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8년 11월 2일/셋째 미사(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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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8-11-02 | 조회수1,852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8년 11월 2일 [(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 셋째 미사] (『로마 미사 경본』: 943-946면 『미사 독서』3: 460-470면 )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이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스페인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말씀의초대 지혜서의 저자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라고 한다. (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믿는다고 한다.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를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유하신다. ◎제1독서◎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 그분께 사랑받던 그는 자리가 옮겨졌다. 변질시키거나 거짓이 그의 영혼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들어 올려진 것이다. 무색하게 만들고 정신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다다른 그는 오랜 세월을 채운 셈이다. 그 영혼이 마음에 들어 서둘러 데려가셨다.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지고 이들을 돌보신다는 것이다. ◎화답송◎ 시편 23(22),1-3.4.5.6 (◎ 1 또는 4ㄱㄴㄷ) 아쉬울 것 없어라.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고,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제2독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말씀입니다. 6,3-9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되살아나신 것처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그리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함께 죽었으니 우리는 믿습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군림하지 못합니다. ◎복음환호송◎ 필리 3,20 참조 하늘에서 구세주로 오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네. ◎복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복음입니다. 25,1-13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비길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사이에 신랑이 왔다.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너희에게 말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의묵상◎ 열 처녀의 비유는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를 일깨워 주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맞이할 신랑은 이 세상을 마치고 만나 뵙게 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시간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늘 깨어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신랑 때문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당황하는 어리석은 처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말미암아 장수의 세상에 들어섰습니다. 그렇다고 오래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지혜서는 “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고 말하고,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고 합니다. 오래 살면서 추하게 늙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악에 타협하고 살아 이성이 변질되면 “좋은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솟구치는 욕망은 순수한 정신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아야 할 물질적인 필요는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며, 병들고 외로운 사람이 실패한 인생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행복이란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상의 작은 기쁨이 누적되어 찾아오는 만족감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의 위로, 작은 물질적 나눔, 환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 희망의 복음이 세상 너머의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시편 저자의 노래처럼,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시기에, 세상살이가 각박해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그 행복을 찾아 나갑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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