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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불 (루카 12,49-5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8-10-25 조회수2,362 추천수1 반대(0) 신고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불 (루카 12,49-53)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49~50)

 

루카 복음 12장 49~53절은 복음이 확산될 때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진리와 비진리의 처절한 투쟁과 충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루카 복음 12장 49절과 5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구속사업을 통한

구원의 복음 전파에 수반되는 현상을 '불'과 '세례'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이미 타올랐으면'으로 번역된 '에이 에데 아넵테'(ei ede anepthe;

(if) it were already blazing)에서 '아넵테'(anepthe)동사가 '불이 붙었다'는

의미를 지닌 부정(不定)과거형으로 완전히 불붙은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성서학계에서는 이미 불이 붙었으나 완전하게 붙어

더 잘 타오르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본다.

 

여기서 '불'로 번역된 '퓌르'(pyr; fire)는 신앙인과 불신앙인간에 조성되는

적대감이나 박해로 인해 믿음의 자녀들이 겪게 되는 '고난'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불'과 같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과 미움, 죄악과 불의 그리고 박해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만, 바로 그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난의 '세례'가

믿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복락과 축복이 되고,

고난과 박해를 저지른 자들에게는 '심판'의 '불'이 됨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천상과 영원을 바라보며,

하나 밖에 없는 '하느님의 말씀'이요,'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기쁘게 고난을 감수할 의지와 신앙이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당장에는 그 진리 때문에 세속화(世俗化)되고 인본주의(人本主義)로 흐르는

교회 안에서조차 따돌림당하고 배척 받는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스테파노의 순교 형장을 천상에서 서서 바라보시고 동참하시는 것

(사도7,55~56)으로 위로를 삼고, 보이지 않는 주님께만 인정받는 자세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50)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길을 걸어가지 않으시면, 인류가

아버지 하느님 대전에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이 없다.

 

당신의 천주성(神性)으로서 아담으로부터 인류 종말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과거에 지었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 지을 모든 죄들이

당신의 전지(全知)하심으로 다 들어오며 다 보고계신다.

 

그 안에는 나의 죄도, 너의 죄도, 우리 모두의 죄도 다 들어있다.

 

그러기에 이 겟세마니의 밤은 참으로 괴롭고 가슴아픈 밤이다.

 

이제 이 인간들이 저지르는 모든 죄를 무죄(無罪)하신 당신의 인성(人性)으로

자발적으로 대속(代贖)해야만 아버지 하느님의 공의(公義)가 채워지고,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모독당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선성(善性)과

성성(聖性)이 회복되신다.

 

죄(罪)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인간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참으로 견디기 힘들어 하시는 밤이다.

겟세마니의 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당신의 나약한

인성(人性) 사이의 전쟁터이다.

이 겟세마니의 밤은 예수님 당신의 천주성(天主性)과

인성(人性) 사이의 갈등과 충돌의 시간이다.

 

그러나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는

이 대속의 십자가의 길은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이요, 예수님 당신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요 사명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대속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당신 사명인 인류구속사업을 이루실 날을 답답한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표현하고 계신다.

 

바로 그 말씀이 루카 복음 12장 49절의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how I wish it were already blazing!)

그리고 50절의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how great is my anguish until it is accomplished!)로 표현된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세례'는 일차적으로 인류의 죄로 인해

당해야 하시는 고난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는 고난의 절정인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의 죽음을 알고 계셨고, 이것을 이룰 날이

속히 오기를 답답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대속적 죽음을 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세례(洗禮)란 용어로

표현한 또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

세례가 갖는 씻음(정화)과 정화의 의미 가운데서

일치(一致)의 의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세례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지체)이 되는 심오한 의미가 있고,

그리스도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된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 삶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루카 복음 12장 49~53절에서 당신이 감당하실 고난을

보여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그날까지 믿음의 자녀들은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것과 같은 고난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보다 나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나을 수 없듯이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걸어가야만 한다.

 

이 땅에서 고난, 고난, 고난 또 고난은 없다.

또한 이 땅에서 영광, 영광, 영광 또 영광도 없다.

 

고난 한번, 영광 한번, 영광 한번, 고난 한번이다.

그래야만 절망하지 않고, 그래야만 겸손하게

성소(聖召)와 소명(召命)의 삶을 잘 마칠 수 있다.

 

특별히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시한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 때문에

억울한 고통, 터무니 없는 사악한 고통을 겪고 있는 믿음의 자녀들은

예수님께서 간택하신 특별히 사랑받는 제자요, 특별 관리 대상자들이며,

성령과 말씀과 희생 제사의 도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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