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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믿는 우리도 연민과 자비의 마음을 /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18 조회수1,569 추천수0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고통이나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더 나아가 누군가의 귓속말도 은근슬쩍 기대기도 할게다. 척 보면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런 곤경을 호소하는 말없는 이의 그 눈빛에 뿜는 딱한 사정도 마냥 귀담아보시면서 늘 돌보셨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이런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에서 주님을 더 자주 더 깊이 만난다나. 자신의 잘남만을 믿다가, 한 치 앞도 어찌 할 수 없는 골목에 맞닿는 순간, 그 끝장에서는 결국 주님을 부른단다. ‘그분은 우리의 그 어떤 슬픔도 결코 외면하지 아니하시기에.’


예수님께서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무리가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사람들이 큰 무리로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2-15 참조)’

 

자식의 시신을 메고 가는 상여 뒤를 그 어미와 큰 무리가 행렬을 지어 따라간다. 과부 홀로 오로지 이 외아들에게만 온 희망을 두고 모든 것을 바치며 산 여인의 모습이 끝내 안쓰럽다. 수많은 이가 같이 슬퍼하며 상여 뒤를 따르는 것으로 보아 그 여인의 그 한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단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먼저 보내는 그 심정은, 차마 그 누구도 표현키 어려운 고통이라나.


외아들을 일찍 보낸 과부의 죽음의 행렬이 주님을 만나면서 그 아들은 다시 살아나 이제 그 행렬은 기쁨으로 가득 찬 생명의 행렬로 바뀌었다. 예수님 홀로 그렇게 만드셨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마주할 그 때에 결국은 그분께로 다가 갈 게다. 그런 우리를 안아주시고자 그분께서는 온종일 초조히 기다리신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삶과 죽음의 주인이시기에, 죽음의 권세도 그분께는 복종한다는 것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당신께 주어진 권능으로 죽음에서 구원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십자가 앞에서 자식의 죽음을 감내하는 성모님처럼, 죄 많은 우리를 늘 자비와 연민으로 다가오신다.

 

예수님께서는 불쌍한 과부의 외아들 상여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쳤다. 그분께서는 유일한 희망인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딱한 처지에 측은한 마음이 드셨으리라. 이처럼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곤경에 처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연민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하느님의 참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할게다. 비록 하느님이 침묵하시고 무력하신 분,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는 분인 것처럼 느껴지는 유혹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 주신 참 모습에서 오직 그분만을 기다려야 하리라. 이것이 믿는 우리가 늘 지녀야만 하는 중요한 자세일 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과부,외아들,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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