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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10.07)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10-07 조회수1,786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8년 10월 7일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 창세 2,18-24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제2독서 히브 2,9-11

형제 여러분,

 9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복음 마르 10,2-16

그때에

2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

하고 되물으시니,

4 그들이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

 6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7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8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9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10 집에 들어갔을 때에 제자들이

 그 일에 관하여 다시 묻자,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

12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14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16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어느 형제님께서 인터넷에서

공감이 가는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남자가 살다가 너무 힘이 들 때면

지갑에 있는 와이프 사진을 꺼내본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이 사람과도 살고 있는데,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나?’
자신의 심정을 잘 말해주고

 있는 글인 것 같아서,

 아내에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아내이지만,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아주었으면 마음에서였지요.

이 글에 대한 아내의

반응은 이러했습니다.
“어? 나랑 똑같네.

나도 힘들면 당신 생각을 해.

이런 철없는

남자도 데리고 산다면서...”
나만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아내 역시

힘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나만 힘들다고,

나만 억울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남과 남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루면서 어떻게 다툼 한 번 없이

살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모든 점에서

만족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다툼이나 분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왜 이런 다툼과 분쟁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하며,

어떻게 이 문제들을 현명하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가정 안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즉, 가정 안에서부터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 역시 사랑 안에서

완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맺은 혼인이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불가해소성

(마르 10,9 참조)을

이야기하시면서 사랑의 완성이

가정 안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는

혼자 있는 아담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창세 2,18)라면서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혼자 있는 삶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상대방을 나의 걸림돌이 아니라,

나의 협력자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만 힘들고

나만 손해보고 있다는

 생각은 무엇일까요?

상대방을 나의 협력자로

보지 못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완성을 이룰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르 10,15)
어린이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이는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잠시 뒤에

오랜 친구처럼 사이좋게 놉니다.

상대의 문제점을 찾는데 힘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이 순간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린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열린 마음으로

 배우자를, 자녀를 또 부모님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런 열린 마음으로

내 이웃에게 사랑을 주고 있을까요?
히브리서의 저자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히브 2,11)라고 말합니다.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온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주님을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삶이 바로 사랑으로

함께 하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뜻인 사랑으로

철저하게 무장할 때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 닫혀 있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나만 힘들다고

나만 손해를 본다면서 이웃을

나의 걸림돌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걸림돌이 아닌 협력자인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열린

마음을 갖춘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멀리에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모든 미완성을

괴롭게 여기지 말라.

미완성에서 완성에 도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신은 일부러 인간에게 수많은

 미완성을 내려주신 것이다.

(아놀드 하우저)


어제 성지순례 오신 단체들.

70 은이, 골배마실

은이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요,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36년 모방 신부에게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곳으로서,

한국 천주교회에서 첫 번째로

사제성소의 열매를 맺은 곳입니다.
1845년 조선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 활동은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곳에서 순교 전 공식적인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곧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성장,

세례성사, 신학생 선발,

사제 서품 후 사목 활동의 직접적인

장소로서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골배마실’은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지네가 많아 ‘뱀 마을(배마실)’

이라고 불려왔습니다.

김대건(7세)의 조부 택현과

가족들은 1827년경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 배마실로

피신해 정착한 곳으로

 세례를 받지 못한 소년 김대건이

 목자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세례성사와 첫영성체를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불사르던 한국 천주교회

 첫 번째 사제성소의

거룩한 둥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은이’는 ‘숨어 있는 마을’을 의미합니다.
미사는 매일 오전 11시

(월요일 미사 없음)에 봉헌됩니다.

주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안구 양지면 은이로 182이고,

전화는 031-338-1702입니다.

 

 

 

 

 

 

 

 

수원교구 은이, 골배마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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