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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웅렬신부(익명의 크리스챤.)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10-18 조회수1,928 추천수2 반대(0) 신고

 


익명의 크리스챤.

+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 무섭지요?

지옥에 사는 구더기는 죽지도 않고

지옥의 불은 꺼지지도 않는데요.

두 눈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

보다는 외눈 가지고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낫다.

착하게 살라는 얘기죠.

군인주일이 다가오니까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어요.

83년도에 대위로 임관을 해서

전방부대에 갔어요,

이 장정들은 신병교육대에서

훈련을 받기에 초코파이 등을

가지고 미사 드리러 갑니다.

그런데 물론 신자 아닌

사람들이 더 와요.

초코파이 때문에 또,

그 시간에는 쉴 수가 있으니까요.

천주교, 개신교, 불교 중에서

제일 많이 가는 데가 어디냐?

개신교. 개신교는 일단 딱 앉아

머리만 꺾으면 끝날 때까지

누구 깨우는 사람 없어.

그 다음이 천주교.

그런데 천주교는 잘만 하면

일어나라하고

무릎 꿇으라하고. 복잡해.

제일 안 가는 데가 불교.

계속 부처님 앞에 절을 해야 돼.

미사 후 아이들이 고충은

없는지 면담을 해요.

그런데 열심인 신자아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자꾸 누가

뭘 훔쳐간대요.

숟가락을 안 잃어버리려고

목에 걸고 자도 아침에

눈을 뜨면 숟가락이 없대요.

또 옛날 군대 화장실은

유리창이 없었어요.

화장실 안에서 모자를 쓰고 있으면,

밖에서 모자를 빼간대요.

일 보다 말고 어떻게 쫓아가요?

모자도 다 비슷한데요.

숟가락, 모자 잃어버렸을 때

신부님, 어떻게 해야 돼요?

저도 가서 훔쳐야 돼요?”

이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여러분들 어떻게

대답해주실 것에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훔쳐.

원래 군대에서는

그게 자리이동 하는 거야.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거지,

군대 내에서는 훔친다는 말이

통용 안되니 마음 편안하게

가져다가 밥 먹어.”

신부님, 이제 속이 다 시원해요.

누가 가져갔는지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어쩔 수도 없었는데.

이제 마음껏 훔치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렇게 대답해줬어요.

군대 내에서는 훔치는 것이 아니라

자리이동 하는 거니

마음 편히 너도 갖다가 먹어라.

또 두 번째, 신자 군수가

신부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어왔어요.

군수이니까 각종 종교행사 때에

다녀야 되는데 초파일 되면

절에 가야돼요.

이 군수는 집안에 순교자와

복자가 있는 몇 대째 내려오는

구교집안의 신자에요.

초파일에 절에 가야되는 데,

절해야 됩니까?

절하지 말아야 됩니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저는 절하라고 했어요.

대신 절하면서 석가모니라고

하는 동양의 성인을 보내신

하느님을 생각하라 했어요.

하느님의 사랑이 자비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잖아요?

그렇게 해 보시면 주변 사람들이

열려있는 분이라고

할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군수님이 뻣뻣하게 서 있으면

분위기가 얼마나 이상하겠습니까?

지금 두 가지의 예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물처럼 유연하세요.

물은 어느 그릇에 들어가더라도

고집부리지 않습니다.

네모난 그릇에 들어가면 네모나게,

동그란 그릇에 들어가면

몸을 굽혀 동그랗게 만듭니다.

신앙을 지켜주고 성장시켜

주는 것이 법이고 제도에요.

그러나 신앙이 그 법에

묶여서는 안 됩니다.

사실 교회의 역사는

교회법이라는 것,

제도라는 것이 신앙을 지킨다고

만들어져 있었지만,

정말 많은 경우에는 신앙을

가두어두었던 때가 있었어요.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게 열려있습니다.

우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하느님의 은총은 훨씬 더 깊어요.

쪼잔한 하느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1독서에는 70인의

장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홍해를 탈출했을 때

장정만도 70만 명이에요.

딸린 식구까지 100만 명이

홍해를 건너서 시나이 광야로

나갔던 것이죠.

100만 명이 넘다보니까

얼마나 많은 시비들이 붙겠어요?

모세가 그 소송을 다 해결할 수

없기에 대신 그런 일을 해결해 줄

장로 70명을 뽑아요.

그리고 성막으로 불러서

하느님의 영을 주는데

두 사람이 안 나왔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 둘이

집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영을 받은 것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웅성 되기 시작했죠.

둘이 뭔데 모세가 부르는데 안 나와?’

눈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여호수아가 모세한테

그 두 사람 벌을 좀 내려야겠어요?’하니,

모세가 여호수아를 달래면서,

비록 성막 안에서 장로 직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 집에서 하느님의 영과

능력을 받았으니 축하해야 될 일지

시기질투 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축소시키지 말라고,

하느님은 그런 집안에 갇혀 있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모세는 참 멋쟁이에요.

선이 굵잖아요?

알다시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호수아한테

자리를 넘겨요.

40년 동안을 100만을 이끌고

고생을 하던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왕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순간에 자리를 넘기고

그 다음부터는 성경에

모세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일도 그렇지요?

오늘 복음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지만,

우리 패가 아니기에 막아

보려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아다가

혼쭐을 내야 된다고 합니까?

내버려 둬.’ 1독서에 나오는

모세와 같은 그런 말을 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버려 둬!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사랑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넓게 열려있다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다시 말하면 불교신자,

개신교 신자, 심지어 무당에게까지

하느님의 사랑은 존재합니다.

맞습니까, 틀립니까?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어요.

석가, 공자, 맹자 같은

성현들이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지옥에 가 있을까요?

세례 받은 적 없지만 착하게

살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 지옥에 가 있을까요?

우리 그런 하느님 믿으려고

세례 받고 사는 것 아니죠?

크리스챤들은 두 종류에요.

세례 받고 교적에 있는 크리스챤과

익명의 크리스챤이 있어요.

세례 받은 적은 없지만 삶 자체가

양심을 따라서 정말 착하게 살면서,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교회를 향하고 있고,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가는

소위 세례 받지 않은 익명의

크리스챤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 너무 많아요.

그분들은 보편적인 구세사 안에

포함되어 있죠.

교회 밖에는 절대 구원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을 우리에게

착하게 살기를 아주 간절하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무서울 만큼 강하게 얘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어떤 경우에든

선을 행하는 사람을 상을 받겠지만,

누구를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빠져나가지도 못하는 큰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질 것이다.

그곳에서 구더기가

네 눈을 파먹을 것인데,

그 구더기들은 죽지도 않을 것이며

네 몸뚱이를 태우는 불은

꺼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착하게 살아야 된다.

하느님의 은혜는 어떤 법이나

제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초월합니다.

물론 법이나 제도가

가치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죠.

법이나 제도는 하느님의 은혜를

보다 효율적으로 보존하는 데

그 생명과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법을

성실히 지키고 제도를

존경하고 존중하되,

먼저 내 양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우선이 되어야 됩니다.

세상 법보다 양심의 법이

더 우선입니다.

옛날에 독일 나치(Nazis)

유태인 6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들은

법대로 처리했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도 전쟁 때 얼마나

많은 한국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자기네 일본법대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법은

주관적입니다.

그 법보다 훨씬 위에 있는

내 양심의 법, 열려있는 법,

하느님의 법을 찾아가야 됩니다.

서두에도 얘기했지만,

법이나 제도가 신앙을 지키는

울타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교회의 역사를 보면 신앙이

그 울타리에 갇혀서 숨을 못 쉬고

죽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여러분 각자 각자도 자기만의 법,

자기만의 잣대가 있을 겁니다.

문제는 눈금이 맞지 않는

잣대를 가지고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당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우리 가정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잣대는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고 하느님의 잣대로

바꾸도록 노력합시다.아멘.

2018년 연중 제 26주일(9/30)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photo by - 느티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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