거고 그것을 연합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한 사람이 누리는 그 자유, 부활, 승천, 재림, 이러한 것들을 이미 육신 안에서 영으로 경험 하고 있는 그 사람에 그걸, 무엇이 파괴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말이에요. 바오로의 말은.

지옥의 불길이 그 자유를 막겠느냐? 아니면 천국의 화려함이 그를 미혹 하겠느냐? 어떤곳에 갔다 놔도 괜챤은 거에요. 그 사람은 이미 환경이나 조건이나 맞닥드리는 일과 상관없이 영으로 누리는 자유를 가진 사람인거죠. 그런 사람이 죽장에 삿갓 쓰고 팔도를 거렁뱅이처럼 돌아다니면서 슬프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아! 천년의 근심으로 사는구나! 이렇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사람들이 아둥바둥 살아가는걸 보면 참 백년도 못살면서 저렇게 천년의 근심으로 살아야 되나? 언제 부터인가 우리의 마음에 그런 측은지심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 그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인거고 그 사람이 약속이 된 사람이니까 언약이 성취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이 가는 곳이 약속의 땅이 되는 거예요. 그 땅이 어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주님이 그래요. 니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거기에 들어가서도 너희들이 이 진리의 말씀이 뭔지 모르면 거기가 애굽이다 그런다니까요. 거기가 미스라임 이야. 무슨땅이 무슨 소리야. 약속의 땅이 천국이잖아요. 약속이 된 사람들이 선 곳이 천국이라니까요. 그래서 주님도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헛소리 하지마, 그 안에 있어. 천국이 어딨어? 여깄어? 저깄어? 아니 그 안에 있어. 그런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이 그려놓은 그 지옥 같은 환경에 떨어져도 그 자유로 살꺼고, 천국 같은 환경에 넣어 놔도 마음을 뺏기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그런 곳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의 이성으로 그려 낼 수 있는 천국 있지요? - 이렇게 좋을꺼야 거기는. 이런것도 이루어지고 이렇게 맛있는것도 많을꺼야! 고거는 인간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천국이에요. 여러분이 이성으로 그려낼 수 있는건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거라니까요. 하느님이 말씀하신 천국이 그 정도겠습니까? 그렇게 이 크로노스의 역사 속에서 카이로스를 사는 그를 세상이 감당 하지 못하는자! 라고 부르는거고 그 세상의 말과 상관 없는자 그 세상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거고. 그러한 이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거에요. 이제 그 안에서 그게 해결이 됐기 때문에 하느님도 그를 심판할 수가 없어요, 그 안에서 용서가 일어나 버렸거든요. 그 죄가 뭔질 알아 버렸거든요. 그 악이 뭔질 알아 버렸거든요. 그 안에서 좌와 우가 해결이 되고 위와 아래가 해결이 되고 어둠과 빛이 해결이 됐는데 누가 그를 정죄하고 그를 심판을 합니까? 아무도 못해요. 하느님도 그럴꺼에요. 아이구 니가 그걸 알아 버렸구나. 내가 이 어두움을 근거로 너를 확 심판 할라고 그랬는데 아이고 그걸 니가 빛인걸 알아 버렸네. 어떻게 심판할꺼냐구!

 

자꾸 저한테 뭐 예수 안 믿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무조건 지옥 갑니까? 이런 것 좀 물어 보지 마세요. 착하고 악한게 뭐예요?? 성선설 선악설 이야기하는데. 성선설이라고 하는건 이세상 모든 것들은 그 선인 하느님의 진리를 담고 있는 거다라는 것을 알면 성선설이고. 그거를 그냥 껍데기로만 알아 그걸 잘못 사용하면 그게 악, 이라 잖아요 그게 악이야 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성선설이나 성악설이나 똑같은 이야기에요. 착하고 악한게 뭐냐구요. 뭐가 착한거고 뭐가 악한거냐구요 도대체.

착함과 악함을 구분하는거 자체가 그래서 착함을 추구하고, 악함을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배격하겠다 라는 요것이 인간들의 에피뚜미아 ,노미조 하는 두 마음 이잖아요. 이걸 이렇게 구분하는게 잘 하는거 같지만 결국은 이 악이 요 선을 먹어 버려요. 이게 지킬 박사와 하일드 아닙니까. 결국은 하이드가 지킬을 죽여 버린다니까요. 그게 인간의 결국이에요 사실은요. 그러니까 진리를 알면 뭐 대단한 소설 같지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있다니까. 뭐 대단한거 깨달아서 써 놓은거 같지만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그 이야기야 그 이야기.

착하게 살아서 천국 가는거 아니고, 악하게 살아서 지옥 가는거 아니에요. 악 이라는건 그 선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모형일 뿐이고, 선이라는건 그 악을 통해 알 수밖에 없는 거잖아요. 하게 살지 않아서 지옥에 가는게 아니라 그 착함과 악함을 뭔지 모르고 여전히 구별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아니 그 상태가 지옥 이라니까요. 귀 있는 이들만 들으세요. 그런 이들에게 환란은 뭐고 핍박은 뭐며, 적신은 뭐예요? 생명은 뭐고 천사는 뭡니까? 사탄은 뭐고, 이미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영과 연합된 이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자기의 가치이며 무엇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겠냐는 거예요.


성경은 바로 이 하나 연합, 이 통일의 진리를 설명하는 책이에요. 잘 생각해 보세요. 창세기 1장에서 일곱 그 언약을 하나라는, 창세기는 첫째날 둘째날 셋째날 네쨋날,,,,이게 하나 하나 하나 하나, 다 그 뜻이에요. 똑같은 말을 일곱 번 반복해 준거에요. 그걸 언약이라 그래요, 율법에서는 두 번 말하면 이건 확실한 거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 에서만 내가 진실로 진실로를 반복하세요. 요한복음이 사랑의 완성 책이니까. 그런데 일곱 번 하면? 두말 할거 없지요. 그건 언약이란 말이에요.

하나로 설명해 주신 하느님이 창세기 2장부터 아담과 하와라는 사람을 이제 동원해서, 창세기 1장에서는 이쉬, 이솨,가 나오지 아담 하와가 안 나옵니다. 자칼, 네케바가 나온단 말이에요. 근데 창세기 2장에서 드디어 이제 교보재가 등장하는 거예요.

하느님이 뭔가를 설명하기 위한 재료, 아담과 하와를 동원해서 그 하나를 성취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세요. 근데 어떤 재료를 사용하세요? 선악과나무, 한 나무라고 해요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계수나무 한나무 짐승 두 마리, 아담과 하와. 그렇게 시작이 된다니까요.

선악과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아래의 것, , 아래의 물, 바다, 어두움, 아래에서 기는거, 날개 있는 새, 큰물고기, 이런걸로. 작은 광명, 위에것들 아는거 잖아요. 아랫것들을 총칭하는게 선악과에요. 이 아랫것들. 그걸로 니가 뭔지를 알면 그게 생명이야가 생명나무 실과 인거고. 그게 진리인거고. 그래서 선악과가 아주 보기쉽게 주어 지는거에요. 동산 중앙에. 그 중앙이 타베크 에요. 그 타베크 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에서 윗물과 아랫물 가운데 라는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그런데 그 가운데 있는게 라키아, 궁창 이지요? 궁창은 성전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동산 가운데 선 그 선악과나무는 뭐예요? 성전이에요, 율법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예수란 말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나무로 달리는 거란말입니다. 그 나무가 죽어야 거기서 진리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거란 말이에요.

그렇게 그 아래의 것으로 하늘이 되고 빛이 되고 위의 물을 알고 씨를 씻뿌리는 풀싹이 되면 되는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선악과, 아래의 것으로 위에 것을 아는가? 그냥은 알수 없어요. 하느님이 그냥 어떻게 알아보라고 기대 하신것 아닙니다. 창세기 217절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이말을 의역하면 이런 말이에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야 되는거지요? 먹으면 안되는거에요.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것을 그걸 먹고 죽어서 깨달아라 이런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의 죽음이 무트에요, 말씀의 완성, 그런데 그 말씀은 어떻게 완성이 되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 그러잖아요.

선악과, 율법이 완성이 될려면 무트, 죽음이 전제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럴려면 그걸 먹어야지요. 먹어라. 먹고 죽어서 먹지말라는게 무슨말인지 알면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생명나무 열매라는 거예요. 성경에보면 생명나무열매, 열매는 그 열매가 맺힐때 먹어라 그래요. 그러면 창세기에서는 아직 안 맺힌거네요. 근데 어떻게 먹냐구 그거를.

어디서 맺혀요. 그걸 진리로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의 입에서 맺혀요. 그러면 그거 먹으면 되요. 예수님이 그 진리의 영으로, 말로 오셔서 그분이 하신 그 일이 뭔지를 가르쳐 주시면 그게 생명나무열매에요. 그래서 그분을 첫 열매 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도 그 열매를 맺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러지요. 예수인 나보다 그진리를 깨달은 너희들이 나중에 나보다 더 큰일 할꺼야 왜? 나는 지금 아무도 못 구원하고 간다. 내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와야 그 일이 일어날꺼거든. 너희는 그 영을 받고 이 역사를 살꺼기 때문에 나 보다 더 큰일 할꺼야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일을 할꺼거든요. 그 열매를 맺을꺼거든요.


여기서 아담과 하와는 그게 뭔지를 깨닫는 자로 등장해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호지않은, 바느질 하지 않은 옷을 입히는 거예요. 처음에 그는 바느질 하여 엮은 치마를 입었다 그러지요. 그거는 인간이 노력하여 만든 것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뜻이에요. 율법이잖아요. 근데 하느님께서 준 그 치마는 그런 말이 없어요. 호지않은 옷을 제사장들이 그거 입었잖아요. 호지않은(바느질 하지 않은) 옷을 하느님이 그냥 입혀 주는거에요, 어떻게? 아들의 피로 만든, 아들의 희생으로 만든, 무죄한 제물의 가죽으로 만든,

첫 번째 제사는 하느님이 드린 제사에요. 그리고 모든 제사는 바로 이 제사다 라는걸 가르쳐 주는거에요. 그리고 그게 뭔지를 완료 시키는게 십자가고. 그러니까 제사는 우리것이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선악과를 먹고 우리는 은혜 앞에서 죽으면 되는 거예요.. 아니군요! 하느님이 입혀주셔야 되는거군요 이렇게! 그러면 그 은혜가 그 죽음을 감싸서 참 생명으로 일으켜 세우는거에요.


근데 4장에는 거기에 실패한 인물이 나옵니다 누굽니까? 카인이지요? 제가 지금 순서대로 설명해 드리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말이 주어지고 2장과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선악과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건 이 말은 너희들의 힘과 노력으로 따 먹을 수 있는 말이 아니야. 진리, 일곱 약속, 언약 이라는건 너희들의 힘으로 절대 따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야를 가르쳐준 거잖아요. 근데 아담과 하와가 따 먹어 보겠다고 먹었는데 잘못 먹은거죠?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거 아니지! 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그들이 올바른 옷을 입게 만들어 주는것이 23장 이란말이에요. 근데 4장에서는 여전히 그걸 따먹고 이게 뭘 초월하고 절대 굽히지 않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카인 인거에요. 카인은 동생 아벨을 때려죽이죠? 왜 죽여요? 자기 제사를 지키기 위해 죽입니다. 그게 뭐예요? 율법이에요. 성전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내 제사 지키겠다는 거예요. 이 제사를 가치없다 안받아 주냐는 거지요. 이 율법, 이렇게 날 희생하여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왜 내것을 가치없이 여겨요, 왜 거들떠 보지도 않아요? 그러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들을 죽여요 형제를 죽인다니까요. 그럼 그게 뭡니까? 역시 선악과를 먹은 거잖아요 그게. 하느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 버린거니까. 율법으로 먹은거니까.

 

근데 그 헤벨 이라는 이름이 텅빈, 공허한, 덧없는 뜻이라고 했지요. 그걸 추적해서 올라가면 제물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헤벨 이라는 존재는 텅빈, 공허한 재물로 온 어떤 존재네요. 죽기 위해온 아들이에요. 헤벨 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러면 마땅히 죽어야지요. 예수님은 이땅에 죽으러 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마땅히 죽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율법으로 그 구원을 성취 할뻔 했어요. 그분이 죽고 은혜로 그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안에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는 선물로 그 생명을 받은거 아닙니까. 그럼 헤벨 이라는 그 제물은 마땅히 죽어야 되네요. 그런데 내가 내 제사를 지키기 위해 그 아들을 내손으로 죽여 버리면, 내 행위로 죽여 버리면, 그게 멸망이요 저주 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들이 선악의 주체가 되어보겠다고 그것을 먹어버린 그 사건이 뭐예요? 하느님의 말씀을 초개처럼 죽여버린 거지요 그거요. 근데 말씀은 누구라 그래요? 요한복음에서, 아들이라 그래요. 그들도 아들을 죽여버린 거래니까요.

그래서 말씀이 아들로 나타나는 거예요. 카인도 아들을 죽였어요. 그럼 둘이 똑같은 짓을 한거에요 근데 어떤 이들은 호지않은 그 옷, 무죄한 짐승의 피로 만든 그 옷을 은혜로 입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그게 뭔지를 모른다니까요. 그러니까 카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욕을 먹은건 그가 한 그 일 때문이 아니라, 그래 마땅히 그 아들은 너에 의해 죽어야돼 왜? 그게 니 한계거든. 근데 니가, 그 아들이, 그리고 니가 한 그일이 뭔지 아니? 라고 물어보세요. 니 아우가 어딨느냐? 이렇게 번역이 돼 있는데 그말이 아니라. 니 형제 아벨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세요. 아벨이 죽었더니. 그랬더니 카인이 모릅니다 그래요. 니가 죽인 그 아들이, 그 헤벨이, 그 제물이 뭐니? 라고 물어요.

너 나에게 니 제사 지키겠다고 지금 니 동생 때려 죽였다. 그럼 니 제물. 니가 나에게 드린다는 그 제물이 도대체 뭐야? 니가 때려죽인 그 제물, 그게 뭐야? 니 제물 지키겠다고 죽인 그 제물이 뭐냐고 물은거에요. 근데 카인이 모르는데요 그랬다니까. 그래 그러면 너는 동쪽. 동쪽은 하느님의 대적 자에요. 그 땅이. 케뎀 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적하다 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이 "아이 헤벨 아흐" 이렇게 물어 보시거든요. 헤벨이 무엇이냐? 카인이 로 아다 이렇게 대답해요. 야다, 알다 라는 뜻이지요. 난 몰라요. 그러면 죽는겁니다. 그 아들의 죽음, 그 말씀, 그 진리가 뭔지 모르면 죽는거에요. 아들을 죽여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도 유대인들, 이방인들 그건 전 인류에요. 그 안에 들어가서 그 예수 죽인 그 아들 죽인 자들 이잖아요. 내가 예수 죽인자 맞잖아요. 아닌거에요? 그러면 그걸로 벌을 하신다면은 우리는 다 죽어야되요. 근데 이렇게 살아났잖아요. 죽였다매요? 그게 뭔질 알아서 살아난거 아니에요? 그러면 카인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이게 창세기 2장과 3장에 아담과 하와, 그리고 창세기 4장에 가인의 차이점 인거에요.


행위로만 보면 둘이 똑같은 짓을 한거에요. 그 말씀 그 아들을 죽인 거라니까요. 그게 구약, 십계명의 위의 5개란 말이에요. 그것으로는 우리는 이거 못한는거네요를 깨달으라고 줬더니 그거를 끝까지 지키겠다고 하는게 가인이라니까요. 해보겠다라는게. 근데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은혜로 그게 뭔지를 깨닫고 그 아들의 희생이 만들어준 옷을 입는거고,

카인은 끝까지 자신의 제사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무화과나무 이파리를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다가 망하는거에요.

그 둘을 나누는 분수령같은 구절이 322절부터 24절 까지에요. 사실 요걸 한 장으로 나눠버려야되요. 그래야 앞뒤가 명확히 갈라 지는건데. 한번 보세요. 22 야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끝없이 살게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선악을 분별하는, 선악의 주체로 우리가 되겠다고 이렇게 되었다. 그게 선악 구조속에 있는 인간들입니다.) 23 에덴동산에서 내 쫓으시었다. 그리고 땅에서 나왔으므로 땅을 갈아 농사를 짖게 하셨다. 24 이렇게 아담을 쫓아내신 다음 하느님은 동쪽에 거룹들을 세우시고 돌아가는 불칼을 장치하여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게 하셨다.

자 이게 뭔지를 알면 앞의 아담과 하와가 되는 거고 자칼, 네케바가 되는 거고,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면 4장에 카인이 되는 거예요. 손을 야드 밖으로 뻗어 솨라흐, 열매 생명열매를 획득하려 하는게 , 그게 무엇인지를 알고 그건 안되는구나 하고 나에대하여 죽어버리면 그게 아담과 하와고. 끝까지 손을 뻗어 내가 그 생명나무 열매를 내손으로 바느질하여 쟁취하겠다고 하는게 카인인거에요. 이렇게 나누어지는 거에요 창세기가요.

 

근데 요거를 전에도 설명 드렸는데, 손을 뻗어 그 나무 열매를 내손으로 쟁취하겠다 라는걸 한마디로 말하면 이사야에서 찾아 드렸는데, 베짜 탐심이라는 단어에요 그게요. 그래서 바오로가 그러는거지요, 내가 율법이 탐심이 죄라는걸 말해 주지 않았다면 내가 계속 탐심 할뻔했다. 이야기 한단말이지요. 바로 그거 하지말라 라는게 율법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십계명의 마지막도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이 전체는 그 이야기야! 그거는 너희들 힘으로 안되는거야. 이렇게.

그러니까 자기의 손을 뻗어서 부정하게 열매를 획득하여 생명에 이르려 하는 모든 시도를 탐심이라고 하는거고 그게 율법이고 죄 인거고, 그것을 성공한 자가 카인 이에요. 잠시의 성공이지만. 착각이지만, 그러나 그것에 실패하고 - 이건 아닌거구나! 무트 타무트 죽고 죽어, 하느님 은혜앞에 널브러져 있는게 아담과 하와 였다는거에요. 를 은혜의 옷으로 입혀 주는겁니다. 그래서 동쪽으로 쫓겨나서 거기에 정착해 버린 카인의 후예들의 족보는 전부 승승장구죠? 정치, 경제, 문화 ,농업, 예술, 거기에 대장들이 되지요. 카인의 후예들의 족보. 그게 4장 말미죠. 5장에서 아담의 후예들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다 무트에요. 와우 계속형. 그의 시간 속에서 계속 죽던데! 이런말이에요. 무트. 그게 바오로가 쓴 날마다 죽노라의 의미에요. 계속 죽던데?

 

카인의 후예들은 계속 살아나, ? 손을 뻗어 따 먹어야 되니까. 그러니까 문명이 발전하고 있는거는요 진짜 죽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요즈음 여론을 형성하고 주도하는게 뭐예요? TV에요. 마누라들이 남편말은 안들어도 TV에서 어떤 박사가 나와서 얘기하면 다 듣습니다. 거기서 정설이라고 얘기하는 90% 이상이 음모라고 그랬습니다. 얼마전에 40대 의사가 coming out 했잖아요. 여러분 의사 말 듣지 마세요. 아유 죄송합니다. 여기 의학 박사들 많이 계신데. 교수님들도 계신데. 의사들은 약을 권하고 수술을 권하지만 자기들은 정작 수술 안하고 약 안먹는다는 거지요. 근데 뭐가 좋다고 하면 전부~~, 뭐가 나쁘다고 하면 전부~~. 그리고는 그 바보 상자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가는 거예요.. 운명의 실체지요 그거는.

 

아담과 하와의 얘기 속에서도 아들이신 말씀이 죽은겁니다. 아들의 죽음이 가죽옷이 되어 입혀져요. 그러면 되는 거예요. 율법, 어기라고 준거에요. 선악과 먹으라고 준 거예요.. 그게 뭔지 알면 의의 흰옷 입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아들을 죽인 자가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카인의 이야기 속에서도 똑같이 아들이 죽어요. 근데 그 아들의 피는 땅속에서 신원하는 복수의 피가 되었어요. 의의 생수로 들어오지 못했어요, 진리의 겉옷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땅속에서 복수의 신원하는 피가 돼 버렸어요. 그게 뭔지 모르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때. 어린양이라는 아들의 대표, 장자의 예표지요? 어린양이. 예표가 죽는 유월절 사건과 애굽의 장자들도 모조리 죽습니다. 거기도 아들이 죽고, 이스라엘도 아들의 죽음으로 나오는거에요.

그런데 애굽의 장자들의 죽음은 스스로 자기들을 죽여, 율법으로 자기들을 희생하여, 나를 죽여,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다는 율법의 죽음이고, 이스라엘의 죽음은 아들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네요!라고 그 은혜 앞에 넓적 엎드리는 자기 부정의 죽음이에요. 둘 다 아들이 죽는다니까요. 그런데 애굽에서의 그 장자가 죽으면 하느님의 장자가 될 그 진짜 내가 죽는거고, 나를 살릴 그 진짜 아들을 죽여버리는 거예요.. 그게 율법주의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가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요.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깊음이 터져 버리고 위에서 위엣 물이 내려오죠? 이거는 갈라놓은 거잖아요. 근데 섞이면 , 그게 심판입니다. 그게 율법이라니까요. 하늘의 물이 아래의 물과 섞여 버리면 심판인 거예요. 이건 율법인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술이라고 하고, 누룩이 들어가 있다라고 하고 , 이게 섞이는거거든요. 그래서 옷감 두 개도 섞지 말라고 하는거고, 그러는 거예요. 섞이면 죽는거에요.

 

창세기 711절 보세요.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십 칠일, 바로 그 날 땅 밑에 있는 큰 물줄기가 모두 터지고 하늘은 구멍이 뚫렸다. (이게 그거에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그건 깊음 위에 있다라는 말이 아니라, 흑암의 이름을, 깊음의 이름을 어둠이라고 하자 이런 말이에요. '파님' 이니까. 그러니까 깊음, 이것이 뭐예요?? 어두움이에요 어두움)

어두움의 샘들이 터지고 가짜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늘의 창들도 열려요. 그리고 40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져요. 40 이라는건 뭐라 그랬지요? 십으로 사를 알라고 준 기간이란말에요. 광야 40, 예수님의 40, 여기도 40 주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 주야, 밤으로 낮을 알라고, 근데 이게 섞여버리면, 그 밤에 죽어요. 40의 기간 동안에. 그래서 이스라엘의 일세대가 그 40년간 다 죽은거에요. 율법으로.

근데 노아는 은혜를 입은 사람의 대표잖아요. 근데 그를 뭐라고 부르냐면, 여덟 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제가 설명 드렸지요. 그 일곱의 말로 내가 그게 뭔지를 알아, 그 언약이 뭔지를 알아 튕겨져 나오면, 일곱에서 튀어 나오면, 일곱은 어차피 이 아랫걸로 준거니까. 그렇지요?그래서 일곱 색깔 무지개 인거에요. 원색은 일곱 개 밖에 없어요. 색이라는게 뭐예요?? 불교에서 색, 나타나것들, 눈에 보이는것들, 그게 일곱 이라니까요 정확히. 나머지는 섞은거에요. 근데 이걸 다 섞어버리면 검정이에요, 흑암. 그 색깔을 다 빼버리면 아 이게 아니구나 하고 색깔을 다 없애버리면 흰게 되는거구. 일곱, 이 일곱 색깔로 그게 뭔지를 알면 여덟로 나오는거에요. 그래서 그 배에 딱 여덟명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근데 명 이라는 말도 없어요. 그걸 여덟 이라고 하자. 여덟.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의 때에 살아나야 한다니까요.

그렇게 하늘의 물과 어두움의 물이 섞여 버리면, 그건 곧 율법인거고. 그래서 하늘의 생수인 진리를 담고 오신 예수가 어두움의 세상에 오셨더니, 위의물이 터져 내려와 아래의 물, 온통 어두움이었다고 그랬지요? 그게 깊음입니다. 어두움에 딱 섞였더니 심판이 일어나는 거예요. 세상이 심판 받는거라니까요. 예수가 그 율법으로 죽는거에요.

그러면 그 홍수 때 섞인 물에 의해 죽은 건 정작 누구에요? 방주라니까요. 여덟을 품어 안고 죽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그 여덟을.. 여덟으로 살려내는 분이 예수란 말이에요. 방주, 테바, 라는 단어가 지성소의 법궤 라는 단어랑 똑같은 단어에요. 그리고 모세를 살려낸 그 바구니도 테바, 방주라는 뜻이에요. 하느님의 택한 자들이 물에서 건져 올려지게 하기 위해 그 섞인 물에 빠져 죽는거에요.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거에요. 방주 라구요.


그게 요나서에서 나오잖아요. 니느웨 사람들을 다 품어 안고 요나가 스올에 들어 가지요? 스올이 뭐예요? 하데스 라고 하는데 헬라어로. 말이 없는 곳이에요. + 에이돈, 말이 없는곳, 진짜 그 참 말이 없는 곳. 거기에 들어가서 삼 으로 죽어요, 셋으로. 삼일 밤낮이 아니라. ? 그 밤으로 그 낮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셋으로 죽자, 하느님의 백성들이 넷이 되드라는 거예요. 여덟로 살아나는. 그래서 일도 그거고, 이도 그거구, 삼도 그거고, 넷도 그거고, 오도 그거고, 육도 그거고 칠도, 팔고 그거고, 다 하나네요. 그죠? 그 하나를 아는거 라니까요. 진리는. 그게 뭔지 연구해서 설명해 주는 게 아니라. 섞임은 반드시 멸망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가 죽는겁니다. 율법의 대표로, 우리위 대표로, 그렇게 되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푸쉬케, 기식하는 모든 육신은 다 죽고 여덟만 살아난다 이런 말이에요. 물론 그때 다 죽고 여덟 명만 살아 났을꺼에요. 그걸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은거에요.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 입니까! 우리를 위해 온세상 인간들이 다 죽었데니까.

아브라함 하나를 위해 소돔과 고모라가 불 탔다니까요. 의인이 없으면 세상은 저렇게 멸망이란다를 가르쳐 주기위해, 궂이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얘기 해 주고 간다니까. ? 니가 의인이 되야, 빨리 그 씨를 가져야 저렇게 멸망할 자들이 살꺼 아냐?를 가르쳐 주기 위해. 근데 아직 너를 못 보내잖아. 니가 됐으면 내가 너를 보내지! 근데 너도 갈 수 없으니 불 타야지. 그 여덟, 여덟이 살아나는 이야기를 베드로가 이렇게 설명 설명합니다.

베드로전서 318절이후입니다. 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19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영으로 아직 이 육신에게 갖혀있는 어떤 영들에게 영으로 전파하셔, 영으로 들어가서. 그죠? 저기 지옥에 내려가서, 어떤 양반 말처럼 복음 전했단 말이 아니라.) 20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 가 물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들뿐이었습니다. ( 겨우라는 말은 없어요. 에게 겨우? 라는 말이아니라, 그들이 여덟이다 이래요 그냥. 그들이 여덟이다 그래요, 겨우 여덟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죽고 영으로 살아 나셨어요. 영으로 살아나셔서 여전히 육신이라는 옥에 갖힌 자들에게 케리스, 전파가 설교하다 라는 뜻이에요. 영으로 우리안에 들어와서 말로 말 해 주시는거에요. 설교에요 그것이.)


 선교 같은거 가지 마세요. 뭘 전할껀데요? 선교대회 같은데 많이 가 보셨지요? 거기서 복음 얘기 하던가요? 어떻게 선교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은 많이 가르쳐 주는데 거서 뭘 전할것인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무조건 가쟤. 가서 뭐 할껀데? 뭘 전할껀데 가서? 얘기 좀 해주세요? 뭘 전할껀데요, 가서? 말씀을 전해 줘야지요. 아니면 확실하게 봉사활동이라고 이름을 바꾸던가! 선교 간다고 사람들한테 삥 뜯어 가지고.

그렇게 여덟이 살아난건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노아의 홍수 사건이 뭘로 끝나냐면 셈은 가서 아버지의 벌거 벗은것을 그냥 덮어 줌으로써 그 인자의 라인으로 들어오고, 함은 - 아버지 벌거 벗었네! 라고 자기가 선악을 분별함으로 저주 받는 것으로 끝나는거에요. 그 함의 아들이 가나안과 애굽이에요. 이스라임, 저주에요. 그건 은혜다를 가르쳐 주는거에요. 그래서 노아가 아직 시체 냄새도 안 말랐는데 술먹고 발게 벗고 그 망신을 당한거에요. 우리를 위해,

아니 도대체가 전세계 기식하는것들이 다 죽은지가 얼마나 지났다구. 술을 또 어떻게 만들어 갖고, 담궈야 되는거 아니에요 그거는? 아니 배가 육지에 가라앉자마자 술부터 담궜다는거 아니에요 그거? ^^ 아니면 갖고 탓던가? 그리고는 벌거벗어요 구지. ? 뭘 입어야 되거든요. 그냥 덮음에 은혜로 만들어진, 호지않은 옷을 입어야 되기 때문에 벌거 벗는거에요. 이게 노아의 이야기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 일곱으로 그냥 보이는 일곱 색을 보지 말고 그게 뭔지를 깨달아 알아라 해서 무지개 언약이 일곱 개로 서는 거예요. 만약에 너희들이 못 알으면? rain bow가 뭐예요? , 이 말씀의 활로 내가 맞아 죽는다! 그래서 무지개는 이렇게 안뜨고, 이렇게 뜨는 거예요. 하느님을 향해 서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게 10장까지의 이야기죠?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그죠?

 

그리고는 또다시 반복 하는 거예요.. 그게 뭔줄 알아? 그러면서 인제,,,우리들의 힘으로 하늘에 오르자, 선악과 먹는 거지요? 그러면 하느님이 내려 오셔서 뭐라그러냐면, 그게 위의 말과 아래 물을 섞는거지라고 말을 섞어 버리지요? 그게 바벨이야 혼합이야 라고 이야기해요. 혼합이라는 뜻이에요 그 단어가. 바벨이야 그러고는 셈의 후예 중에 하나를 부르세요. 아브라함을 부르세요. 그리고는 그를 통하여 또 그 이야기를 설명해 주는 거예요. 아브라함아! 그게 뭔지 아니? 선악과가 뭔지 알아? 가르쳐 주시는거에요.

그 셈이라는 이름 자체가 , 솸마임 에서의 그 단어에요. 이름, 말씀 이런 뜻이거든요. 그 말씀이 낳은 아들로 아브라함이 등장 하는 거예요. 제일 불가능한. 남은 우상을 섬겼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우상을 섬길 수 있게 우상을 만들어서 팔아 준 사람. 아브라함을 하나 택하더니 하느님이 그게 뭔지 아니? 그러면서 또 끌고 가시는거에요. 이걸 믿음 이라고해 설명하는거에요.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씨를 주겠다고 하시지요? 그 씨는 우리가 공부한 창세기 셋째 날의 그 씨입니다. 열매를 갖고 일하는 그 열매나무를 통하여 그러나 그 안에 씨가 담긴 그걸 통하여, 텅빈 풀 풀은 텅빈, 텅빈 이란 뜻이에요. 텅 빈 풀에서 씨를 맺게 하게 하는게 셋째 날의 언약 이었잖아요. 그래서 여섯째 날에 그 씨를 가진 풀싹이 등장 하는데 그게 자칼과 네케바지요? 사람 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여섯째 날이 완성이 된단 말입니다. 하느님이 그 씨를 내 안에 주겠다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랬더니 그걸 알아 먹어요 못 알아 먹어요? 못 알아 듣지요. 그 씨가 뭔지를 알어? 일곱으로만 얘기가 되었는데. 아직 율법도 안 쥐어주고. 그렇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통해 한 번 설명해 준 다음에 그래도 못 알아 듣지? 그러면 율법으로 줄께 하고 출애굽기에서 율법이 또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은 단순히 그 이야기가 아니라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면 레위기부터는 아무 필요가 없다니까 그거는요. 그렇잖아요 성경에 나오잖아요. 레위? -그거 니 조상들의 허리에 있었던거 아냐. 그럼 조상들로 설명해 준걸 다 알았으면 그 레위, 그 율법이 왜 필요해? 그런거 아닙니까.

못 알아 먹어서 성경이 이렇게 두꺼워 진거에요. 레위기가. ^^ 아브라함이 못 알아 먹으니까, 씨를 준다니까, 남자가 생각하는게 그거 밖에 없어. 자손? 아들? ? 그거? 그래 그럼 그걸로 설명해 줄게. 그래서 아들을 줘요. 그리고는 그씨가 뭔지를 설명해 줘요. 그러니까 그 씨는 이사악도 아니에요 사실은. 그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그게 뭔지르 모르니까 아들을 주어 설명 하는 거예요. 그 이사악은 예수잖아요 또.


그 예수도 그 진리를 알면 우리에게 그걸 설명해 주기 위해, 그 씨니까 아들이니까 이걸 알았으면 모리아 산에서 이사악이 필요 없는 존재로 그렇게 그냥 되어 버리는것처럼 이 예수도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 없는거에요. ? 그 아들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내가 아들이 됐으니까. 근데 그걸 설명해 주기위해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똑같이 일곱 번 말 하세요. 나중에 찾아 드릴께요 그거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게 일곱 번 말하는데, 그 일곱 번 말해서 그게 뭔지를 아는 자로 등장 하는게 요셉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 이라고 하는 거예요. ?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그 인생에 일곱 번 말해서 던진 그것을 아는 존재로 요셉이 등장하는 거니까, 그래서 하느님이 요셉에게는 직접 나타나서 아무 말도 안 합니다. ? 그 진리를 마음으로 가진 자 이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게는 그게 뭔지를 계속 설명해 주세요. 그래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하느님 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요셉의 하느님이에요. ? 요셉은 뭘 낳요? 예수를 낳는다니까요. 그리고 그 요셉은 그야말로 애굽땅 한 가운데에서 식량을 쥔, 유일하게 식량을 쥔, 하늘의 생명을 쥔 자로 등장 하는거란 말입니다 그가.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걸 안 다음에 창세기 21장에서 브엘쉐바 , 일곱 우물을 알게 되요. -이게 일곱이라는 우물이구나! 알게 되자 22장에서 그럼 그 아들은 필요 없잖아! 라고 모리아산에 사건이 등장 하는거란 말입니다. 그 진리를 아브라함이 그 마음으로 가졌다라는 거예요. 근데 그게 쉬운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그 아들을 내 마음으로 가지면 생명이나 그 아들이나 예수나 깊음이나 높음이나 피조물이나 환란이나 뭐 이게 나를 어떻게 방해 할 수가 없는거잖아요. 근데 그게 어렵단 말이에요. 하느님이 인생 내내 가르치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인생이 좌충우돌 하는 거예요. 우왕좌왕 하는 거예요.

 

하느님이 베델 이라는 곳을 주셨는데 그 베델에서 기근이 일어나자마자 어디로 가요? 애굽으로 갑니다. 근데 애굽에서 뭐 합니까? 마누라 뺏기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성경에는요 동서남북이 나와요. 근데 이 북 짜포어둠이라는 뜻이고, 동이라는 뜻도 케뎀 이라는 동쪽, 대적자 라는 뜻이에요. 서쪽은 바다라는 뜻이에요. 남쪽은 사막, 네게브, 지금도 네게브 사막 이라는데 있지요? 그게 사막 이라는 뜻이에요. 광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도가 그렇잖아요. 쪼그메요. 강원도 만합니다. 쪼그마한데 이 서쪽에는 뭐가 있냐면, 지중해가 있어요. 바다에요 바다 그야말로. 요 아래 홍해 있고. 위에 애굽 있어요 남쪽에. 동쪽에는 항상 이스라엘을 치는 대적들이 상주 하는 곳이지요. 그래서 동쪽. 북쪽은 항상 어두움 이에요.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이 북쪽을 전부 어두움으로 상징해서 쓴단말이에요.

요기에 베델.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줘놓고 너 동서남북을 바라봐라 어디로 갈래? 동서남북 아무데나 찍어 다 주께. 그런 말이 아니라, 어디 갈 때가 있냐? 이런 말이에요. 요기 있어야지요 베델.

기근은 왜 줬다고 그래요? 사람이 빵으로 사는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걸 가르쳐 주기 위해 기근을 줬다고 그러면, 여기서 그 말씀을 먹으면 되는건데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냐면 네게브, 애굽으로 간단 말이에요.

근데 인간들이 애굽, 사막, 물이 없는 곳이잖아요. 비진리, 여기로 가기 위해서 어디로 먼저 가냐면, 카인이 어디로 쫒겨나요? 동쪽. 아담은? 동쪽, 이스라엘은? 동쪽. 쫒겨나서 하느님의 대적자가 되면 비진리로 간다. 그러면 애굽에서 나오면 이 순서로 다시 와야되지요? 나와서 남쪽에서 구지 홍해 건너 동쪽으로 가서 여기서 들어 가는거에요 그래서.

그러니까 니가 만약에 내 대적자가 되어 이리로 내려가면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삶을 대변 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사는 거에요. 아들이니까. 그러면 내 아내는 세상 왕의 아내로 줘 버릴꺼야. 아브라함의 이야기 인거에요. 너 들어 갔어? 그러면 너는 이제부터 내 아내 아냐! 세상의 왕, 애굽의 왕의 아내 인거야를 보여주는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보세요 동양학에서는 이 사방에다가 남동 북동 북서 남서 뭐 이렇게 해 가지고 네 방향을 더 놓지요? 여기가 베델 이라고 그래요. 하느님의 백성이 있는곳. 요 여덟, 요 사람이 요기에서 요 여덟 이게 땅입니다. 그래서 사방 팔방 그러는 거예요. 여기에서 이 여덟이 되지 못하면, 여기를 뭐라고 그러냐면 아홉, 구천이라고 그래요. 만약에 여러분이 여기에서 이 여덟이 되지 못하면 여러분은 구천을 떠돌아요. 얼마 동안?. 웃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게 진짜 이 얘기에요. 구천을 떠 도는데 뭘로 떠 돌아요? 귀신, 푸뉴마 다이모니온으로 떠 도는데 49일간 떠돌다 가요. 49재를 지내는 거에요 그래서. 다 진리에서 나오는 이야기들 인거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해서 그러는거지. 50이 되어서 희년, 바로 그 자유로 가야되는데 이 인간들이 여기에서 구천을 떠돌아 버리면, 여덟이 되지 못하면 이땅에서 귀신으로, 마귀 새끼로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를 이제 알았어요. 그러면 이 구천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그 하늘을 살 수 있다니까요. 그 사람에게 생명이나 사망이나 기쁨이나 사탄이나 천사나 이게 뭐 무슨 큰대단한 가치가 있겠느냐? 이말이에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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