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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울지도 말라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19 조회수2,014 추천수0 반대(0) 신고

세상과 함께 춤추지 말고 울지도 말라

  오늘 복음말씀을 묵상하며~~~ 

(루가 7;31~35)

31 그러니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아르헨티나의 성녀라고 일컬어지는 에바 페론 에비타라고 더 많이 알려져 있죠? 에바 페론의 무덤입니다. 무덤 문 같지 않지만 무덤 문이에요.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 톨도스에서 농장의 요리사인 어머니와 농장주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에바가 16살에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입성을 해서 결국 26살의 나이에 아르헨티나의 국모 퍼스트레이디가 됩니다. 그녀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의 후광을 입고,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의 복지를 위해서 부의 재분배를 실천한 공로로 지금까지 아르헨티나 민초들의 성녀로 추앙을 받아요. 세인트가 붙습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에바 페론이 세상을 떠난 지 65년이 되었는데 52년에 죽었거든요. 65년이 되었는데도 그녀의 무덤에는 항상 싱싱하고 새로운 꽃들이 사시사철 장식이 되어 있어요. 그녀를 잊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매일같이 그녀의 무덤에 참배를 오기 때문에 그래요.

 

16살의 나이에 오직 성공이라는 것을 목표로 해서 아르헨티나의 수도로 입성한 에바는 수많은 남자들에게 자신의 얼굴과 몸을 무기로 하여 접근을 합니다. 꽃다운 소녀 시절에 지방 공연을 온 유명한 탱고 가수와 하룻밤 잠자리를 하고 그를 쫓아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를 한 그녀는 방송국 관계자들이나 정부 관리들을 유혹을 해서 잠자리를 함께 한 후에 배우가 되기도 하고, 성우가 되기도 하고, 모델 일을 하기도 했어요. 물론 다 삼류였어요. 그러다가 1943년에 아르헨티나의 산후안에서 일어난 대지진으로 아르헨티나 전체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그곳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행사에서 통일 장교단의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그 다음 해에 대통령에 당선이 됨으로 해서 갑자기 26살의 나이에 대통령 영부인이 된 거예요.

 

16살에 고행을 떠나서 창녀와 방불한 삶을 살며 오직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던 에바가 결국 몸뚱아리 하나 만으로 수도 입성 10년 만에 여자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에바는 전 세계 상류사회 여성들의 유행을 이끄는 여자, 다른 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여자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사치와 낭비의 표본으로 살아요. 유럽의 상류사회 여성들이 에바 페론의 옷차림과 보석들과 액세서리들을 앞다투어 따라했을 정도로 에바 페론의 낭비벽과 사치는 극에 달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에바가 아르헨티나 민중들의 성녀라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복지 정책으로 인한 부의 재분배를 실행에 옮긴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20세기 초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세계 경제 7위의 강대국이었어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부자였던 나라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국가의 부가 전부 상류 지배층에 의해서 갈취가 되어서 유럽으로 흘러나가고 있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라 그래요. 에바는 그 상류층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를 해서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줌으로 해서 실제로 열차에서 돈을 뿌리기도 했다 그러죠? 가난한 민중들의 인기를 독차지할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에바는 소외계층의 근본적인 원인 해결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민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마구잡이식으로 복지 정책을 폄으로 해서 아르헨티나 경제를 오히려 망쳐 버리고 말았어요.

 

아르헨티나가 지금처럼 가난한 나라가 된 것에 그녀가 많은 공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후세 역사가들은 그녀가 성공과 권력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부자들의 재산을 이용해서 민중들의 인기를 샀다라고 평가를 해요. 그러한 대중의 민심사기 인기영합주의를 정치용어로 포퓰리즘이라고 하죠.

겉으로 보기에는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것처럼 보였지만 뒤로는 온갖 사치와 낭비를 일삼으면서 독재를 즐겼다는 것입니다. 진짜 그녀가 민중들을 위해서 진실한 마음으로 그렇게 복지정책을 행했다면 그녀가 세계 최고의 사치녀라는 그런 오명을 쓰지 않았을 거란 말이에요. 어찌되었던 그렇게 출세를 위해서 몸을 파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성공만을 위해서 달렸던 그녀가 33의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는 아르헨티나 최고의 부호들과 독립영웅들 그리고 세계적인 학자들과 예술가들 역대 대통령들만 묻힐 수 있다는 레꼴레따 묘지에 묻혀요. 대통령들도 다 못 묻혀요. 13명만 묻혔어요. 그만큼 그 묘지에 묻힐 수 있는 자격은 아주 까다롭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에바의 무덤이 있어요.

 

그곳은 죽어서도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인간의 탐욕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한 고급 호화 음택 단지였어요. 양택 단지가 아니라... 그녀의 묘지에 쓰인 대리석이나 관등의 모든 재료는 전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것들이에요. 그녀의 묘지뿐만이 아니라 다른 묘가 다 그래요. 전부 대리석이에요.

 

성공과 번영을 위해 모든 것을 올인하여 달렸던 한 여인 오직 성공과 부를 위해 몸을 팔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남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서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환심과 인기를 샀던 그녀! 그녀가 최고의 자재로 만들어진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레꼴레따 묘지의 특징은 밖에서 안이 전부 들여다 보인다는 거예요. 그 속의 관과 부장품들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어요. 몸까지 팔아가면서 달리고 달려서 결국에는 세상과 아무런 교통도 할 수 없는 몇 명 안되는 묘지에 머무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에요. 세상 사람들의 인생! 그 레꼴레타 묘지에 무려 7천 기 이상의 묘지가 있어요. 그들이 전부 에바 페론 이상의 성공과 부와 명예를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레꼴레따 묘지에 가면 고양이들이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다녀요. 고양이 좋아하는 분들은 한번 가보세요. 종류별로 있어요. 하도 쥐들이 많아서 묘지 측에서 풀어 놓은 거예요. 고양이를 음산한 묘지에 검은 고양이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니까 정말 더 음산해져요. 그곳에 누워있는 시체들은 이제 작은 생쥐 하나를 쫓아버릴 수도 없는 그런 죽은 흙이 되어 있어요.

저는 그 엄청난 인물들의 무덤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인간이란 존재의 자기 이름 남기기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어요. 돈이 얼마나 많은지 무덤 하나하나에 최고의 자재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들이 살아생전에 그 무덤을 전부 설계한다 그래요. 최고의 자재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고용해서 화려한 조각과 작품들을 묘지에 새겨 넣어요. 7천 기에 새겨있는 조각이 다 달라요. 그런데 그 조각이 전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만든 거예요. 진시황의 묘나 이집트 파라오들의 무덤들을 응축하여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그들의 심리가 다 그런 거거든요. 죽어서도 이름 남기겠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내 무덤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누군가 나를 알아줄 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매한 인생인 거예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문의 명예와 세상의 평판이 받쳐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라는 바로 그 명예의 전당 레꼴레따에 묻힐 정도, 거기에 묻힐 이들의 생전에 세도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에 엄청난 것이었을 거예요. 대통령을 능가하는 부와 명예를 소유했던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몇 대가 못 가서 200년 된 묘니까요. 몇 대가 못 가서 가문이 몰락하고 돈이 떨어지게 되자 그 묘지가 폐허가 돼요. 인간 세상 영화의 덧없음입니다. 그것이요... 쥐들만 가득하고 잡초만 무성하고 콜라 병만 왕창 쌓여 있어요. 비닐봉지 더러운 쓰레기 가득 차 있어요. 그 묘지에 사람들이 장난친다고 그 유리를 깨고 그 관에다가 콜라병들을 던져서 관은 쑥쑥 다 들어가 있고 다 깨져 있어요. 그 안에 시체는 뼈는 다 나뒹굴고 있는데 자손들이 돌보지 않으니까 그냥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요. 쥐들만 파먹어요. 심지어 자손들이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묘지도 그렇게 폐허로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요. 이미 죽어 버린 자식들의 현실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되어버린 그런 부모는 죽어서도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의 영광과 인기와 이름을 챙기기 위해 살던 이들의 결국인 거예요. 자신의 이름과 인기와 명성과 성공을 위해서는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고 심지어 포퓰리즘을 이용해서라도 기어코 쟁취해 내려는 악마적 속성의 최후! 그게 레꼴레따 묘지 안에 가득 차 있었어요. 가득 차 있었어요.

 

반면에 에바 페론과 똑같이 서른 셋에 돌아가신 어떤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에바 페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어려운 집에서 태어나셨어요. 그리고 평생을 목수의 아들로 목수로 사셨습니다. 그분은 단 한순간도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지 않으셨어요. 단 한순간도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능력이 없었던게 아니에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었고,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하늘의 천사들이 수종을 들러 내려와서 그분의 발을 받혀야 하는 하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여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말입니다. 그게 40禁食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그 에피소드에 그려있는 내용이에요.

 

예수님은 자기의 힘을 자기의 이름과 자기 증명을 위해서 단 한순간도 사용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치장하기 위해 사치를 하지 않았고 보석으로 멋을 낼 필요도 없었어요. 대중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 매일 같이 오병이어로 뻥튀기를 해주시지도 않았고, 에바 페론처럼 돈을 열차위에서 날리지도 않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변변한 무덤도 없어서 다른 이의 무덤을 잠시 빌렸어야 했어요.

 

레꼴레따 묘지의 그 엄청난 무덤들과는 달리 무덤도 없었어요. 그분은요... 그분은 당신을 왕으로 추대하겠노라고 찾아온 무리를 피해서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어떤 이는 세상의 왕이 되고 싶어서 몸까지 파는데 이분은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찾아온 이들을 피해서 도망가셨단 말입니다. ?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렇게 변변한 무덤 하나 남기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쓸쓸히 죽어간 그분을 승리자다 왕이다라고 칭한다 말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다가 가요. 하나는 자기의 이름과 평판과 인기와 힘을 챙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들을 추구하다가 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름 남기기 흔적 남기기의 욕망을 끊임없이 공격당하다가 누군가로부터 공격당하다가 결국 인간의 이름 남기기의 욕망이 자기 영광 챙기기의 자기 가치 챙기기의 그 욕망이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큰 죄악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흔적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두 종류에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삶을 추구하십니까? 여러분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여러분의 인기와 명성을 사람들에게 남기기 위해서 이 세상을 사세요? 아니면 '아 그게 바로 죄구나 하나님 앞에서 나는 납작 엎드려서 죽은 흙됨을 고백하는게 인생이구나!'라고 자기를 부인하고 사십니까.

 

전자가 자기 영광을 챙기는 삶이고 후자가 자기부인을 하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자신을 부인하다 가셨어요. 아버지가 시키는 일만 했고 아버지가 시키는 말만 했대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충분히 힘을 쓸 수 있는 분인데 자기 이름을 위해서 단 한순간도 안 살았다 말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의 삶이에요. 그런데 우리에게 이름이 붙여졌는데 우리의 이름이 뭐예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디서 나온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인 거예요.

 

따라서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서 힘을 소유하고 이름을 남기고 멋진 명성을 쟁취하는 삶을 사는게 아니라, 오히려 비워지고 털리고 빼앗기다가 결국 이름까지 빼앗기고 예수의 이름을 받아서 천국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이름은 빼앗겨야 돼요. 이 세상에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요? 누가 세상에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게 올바른 삶이라고 이야기했습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 남겨요. 그러나 사람은 죽어서 이름 남기면 안 돼요! 그 이름 남기기의 삶이 그를 지옥 보내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에 가치관과 세계관에 부하뇌동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일갈을 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4-16) 14 불신자들과는 상종하지 마십시오. 의로움과 불법이 어떻게 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빛이 어떻게 어둠과 사귈 수 있겠습니까? 15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벨리아르와 화합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자와 불신자가 어떻게 한몫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16 하느님의 성전과 우상들이 어떻게 뜻을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르신 그대로입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며 그들 가운데에서 거닐리라.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건 단순히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지 말라 이런 말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 다니면서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교회 다닌다고 '야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 그래갖고 정말 훌륭한 혼처자리 다 놔두고 그 사람에게 결혼했다가 결혼했는데 예수 안 믿어 그 인간이 그렇게 낭패본 사람들 많죠? 그런 얘기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이 말씀은 단순히 죄짓지 말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한다라는 그런 말씀도 아니에요. 이 말씀은 성도와 세상의 그 삶의 원리의 차이, 구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당시 히브리 사람들의 멍애는 짐승이 두 마리가 함께 매던 멍애였어요. 그런데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짐승이 한 멍애를 맬 수 없잖아요.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과 하느님의 백성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게 유턴 메타노이아 회개의 뜻이거든요. 일정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세상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유턴해서 가는걸 회개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방향으로 가는 이들이 어떻게 한가지 삶의 원리 힘의 원리라는 그 삶의 원리를 쫓아 살 수가 있겠느냐? 라는 그런 뜻인 거예요. 자기 주체 의식을 갖고 사는 세상 사람들과 예수가 나의 삶의 주체가 되어서 살게 되는 성도의 삶이 어떻게 같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성도는 레꼴레따 묘지의 그 화려한 무덤들과 같은 류의 명성과 인기와 화려함을 남기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무덤조차 찾을 수 없는 조용한 결국을 맞아야 하는 이들이에요.

 

주님은 이 세상을 가리켜서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상이라고 했어요. 맞죠?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요, 이방인이요, 외국인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성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바로 고 마음 이 세상에서 대장 되고 싶어하고, 이름 남기고 싶어 하는 고 마음 단단한 마음을 갈아엎어서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주시는 거예요.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그래요. 그걸 자아 해체작업이라고 하고, 자기부인의 삶이라고 하고, 그 전체를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이 세상 속에서의 성도의 삶은 자기부인의 절정인 이름 없음의 삶으로 끝나야 되는 거예요.

 

성도의 죽음이에요. 그게. 이름 없음 점점점점 점점 자기 이름에 대한 그 가치를 놓아가다가 결국에는 다 뺏기고 김종업이란 이름을 뺏기고 그리스도인, 하느님의 아들, 작은 예수라는 이름을 받아서 가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터 아이들의 놀이를 들어서 비유를 하나 말씀해 주세요. 장터에 아이들이 피리를 불면서 혼인잔치의 놀이를 하는데 어떤 아이가 그 피리 장단에 춤을 추지 않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애곡을 하면서 장례식 놀이를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그 놀이에 참여를 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무리 복음을 전하고 선행을 가르쳐도 세상이 따라하지 않았다는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전에는 절대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그 말씀을 좇아서 살 수가 없어요. 그걸 아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실 리가 없잖아요? 인간들은 종교조차 자신들의 세상적 유익을 위해 사용합니다. 종교조차 자신들의 이름과 인기와 평판과 힘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섬긴다고 하는 신들까지 이용해 먹는게 인간인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철저한 금욕적인 삶 도덕적 윤리적 바른 삶 등을 내어 놓기도 하고 엄격한 종교 행위를 내어 놓기도 해요. 그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었어요. 그것이 바로 현대의 실용주의, 합리주의, 인본주의로 이름을 바꾸어 나타난 유대주의이며 율법주의인 거예요.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요. 인간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봐요. 그리고 하느님은 자기들만 축복해줘야 된다고 믿어요. 그리고 과연 그렇게 되었어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과연 그러하리라' 그렇게 살았더니 세계의 경제권을 유대인이 다 쥐어 버렸어요.

 

그러면 뭐합니까? 그 유대주의가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닉주 유대인들 중에 예수를 믿는 자들을 지금도 테러로 죽이고 있어요. 지금도...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을 다 검색해야 되고 차를 탈때마다 차 밑을 다 봐야 돼요. 폭탄 테러가 혹시 유대인들에 의해서 자행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들은 서슴없이 이야기해요. 우리는 2천 년 전에 태어난 그 예수를 쓰레기처럼 버렸다. 유대교는 그를 쓰레기처럼 버렸다. 그런데 다른 종교인 다른 이방인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어서 예수교를 만들었다라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쓰레기처럼 버린 거처럼 이 땅에 예수교가 들어와서 우리를 개종시키려고 할 때 쓰레기처럼 죽여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아직도 무서워요. 그런데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이들처럼 살고 있어요. 미국 경제를 움직이는 자들도 유대인입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미에 자본은 전부 유대인들이 갖고 있어요. 꼼짝을 못합니다.

 

자기들이 종교 행위를 하면서 아니 종교놀이를 하면서 애곡을 하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면서 애곡하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어, 나는 이렇게 금식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금욕적인 삶을 살아, 나는 하루에 열두 번씩 씻는데 애곡하는데, 어떤 놈이 나타나갖고 자기들의 애곡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같이 울어주지 않는 거예요. 창녀들과 술만 마시고 있어, 안식일날 밥도 먹고...그게 본문 34절인 거예요.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부정한 것과 멀리하여 이렇게 종교적으로 훌륭하게 잘 사는데 저놈은 와서 죄인들과 창녀들과 먹고 마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더라는 거예요. 애곡에 참여 안하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인간을 삶의 중심에 올려놓고 사는 이 세상 군상들은 진화론에 근거한 역사 낙관론에 빠져 살고 있어요. 역사는 계속 진보하여 결국 지상낙원이 될 것이다라는게 역사 낙관론이에요. 마치 유대인들이 엉터리 선민사상에 빠져서 자신들의 결국은 반드시 화려한 다윗 왕국의 회복으로 끝이 날것이다라고 믿었던 것과 똑같은 거예요. 유대주의에요. 그게.

 

그런데 세례 요한이라는 자가 와서는 그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 밖의 광야에서 예루살렘 밖에서 그 성에서 나오라는 거예요. 성에서는 지금 혼인잔치가 준비되어 있어요. ? 선민이거든요. 예배드리면서 제사드리면서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야 우리에게 이제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국이 회복될거야' 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그 밖에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광야에서 '웃기지 마라 회개하라!'를 외치고 있어요.

 

회개하라는거 그거 아니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리고는 메뚜기와 석청만 먹고 있네? 잔치를 부정해 버리는 거예요. 자신들은 역사 낙관론과 선민사상으로 하느님과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놈이 계속 거기다 초를 치는 거예요. 고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세례 요한이 유대주의 곧 인본주의의 역사 낙관론에 초를 치면서 회개해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아니면 니네는 모두다 가짜다라고 외치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예수교인의 역사관은 프로페틱 페시미즘(예언자적 비관주의)이어야 하는 거예요.

 

회개하지 않는 세상은 반드시 멸망한대. 맞습니까? 그게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에요. 그런데 택함을 받은 소수의 하느님 백성들 이외에는 절대 회개할 수 없다가 성경의 진술이죠.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된다? 멸망한다에요. 그래서 우리 성도의 역사관은 페시미즘이 맞는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끝내 회개하지 않고 멸망할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 속에서 이름을 남기고 싶다, 유명해지고 싶다, 힘을 갖고 싶다'라고 하면서 세상의 놀이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그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지금은 너희들이 이 세상 속에서 큰 자됨을 꿈꾸며 유명한 자됨을 꿈꾸며 아주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진짜 큰 자는 믿음으로 예수를 보고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예수의 은혜만을 의지하는 사람이란다 그러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하고 세상에 초를 치는 사람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세상의 피리 소리에 함께 맞춰서 춤추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요 이야기 바로 위에 세례 요한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그러죠? ? 구약의 예언자들이 전부 뭘 준비하다가 간 사람이라 그래요? 메시야 예수를 증거하다가 간 사람이라 그랬잖아요. '메시야가 온다.' 하고 다 갔어요. 그런데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이 와서 '이가 그이다!' 하고 예수님을 봤다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자예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큰 자의 의미가 뭐예요? 예수님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보았느냐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이에서 동행했느냐로 판단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천국에서 하느님 나라에서는 세례요한이 가장 작은 자다 그러죠? ? 교회는 예수님을 가까이서 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 안에 뚫고 들어와 있는 존재인 거예요. 그렇다고 세례요한이 교회가 아니란 말이 아니라... 교회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탄생이 된 교회가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존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 큰 자인 세례요한도 교회 중에서는 가장 작은 자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육신의 눈으로 못 봤으니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다 본 자이기 때문에 그게 큰 자인 거예요. 그 큰 자가 되는 거예요.

 

그 유대주의가 오늘날 인본주의 실용주의 꿩잡는게 매란 뜻이에요. 실용주의는 쉬운말로 나에게 유익만 되면 괜찮다는 거예요. 실용주의 진리가 뭔지 상관없어 나에게 유익만 되면 된다라는 거예요. 합리주의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움직이기만 하면 돼. 아니에요! 성경이 합리적으로 해석되는게 몇 가지나 있습니까? 아니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 모든게 다 땅의 것이에요. 착하게 살아서 하느님께 칭찬받자 땅의 것이에요. 기특한 이야기인 거 같지만... 착하게 사는게 나쁜게 아니라.

 

예수님에 은혜에 의해 내가 부인당해지고 그 은혜를 너무나 깊이 깨닫게 되어 그 은혜가 감사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삶으로서의 착한 일은 얼마든지 해도 좋지만, 내가 이 착한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인기와 명성을 챙기겠다는 착한 일이 악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그게 유대주의인 거예요. 그게 율법주의인 거예요. 그게 인본주의라는 거예요. 그게 땅의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바오로가 필립보서에서 이렇게 요약을 해주는 거예요. 3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때 당시 교회 안에 들어온 율법주의를 가리켜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거래요. 그게.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살았던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유대주의의 마침은 멸망이에요. 인본주의에 마침은 멸망이에요.

그러니까 우리의 이름과 우리 자신의 영광과 인기와 힘과 평판을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배를 신으로 삼아 사는 자아 숭배의 삶인 것이고, 그것은 전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이며 그들이 지옥에서 멸망당할 사람이다라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골로새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해요. 3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위엣 것은 뭐예요? 예수와 예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땅엣 것 인본주의 인간의 노력 열심 이야기하는 거예요)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죽었는데 어떻게 너희들이 뭘 한다는 것이냐라는 뜻이에요)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에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어요.)

 

마치 레꼴레따 공동묘지의 그 수많은 시체들처럼 이제 더 이상 세상과 교통을 할 수가 없어요. 교감을 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 전쟁이 일어나도 시체들은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어요. '어휴 두렵다. 무섭다. 공포스럽다' 안된다 말입니다. 그게... 그 자리로 변해가는 거예요. 그들은 아무 관심이 없어. 시체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하늘의 시체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환경이나 그들이 성취한 성공이나 승리 소유의 다소 이런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요구하는 율법의 행함도 무용한 것이 되고요. 시체들이 행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다른 이들의 공격에도 반응하지 못해요. 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 시체니까... 아무리 콜라병을 던져도 그 시체가 일어나서 '너 다시한번 그러면 혼난다' 이런 말 못한다 말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은 시체들에게는 그러한 세상의 놀이에 재미가 전혀 느껴질 수가 없어요. 가난해도 괜찮고, 못생겨도 괜찮아요.

시체는 자기 몸에 명품을 두르는 것도 시시해지고... 자기들은 살았다고 빡빡 우기는 이 좀비들에 세상에서... 성경은 분명 이 세상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 그러는데 자기들은 살았다고 우기니까 좀비지 뭐예요? 그게 강시지. 콩콩거리면서 다니는 강시. 그죠? 이 좀비들의 세상에서 인기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야 돼요. 공포영화나 만화영화 같은데 보면은 좀비들이 막 살아서 자기들끼리 뭐 싸우기도 하고 뭐 투표도 하고 별거 다하죠? 그때 그런거 보면서 '야 쟤 참 좋겠다 좀비들의 세상에서 대장 됐네' 그게 부러우세요? 그 자리로 가는 거예요. 그게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고 세상의 애곡에 따라 울지 않는 하늘의 사람들의 삶인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떤 사실에 직면했을 때에 그것에 대한 반응이 줄곧 한 가지로 나오지 않잖아요? 한가지 사건에 대해 어떤 때에는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불쾌한 반응을 나타내기도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 자아라는 것은 고정적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어떤 동일한 사건을 직면하면서도 그 사실을 매 순간 다르게 주관화하여 인식을 해요. 그게 무슨 자아입니까? 여러분 그걸 애벌레 자아라고 한 거예요. 인간은 그렇게 진짜 자신의 자아가 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그런 존재에요. 그래서 인간은 그 수많은 애벌레 자아들을 크고 질긴 막으로 이렇게 감싸 버려요. 그 막을 방어기제(디펜스 매커니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인간은 그렇게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애벌레 자아들을 방어기제 같은 막으로 감싸고는 이것이 나의 자아야라고 근사하게 연극하는 거예요. 이게 나야!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인간은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선행과 착한일과 종교적인 열심을 내어 놓으면서 바로 이게 나다라고 하면 세상이 다 속습니다. '와 착한 사람 청렴한 사람 훌륭한 사람 세상에 의해서 그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막이 그 사람의 자아로 평가를 받고 그 자신에게도 그게 자아가 돼요. 그런데 하느님은 절대 거기에 안속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백일하에 폭로시키세요. 꿈틀꿈틀 거리는 그 구더기같은 우리의 자아 그 애벌레 자아를 폭로시켜 버린다고요. 그리고는 '이걸 갖고 너희들이 영생을 살 수 있어? 아니지? 그래서 내가 죽이러 온 거야!' 그걸 우리의 인생 동안 경험하고 가는 거예요. 신앙생활을요. 그 꿈틀거리는 애벌레 자아가 의식의 표면으로 끌려 나와 하느님에 의해 도말되는게 신앙생활이에요. 성도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에서 시므온이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묘사한 거예요.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왜 오셨어요? 여러분이 원래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서 어떤 존재로 타락이 되었는지를 폭로시킬려고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오신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은 설교를 들으시면서 타락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 속의 애벌레 자아를 둘러싸고 있던 그 자기방어기제 그 막 그 가면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셔야 돼요. 폭로되야 돼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좀 건져다오!'라는 이 고백을 매일 하셔야 돼요.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제일 착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었다 그랬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사망의 몸이라고 고백을 했다니깐요. 고대시대 때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면 그 시체를 살인자와 꽁꽁 묶어 놓는 거예요. 그 시체가 썩어가는 그 과정을 다 보면서 '아 이렇게 무섭고 더럽고 지저분한걸 내가 계속 달고 달아야 돼! 누가 이거 좀 떼어죠' 이게 사망의 몸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보더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만나더니 이 사도 바울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안에 미성숙하고 더럽고 조변석개하며 탐욕에 가득 찬 자기 밖에 모르는 진짜 자신을 폭로당해야 돼요. 그리고 그 더러운 자아로는 그 어떤 노력과 열심을 내어 놓는다 할지라도 절대 하느님과 화해할 수 없다는 것도 처절하게 경험하셔야 돼요. 그리고는 그 무능력과 불가능함 속으로 뚫고 들어 오서셔 자기 배라는 이 신을 향해 꿈틀거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옛 자아를 조금씩 죽여가시는 쉬운 말로 자기부인의 자리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거예요.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아가다가 수많은 애벌레 자아를 완전히 뺏기고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새로운 자아로 탈바꿈하게 되는게 신앙생활이에요. 그게 성도의 육신의 죽음입니다. 성도는 죽으면서 그 애벌레 자아를 완전히 다 뺏기는 거예요. 이름을 뺏기는 거예요. 옛사람을 뺏기는 거예요. 그리고 새것으로 전부 받아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성도의 죽음이 아름답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는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처럼 주인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빼앗기고 또 빼앗기다가 결국 주인이 왔을 때 모두 다 빼앗기는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거예요. 그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 나오는 종들이 주인의 명령을 받들고 주인의 장사를 해주기 위해 자기 유익을 위해 아무것도 못했잖아요. 빼앗기는 삶이란 말이에요. 계속 빼앗기다가 장사해서 얻은 유익까지 다 뺏기는 거예요. 주인한테... 주인이 오자마자 그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그렇게 다 뺏겨야 진짜 좋은 하늘의 것으로 채워주는 거예요. 절대 자신의 이름을 위해 호화로운 무덤자리 마련을 위해서 이 땅을 사는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비유에 등장하는 세상의 피리 소리에 춤을 추지 않았던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요구하는 장면에서 도끼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루가복음 3장으로 가보세요.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9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세례 요한이 율법과 원로들의 유전에 의해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물로 씻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이야기하고 있어요.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니들 하루에 열두 번씩 씻는데 그건 씻는거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니다 난 씻고 있는데?' '아니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열심과 노력으로 정결하게 되겠다고 열심과 노력으로 씻고 있는 그들에게 다른 물과 다른 씻음을 제시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다. 그게 세례의 현장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상한건 세례를 받겠다고 나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세례를 준게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느냐'하고 야단을 쳐요. 세례를 받으라고 해서 나왔는데 욕만 실컷 얻어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 받으래는 거예요? 말래는거에요? 도대체 왜그랬을까요?

 

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던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겠다고 나오는 이들을 그렇게 욕을 욕을 해갖고 야단을 쳤을까요? 유대인들의 유대주의는 인간의 노력과 열심을 근거로 행복과 구원과 상급에 도달하겠다는 인본주의입니다. 그러한 자들이 세례를 받으러 나왔어요. 그러면 그들에게 있어서 세례가 뭐였겠어요? 내가 행하는 수많은 종교행위 중에 하나인 거예요. '내가 이러이러이러한 종교행위를 했는데 거기다가 하나 더 보태면 하느님이 더 기뻐하시겠지?'하고 행위로 보태버린 거예요. 세례를... 그건 안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세례란 나의 모든 가능성을 전부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그 세례마저 자신들의 열심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던 거라 말입니다. 그게 자신을 우상삼아 살고 있는 모든 아담 군상들의 본성인 거예요. 세례 요한은 바로 그걸 지적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 세례마저 천국에 들어가는 도구로 너희들의 업적과 공로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구나?' '아니다!' 세례는 "나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나는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세주가 필요합니다!"라는 절박한 은혜의 필연성에 대한 자각이 있는 자들의 항복선언이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이것 조차도 너희들의 행위에 어떤것을 보태는 도구로 사용하고 내게 나아오고 있으니까 그걸 나는 찍어 버리겠다는 거예요. 하느님은 바로 그 유대주의를 찍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끼가 너희 뿌리에 이미 놓여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단순히 '착한 일 안하면 찍어버릴거야' 이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못 이해하시면 세례 요한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종교행위와 선행을 독려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세례를 받겠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안그러면 도끼에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된다라고 말씀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오해하시면 안돼요. 그걸 단순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착한 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종교행위라고 이해하시면 안된다 말입니다. 그게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행하고 있던 거라니깐요. 그건 이미 유대인들이 너무나 잘하고 있던 거예요.

 

세례 요한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해놓고 그 구체적인 세목을 제시하는데 그게 뭔지를 잘 보시면 그 열매가 뭔지를 분명히 아실 수 있어요.

 

루가복음 310-14절 보세요. 10 군중이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스승님,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13 요한은 그들에게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하고 일렀다. 14 군사들도 그에게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요한은 그들에게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렀다.

 

이것들이 단순히 착한 일을 많이 하라는 충고라고 생각하시면 안돼요. 지금 세례 요한은요 회개에 대한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하면서 그 열매로 자기부인이라는걸 제시하고 있는 거예요. 세례 요한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묻는 무리에게 입을것 먹을것의 여분을 두지 말라고 그러죠? 그죠? 잉여를 두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자아의 행복과 구원을 스스로 쟁취하려 하는 자들이 미래의 희망을 위해서 쌓아두려 하는 그 삶의 잉여를 가리키는 거예요. 옷을 두벌씩 겹쳐 입는 사람 없고, 한끼에 두끼식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두벌 옷과 두끼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분투하는건 자기 주체의식에 사로잡힌 자아숭배교 신자들 즉 옛 아담에 속한 자들이 스스로의 안위 스스로의 미래를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하느님 모독행위에서 나온 거란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단순히 구제를 명령하는게 아니에요.

 

옛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이 세상의 그 자아방어 기제들을 놓아 버리라는 충고를 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만의 성공과 명성을 위해 사는 옛사람 속에 갇혀 있잖아요. 그리고 자기가 그걸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단 말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말이에요. 그들은 항상 자신의 과거, 과거라는건 지금 이 현재도 과거에요, 금방금방 지금 과거가 되고 있는 거죠? 과거예요. 자신의 그 과거 그 과거와 연결이 된 고 성공적인 미래를 꿈꾸면서 살죠? 이 날을 전제한 채 요게 조금도 나아져야 되는데... 조금더 나아져야 되는데... 하는 요 과거를 전제한 미래! 요거를 꿈꾸면서 산다 말입니다.

 

거기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오는 거예요. ? 내가 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렇게 옛사람 안에 갇혀 있는 그 과거의 존재가, 요 현재라는 과정을 통과해서 그 미래의 내가 되고 싶은 지점으로 향하는 그 모든 활주로를 가리켜 희망이라고 하는 거라 말입니다. 희망 그게 인간의 희망이에요. 그 인간은 바로 그 희망이라는 것을 위해서 두벌 옷을 준비하고 희망이라는 것을 위해서 잉여의 먹을 것을 비축하잖아요.

 

내가 지금 당장 굶어 죽는게 아닌데 내 미래를 위해 비축을 한다 말이에요. 그 잉여를 비축한다 말입니다. 우리 전부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여러분 은퇴 뒤의 삶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거 아니에요? 그렇게 불쌍한 인생이 어디있어요. 고작 우리의 인생이 은퇴 뒤의 삶을 위해 전부 올인되야 돼요. 그거 아니라는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바로 그 잉여의 비축물들을 부수고 들어오는 거예요. 세리들에게는 정한 것 외에 더받지 말라 그래요. 왜 더 받아요? 잉여를 비축하기 위해서, 희망을 비전을 미래를 내가 성취하기 위해서! 그렇잖아요? 그러면서 그들의 잉여의 비축을 막고요. 군병들에게는 남의 것을 강탈하거나 거짓 고소를 해서 남의 것을 탈취하지 말고 받는 월급으로 족하게 살래요. 월급으로 충분히 족하게 사는데 왜 남의 것을 탈취하고 왜 무고한 자들을 고소해요? 왜 군인이 왜? 잉여의 것을 비축하여 미래를 자기가 준비하기 위해서! 희망을 위해서!

 

그러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한마디로 이 세상 속에서의 희망을 버리는 거란 말이에요. 잉여의 비축물을 버리라고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그 말은 너희들은 이 세상 속에서 너희들이 추구하는 희망으로 행복하기를 기대하지 말란 뜻이에요. 그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정직하게 살라는 그런 말이 아니라니깐요. 지금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완료되어지고 종결되어진 그 미래의 소망 그 영생 구원 그 소중한 유업을 소개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에요. 하느님 나라!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왔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이 세상의 희망으로 그 소망을 자꾸 막고 있냐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 이 과거에 나 옛자아 여기로 부터 출발된 미래의 되고 싶은 지점으로 향하는 나의 이 희망을 버리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그 희망을 이루느라 하느님을 잊게 된다는 거예요. 세례 요한의 세례라는게 바로 그런 거라는 거예요. 구원이라는건 바로 이 과거의 나, 옛 사람, 옛 자아, 나만을 위해 그리고 나의 능력으로 행복에 도달할려고 하는 그 모든 이 세상의 희망을 도끼로 뿌리까지 찍어 버리는 거란 뜻이에요. 그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그게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료된 이 소망 구원 영생 하느님 나라를 보기 위해선 이 세상의 희망이 자꾸 묵사발 나는 거예요. 하느님에 도끼에 의해서!

 

그때 자꾸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게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 여러분의 희망이 사라져야 돼요. 소망이 희망을 먹는 삶을 사셔야 된다 말입니다. 그게 세례라는 거예요. 인간은 그렇게 자신의 타락한 옛사람에서 비롯된 세상적 희망을 쫓아 살게 되면 결국 죽음으로 멸망으로 생을 마치게 돼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도끼 이야기하는 거예요. 찍어 버리는게 너희들의 희망을 찍어 버리는게 바로 세례다. 이 세례 받는 자는 반드시 하느님이 그렇게 만든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물세례를 이야기하면서 도끼 이야기하고 또다른 세례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루가복음 315-17절 보세요.15 백성은 기대에 차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래서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7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자신은 물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거라 그래요. 여러분은 어떤 세례를 받고 구원 받으셨어요? 성령세례 받으신 거예요. 성령세례는 갑자기 입에 거품물고 방언이나 예언이 터지는게 성령세례가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이들은 성령세례 받고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냥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 그래요. 그리고 굳이 성경에 물세례를 등장시킨다 말입니다.

요한복음 35-7절 보세요.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여러분 물세례는 예수님의 성령세례를 모형화하고 있는 거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성령세례를 받게 되는 성도는 반드시 그 물이라는 것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 에둘러 표현하는 거거든요.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서 비롯된 그 성령세례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세례라는 모형을 잘 공부해야 돼요. 그런데 그 물세례가 뭔지를 확실하게 설명해 준 곳이 있는대 베드로서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절 보세요. 20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하느님께서는 참고 기다리셨지만 그들은 끝내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 곧 여덟 명만 방주에 들어가 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21 이제는 그것이 가리키는 본형인 세례가 여러분을 구원합니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씻음은 뭐였어요? 유대인들의 율법과 전통을 통한 씻음이였죠? 하루에 열두 번씩 씼는거. 그건 육체의 더러움만 씻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물은 세례 요한이 얘기하는 그 물은 세례 그 물은 뭐라 그래요? 선한 양심. 이 애벌레 자아가 전부 하느님에 의해 기각당하고 하느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하느님의 마음 새 마음이 이 세상의 힘을 향하여 가있던 그것들에서 다 마음을 거둬들여 하느님에게로만 향하는게 세례라는 거예요. 그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물세례라는건 뭐예요? 물은 심판이잖아요. 저주잖아요. 노아의 홍수 그 물 세상에 기식하던 더러운게 전부 빠져 죽은거 아니에요. 거기에. 그러니까 저주죠, 심판이죠. 더러운건 다 빠져죽고 하느님이 선택한 하느님이 기뻐하는 거만 동동 뜨는게 물이란 말이에요. 세례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의 삶이란 뭐라는 거예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이 기뻐하지 않는게 더러운게 하느의 철장에 도끼에 의해 하나하나 까여가는 거란 말입니다. 도끼로 이마까가 아니라, 도끼로 뿌리까! 뿌리까지 까서 짤라 버리는거에요. 전부.그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것만 남기는거 그래서 여러분의 희망이 자꾸 이렇게 묵사발 되는 거예요.

 

성령세례 받은 성도는 반드시 물에 빠져 죽는 경험을 해야 돼요. 우리가 죽음이 두렵습니까? 죽어 본 경험이 없어서 죽음이 두려운 거예요. 군대 가면 막타워라는걸 타거든요. 10미터 위에 딱 올라가면 눈높이가 11미터가 되잖아요. 그게 가장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높이란 말이죠. 덜덜덜덜 떨려 더 높이 올라가면 안무서워요. 그런데 거기만 올라가면 무서워 죽겠어요. 한번 뛰어 내려보면 그 다음부턴 재미나요. 뛰어 내려 보기 전까지는 애인있습니까? 애인 이름 부르십시오? 그 사랑하는 애인 이름이 안 떨어져요. 입술이 무서워서... 뛰어 내려 보면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요. 옛사람의 희망이 찍혀지고 우리의 자아숭배 사상이 찍혀지고 하느에 의해 완성이 된 소망에 의해 우리의 삶이 잠식되어지는거 이게 세례인 거예요. 자 그게 이 성도의 삶이라면 이 세상이 추구하고 있는 그 힘과 가치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그 화려한 무덤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거 알게 되죠. 그러면 그 하느의 은혜를 그렇게 충분히 공부하여 안 사람들은 세상이 피리를 불 때 '야 돈은 이 정도 벌어야지, 니 나이에 이정도 수준의 명예는 있어야지, 야 너 망했구나' 이렇게 피리를 불 때 혹은 애곡하라고 할 때 거기에 부하뇌동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넌 나 망했다고 하는데 뭘로 망했다고 하는거야? 돈이 좀 없어졌다고? 그거 망했다고 하는거야? '나는 아니야 그로 말이암아 나는 하느님 더 많이 알게 됐다! 난 망한거 아니야!' 애곡 안하는 거예요.

 

왜 세상의 힘의 원리에 쫓겨 살아요? 여러분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하느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거예요. 그런데 그 세례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자각에서 시작이 되어서 "나는 불가능한 죄인이므로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대신에 우리 예수님께서 요나의 이야기 속에 나타난 것처럼 당신 자신이 저주의 물에 빠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정작 죽어야할 내가 살아났습니다!" 라는 복음의 이해로 이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왜 나를 대신하여 예수가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를 내 안에서 무엇이 죽어야 되는지를 이렇게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조금씩 죽어가는걸 경험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그럼 도대체 무엇이 짤라져야 되길래, 무엇이 물에 빠져 죽어야 하길래, 예수가 죽었을까?를 애벌레 자아를 폭로당하고 그게 하나하나 예수님의 도끼에 의해 까이는 삶을 사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실망스러워서 뭐가 그렇게 불만족 스러우세요? 뭔 불평이 그렇게 많습니까? 여러분 나만을 사랑하고, 내 가족만을 사랑하고, 내 집, 내 교회, 내 나라, 우리팀, 내 재산 이런 것만을 사랑하며 살았던 나의 애벌레 자아들을 폭격당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로 지어져가는거 그게 성도의 올바른 삶이에요.

 

그 삶이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기 위해 여러분의 삶에 이렇게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리하여 그 모든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거예요. 다 복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여정이 있는 자들은 세상이 환호하는 것들 속에서 오히려 외로워하게 되는거고 세상이 애곡하고 슬퍼하는 현실속에서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이 이렇게 심심한데 이렇게 헛된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고작 그런게 그렇게 기쁘고, 그런게 그렇게 재미있는데 이 세상에서 이름나겠다고 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겠다고 하니 너무 세상이 불쌍해졌어요.

 

이 세상에서 여러분 이름 남기는거 아니에요. 더욱더 털리고 비워져서 하느님이 여러분을 점령하게 하셔야 돼요. 여러분의 마음이 하느님께 송두리채 뺏기는 삶 그 삶을 사셔야 돼요. 그래서 그건 세상이 아무도 이해를 못하기에, ? 다 미친놈이라 그러니까! 그거는... 연약해지고 용서해주고 섬겨주는게 어떻게 강한거에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게 옳지 않다라고 이야기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이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하느님의 자녀에게만 그 지혜가 옳다 인정함을 받아요. 다른 이들에게는 미련하다 인정받는다구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헬라인들 히브리인들 전부에게 다 어리석은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 지혜가 옳다라고 안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삶에 하느님의 도끼가 들어오면 "하느님 또 어떤게 짤려 나가야 되나요?" 그리고 그 하느님의 도끼질을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실력자가 되세요. 그때 여러분은 진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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