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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09.19)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19 조회수1,475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8년 9월 19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제1독서 1코린 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복음 루카 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신문의 1면 헤드라인에

이런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대한민국 숙적 일본에 대패 당하다!”
이 기사는 과연 좋은 뉴스일까요?

아니면 나쁜 뉴스일까요?

아마 대부분 나쁜 뉴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나쁜 뉴스일까요?

 만약 이 기사를 일본 사람이

본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좋은 뉴스라고 하면서

기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나쁜 뉴스,

일본 사람에게는 좋은 뉴스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조건 나쁜 뉴스라고도,

또 무조건 좋은

뉴스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내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자신에게 나쁜 일이

다가왔다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이 일이

누군가에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기쁜 소식도 되고,

나쁜 소식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께 의미를 두고 있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찾으면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의미를 두고

 있지 못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주님의 말씀은 기쁜 소식이

 되지 않습니다.

커다란 짐으로만 여겨지고

세상 삶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퍼 붓게 됩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다른 삶은

내 자신이 먼저 다르게

행동해야지만 가능합니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지나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주님께

의미를 두는 변화를 통해서만

우리 삶이 행복의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피리를 불어 줄 때는

춤추며 놀아야 하고,

곡을 할 때에는 함께

슬퍼하며 울어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기뻐하지 않고,

예수님 흠집 내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것이지요.

지금 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 의미를 두고

 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의미를 두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기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고,

울어야 할 때 웃지 못하는데

어떻게 올바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의미를 두는 삶은 바로

지금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을 행복의

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매일 행복하지는 않지만,

주님이 계시니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 것.

첫인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정확성은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다.

(이드리스 샤흐)


살티 신앙 사적지.

52 살티 신앙 사적지.

신유박해(1801)와

기해박해(1839)를 거치면서

 간월, 죽림골로 숨어들었던

신자들이 경상도 지역에

본격적으로 행해진

 경신박해(1860)와

병인박해(1866)를 피해

더욱 안전한 곳을 찾다가

모여든 곳이 바로 부산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인

살티공소입니다.

 박해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맹수가 많아

사람들이 찾아들기 힘든

 은밀한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피난처였습니다.
이곳에는 이 지역에 복음이

전래된 초기부터 활동했던

김교희의 손자 김영제 베드로와

 그의 여동생 김 아가타의

묘가 있습니다.
김영제는 아버지 김상은과

함께 경신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병인박해 중에 대재

공소에서 다시 체포되었는데

마침 국가의 경사로 특사 방면되어

9개월 만에 풀려났습니다.

이후 그는 피신한 가족들을

수소문하여 살티마을로

 내려왔으나 장독이 악화되어

1876년 죽음에 이릅니다.
한편 동생 동정녀 김 아가타도

경신박해 때 자진하여

 체포되었다가 포졸들이

자신을 다른 곳으로

 팔아넘기려는 것을 알고

도망쳐 최양업 신부가 있는

 죽림골에서 은신하며 지내가

 잡혀갔던 후유증으로 1860년

최신부의 임종경을

들으며 선종하였습니다.
살티는 초대교회 때부터

이어온 교우촌이자,

최재선 주교를 포함해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소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주소는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덕현살티길 11이고,

관할 성당인 언양성당의

전화번호는 052-262-5312입니다.


부산교구 살티 신앙 사적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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