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8년 11월 10일(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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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8-11-10 | 조회수1,549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8년 11월 10일 [(백)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는 에우티게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오늘 전례 레오 교황은 400년 무렵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440년 식스토 3세 교황의 뒤를 이은 그는 행정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깊이 있는 설교로도 유명하였다. 레오 교황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일치와 정통 신앙을 수호하고자 이단을 물리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재임 중인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는 에우티게스, 네스토리우스 등의 이단을 단죄하고 정통 교회를 수호하였다. 461년에 선종한 레오 교황을 1754년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말씀의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은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안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라고 하시며,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고 하신다. ◎제1독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말씀입니다. 4,10-19 마음을 마침내 다시 한번 보여 주었기에, 크게 기뻐합니다. 나를 생각해 주었지만 없었던 것입니다.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 관계에 있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음을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두어 번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돌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넉넉하게 되었습니다. 보낸 것을 받아 풍족합니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훌륭한 제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화답송◎ 시편 112(111), 1ㄴㄷ-2.5-6.8ㄱ과 9(◎ 1ㄴ) 주님을 경외하는 이!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복음환호송◎ 2코린 8,9 참조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복음◎ <너희가 불의한 재물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복음입니다. 16,9ㄴ-15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친구들을 만들어라.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큰일에도 불의하다.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너희의 몫을 내주겠느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다른 쪽은 사랑하며, 업신여기게 된다. 함께 섬길 수 없다.”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들에게 이르셨다.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너희 마음을 아신다.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오늘의묵상◎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은 숨 쉬는 공기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주변에 좋은 것이 넘쳐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경제 구조가 인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최상의 제도는 아닙니다. 적자생존과 무한 경쟁을 부추기고 금융 제도의 조작과 기만으로 서민들이 평생 채무를 지고 가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극화의 현실을 조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 (1티모 6,10)라고 지적하였지만, 살아가면서 돈에 대한 애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 한 쪽이 시려 옵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성당에 나갈 여유도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냉담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교회의 모습이나, 정작 성당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봉사도 하고, 신부님 주변에서 어울려 지내는 것도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본당 사제가 교회를 운영하고 사목하는 데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 보니 돈 있는 신자들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생각하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 말씀을 듣고 비웃었던 것이 남의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위로가 됩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자기 비움을 삶에서 체험해 본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인 듯 들립니다. 우리도 무소유의 자유, 나눔의 기쁨, 작은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울 때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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