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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랑보다는 용서가 더 /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13 조회수1,376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가난하고 비폭력의 삶을 살았다. ‘마하트마는 그의 본 이름이 아닌 명예로운 호칭이란다. 그 말은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라나. 그는 1948년 기도하러 가던 중 힌두교 광신자가 쏜 총에 맞았다. 그는 죽어 가면서도 살인자를 보려 하였지만, 결코 보지는 못했다. 힘이 빠진 그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 얼굴을 거쳐 이마에 올려놓았는데 그게 화해의 표시였다. 이 세상을 향한 그의 마지막 동작이었다.

 

이게 간디를 인류 모두의 위대한 영혼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어떻게 자신을 미워하는 원수를 이렇게 사랑할 수가 있을까? 그 길은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 깊게 뿌리내리게 하는 거다. 그분께 깊이 뿌리를 내리면 그 열매 또한 사랑으로 풍성히 맺히기에. 참으로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는 모든 원한을 그렇게 사랑으로 갚을 것이리라.

 

예수님도 원수를 보복하지 말며,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 주고 하느님처럼 자비를 베풀라신다. 사랑하는 이들끼리는 사랑에 빠진다지만, 원수라 여기는 이를 사랑하기란 정말로 강한 의지가 따라야만 할 게다.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헐뜯는 사람, 곧 원수 같은 이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에게 축복을 기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리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그 엄청난 피비린내 나는 보복의 법을, 그분께서는 네 한 뺨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마저 내밀어라.”라며 사랑 계명으로 바꾸셨다. 또한 남이 해 주기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라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소극적인데 있지 않고, 오히려 나 아닌 남에게 적극적인데 그 뚜렷한 특징이 있다는 거다.

 

죄인들도 반대급부가 분명하면 다른 이들을 돌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은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처럼 선하냐?’이기 때문일 게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철천지원수도 사랑하라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기억하라고 이르신다. 이렇게 할 때만이 증오와 경멸의 삶이 평화의 길로 나아갈 게다.

 

용서는 덕이다. 평생을 쌓아야 할 게다. 그런데 우리는 한순간에 용서하려 든다. 이게 실패하는 크나 큰 이유다. 기회가 온다면 늘 좋게 말해야지!’라 한다. 허나 때로는 뼈아픈 인내의 훈련이 필요하다. 상대를 위해 억지라도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면 상대가 조금은 더 좋아 보인다나. 이것만이 헐뜯고 비난하는 것보다 마음이 편해지리라.

 

이렇게 사랑에서 용서는 시작되리라. 서서히 좋게 생각해 가는 게, 용서의 시작이니까. 정녕 상대방 입장에 서 주는 게, 용서의 출발일 테다. 사랑과 용서에는 그 어떤 계획이 없다나. 지금 용서하고 사랑하는 게 바로 출발의 시작이란다.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말은 이 사랑과 용서이다. 그렇지만 어쩌면 사랑보다 용서가 더 절실하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사랑과 용서,선행,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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