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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의 크기는 포용력의 크기와 같다
작성자김현아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23 조회수2,615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8년 나해 연중 제25주일



<사람의 크기는 포용력의 크기와 같다>



 복음: 마르코 9,30-37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림

LORENZETTI, Pietro 작, (1325)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진()나라 시황이 죽자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항우와 유방 간의 전쟁이었습니다.

 

항우와 유방은 출신부터가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우는 초나라의 반듯한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유방은 평범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항우는 사람을 제압할 정도의 외모와 기개를 갖춘 영웅이지만, 유방은 한 마을 건달로 사람을 위압할 외모나 기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능력이 특출했던 항우는 자기 자신을 너무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많았습니다. 이에 인재를 등용할 때 혈연관계를 매우 중요시 하였습니다. 유방은 이 약점을 이용하였습니다. 유방의 부하 진평이 농간을 부려 스스로 아부(亞父 : 아버지 다음 가는 분)라 부르던 모사 범증을 항우 곁에서 떠나도록 만든 것입니다.

 

반면 유방은 사람을 감싸는 포옹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재능이 포용력이었습니다. 워낙 내세울 것이 없었기에 유방은 타인의 도움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혈연관계는 아예 무시하였습니다. 그러니 곁에 뛰어나고 충성스러운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처음부터 유방을 따랐던 소하, 번쾌, 하우영은 물론이고 장량, 한신까지도 모두 그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충신들이었습니다.

 

또한 항우는 성격이 잔인하여 민심을 잃게 되었지만, 유방은 마을의 어른인 부로를 공경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둘의 싸움은 어떻게 끝났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유방의 승리로 끝났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성공과 겸손이 전혀 무관하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눈에 첫째인 사람은 모든 이들의 종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작아진 사람 안에 하느님께서 거하실 자리가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아무리 집이 크다 하여도 뱀이 살고 있다면 그 집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아도 주님을 모시면 성전이 됩니다. 온 우주보다 더 큰 하느님을 모신 집은 온 우주보다 더 큽니다.

꼴찌가 되고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포용력이 커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큰 사람은 자신을 유난히 믿기 때문에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면 화를 자주 내고 포악해지고 우울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꼴찌가 되라는 겸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포용력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겸손과 포용력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포용력이 곧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해야합니다. 자신이 크면 타인이 들어올 공간이 작아집니다.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전 주인은 내쫓아야합니다. 처음엔 누구든 나의 주인이 내가 되지만 자라면서는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이웃이 또한 나의 주인이 됩니다. 이것을 겁내면 자기 자신에게 쇄국정책을 쓰게 됩니다. 하지만 이웃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해야 내가 모든 이들의 종이 될 수 있고 하늘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작아지고 가장 약해져서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죽임까지 당해야한다고 말씀하실 때조차 누가 더 큰 사람이냐는 것을 놓고 논쟁을 벌입니다. 스스로 큰 사람이 되려면 타인을 작게 만들어야합니다. 자아의 본성은 교만이기 때문에 누구든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큰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높아지려하면 타인을 받아들일 공간을 잃습니다. 산은 높이 올라갈수록 공간이 좁아집니다. 인간도 교만해질수록 누군가를 받아들일 공간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포용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우선 받아들임을 통해서만 내가 완성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내가 주인인 상태는 뱀의 소굴이고 하느님과 사람을 받아들일 때 성전이 됨을 알아야합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커피에 우유가 섞이는 것을 두려워하면 카페라떼가 만들어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포용은 결국 자신의 변화를 만들기 때문에 자신이 변하는 게 두려우면 포용도 하지 못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폐쇄적인 어떤 사람도, 어떤 나라도 반드시 망합니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나를 만드는 것은 내가 받아들이는 사람과 사건들입니다.

 

그 다음은 내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 싫은 사람과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노력해야합니다. 누군가를 받아들이면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힘들거나 어색하지 않습니다. 명절 때가 되면 친지들 중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때가 기회입니다. 편한 사람들과 있으려고만 하면 포용력은 커지지 않습니다. 좁아진 틈을 넓히려면 강한 무엇을 넣어서 벌려야 하듯 나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 참아내는 아픔 없이는 성장할 수 없는 것이 포용력입니다.

 

누구든 자신 안에 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방에는 의자가 있습니다. 하나만 있다면 자신만 앉고 나머지는 서 있어야합니다. 포용력이 전혀 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서너 개가 있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싶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없는 시원한 공원 벤치라면 누구라도 와서 쉬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가장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렇듯 포용력은 누구든 그 사람과 머물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란 상대를 만나 내가 편안할 수 있는 능력과 같습니다. 내가 거북한데 상대가 편안할 수는 없습니다. 영성이란 혼자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영성입니다. 사람을 만나되 어린아이도 편안하게 놀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하늘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길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은 원수까지도 함께 머물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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