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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천주교회 희망의 아이콘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57주년 추모(2)
작성자박관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8-09-28 조회수1,670 추천수3 반대(0) 신고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이성례(마리아) 사이에 6형제중 장남으로 충청도 홍주의 다락골(현재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누동 새터)에서 출생하였다.


이와 관련해 최양업 신부는 다락골중에서도 새터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한마디로 그의 신앙의 뿌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던 것이다.


여기서 최양업 신부의 가문이 어떤 유래로 다락골에서 거주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소개한다.


거슬러 올라가서 그의 증조부 최한일이 동생 최한기와 함께 1787년(정조 11) 내포지방의 사도로 널리 알려졌던 이존창의 권유로 영세하면서 본격적으로 천주교 신자 가문이 되었다.


그런데 최한일은 이존창의 누이와 결혼하여 최인주를 낳았으나 애석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난의 시기가 도래하니 구체적으로 박해(신해박해 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그의 가문도 고초를 겪게 되어 최한일의 부인 이씨가 12세의 아들 최인주를 데리고 박해를 피해 서울을 떠나 충청도 홍주 다략골로 이주하면서 최양업 신부의 가문이 다락골에서 생활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조부가 되는 최인주는 비록 젊은 연령에 세상을 떠났으나 생전에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으로서 솔선수범하였으며, 특히 겸손하게 살 것을 강조하였는데 자신의 종들에게 영감 마님이라 부르지 말고 아버지,어머니라고 부르도록 하였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라 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조부의 사상이 훗날 그의 손자가 사제로 서품된 이후 사목생활하는데 있어서 핵심 포인트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최인주는 유언하기를 “먼저 하느님을 섬기는 도리를 찾고 혼인중매나 채무에 대한 보증과 다른 사람 앞에서 근본을 자랑하는 이같은 조건이 신분을 손상하는 것이니 십분조심하고 주의하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이면 최인주는 임종을 앞두고 주,성모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하는데 훗날 최양업 신부가 목자로서 12년동안 교우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다가 병으로 선종하기 직전 예수,마리아를 계속 불렀다 하니 과연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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