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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천주교회 희망의 아이콘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57주년 추모(4)
작성자박관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8-10-05 조회수1,611 추천수2 반대(0) 신고

최경환은 하느님의 영광이 삶의 목적이었으며, 이러한 영광은 애덕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식들의 교육과 가정을 돌보는 일에도 전력을 다하였는데 끊임없이 자선의 일을 하면서도 부인과 자식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정해 놓은 시간에 기도와 영적 독서를 공동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마침내 장남은 사제의 길에 도전하게 되었으며, 그 아래로 아들 4형제도 열심한 신앙생활로 하느님을 증거하였으며, 특히 막내 아들은 그 어린 나이에서 옥중에서 순교하는 길을 택하였으니 과연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최양업 신부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는지 그 내력을 자세히 소개한다.


1836년 1월 15일 조선에 입국한 신부가 있었는데 흔히 나 신부로 알려졌던 모방 신부였는데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모방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무엇보다도 중점을 두었던 것이 방인사제 양성을 목표로 한 신학생 선발이었으니 이를 통하여 볼 때 모방 신부가 당시 선견지명이 있었던 성직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러한 목표에 입각하여 최양업(토마스)이 2월 6일, 최 방지거(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김대건(안드레아)가 도착하여 모방 신부 곁에서 유학에 필요한 교육과 한문 및 라틴어를 배웠다.


그러나 모방 신부는 당시 조선의 국내사정상, 교육이 수월치 않다는 판단하에 마카오에 위치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신학생들을 파견하여 사제로 양성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니 바로 이 신학생들이 조선 최초의 신학생이면서 동시에 유학생들이었는데 조선천주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획기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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