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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11.11)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11 조회수1,720 추천수5 반대(0) 신고

 


2018년 11월 11일

연중 제32주일

제1독서 1열왕 17,10-16

그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10 일어나 사렙타로 갔다.

그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다.
11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말하였다.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12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
13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14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다.

과연 그 여자와 엘리야와

그 여자의 집안은 오랫동안

 먹을 것이 있었다.

 16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제2독서 히브 9,24-28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복음 마르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는

영역에서 아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과 대화를

나누다가 생뚱맞게 로또 복권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자신이 요즘에 로또 복권을

연구하고 있다면서, 이제까지

 당첨된 숫자를 보면

어떤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패턴에 맞춰서

로또 복권을 사다보면 당첨 확률을

높일 수가 있다는 것이었지요.

 이 패턴을 발견하느라 하던 일도

 그만두어서 많이 힘들었지만,

앞으로 거둬들이는 일만 남았다며

제게 안수를 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쓸데없는 ‘열심’이 아닐까요?
술을 열심히 마시는 분을

 만난 기억도 납니다.

아주 열심히 술을 마셔서

일주일에 7일 동안 술을

마신다고 자랑까지 하십니다.

술을 마시면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즐겁고 가지고 있던

 고민에서 해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술에서 깨면 어떨까요?

숙취로 몸이 아픈 것뿐만 아니라,

다시 기억되는 고민에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역시 필요 없는 ‘열심’입니다.
사실 우리는 ‘열심’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열심’을 어느 일에 사용하고

있었는지를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지금의 자리에서 더욱 나아가

성장할 수 있는 부분에서 ‘열심’이라는

정성을 쏟아 부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쓸데없고 필요 없는 ‘열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얼마 전에 교구 성직자 묘역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에는 전임 교구장 주교님을

비롯해서 선배, 동기, 후배

신부님들이 묻혀있습니다.

이 세상 삶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지만,

 결국은 이렇게 모두 묻혀서

주님 곁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삶보다, 주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열심’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쓸데없는 것에 ‘열심’인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루카 12,38-40)
남에게 보이는데 ‘열심’인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위선으로 가득 찬

‘열심’은 결국은 단죄를 받는

쓸데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십니다.

그녀는 보이기 위한

봉헌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 안 되는

 봉헌이어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그녀에게는 생활비 모두를

넣는 봉헌을 했습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열심’에서

나온 봉헌이었지요.
제1독서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야 예언자에게

자신들의 마지막으로 먹을

양식까지 바친 사렙타의

과부는 어떠했습니까?

그녀의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1열왕 17,16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 최선을 다한

봉헌은 결코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움을 줍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히브 9,28).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당시의 사람들은 비웃었지요.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신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끄는 가장 큰]

풍요로움을 가져왔습니다.
세상 삶에 열심히 모든 것을

 쏟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주님께

 대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주님의 뜻을 다르기보다는

세상의 가치만을 쫓고 있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세상의 가치만을

쫓는 것은 주님의 마음에 드는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다시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봉헌할 수 있는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떠올려보십시오.

과연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받아주실까요? 우

리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의 삶과 하늘나라에서의

삶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일 아침 당신 앞에

돈을 벌어야 할 24시간이 아닌,

 살아야 할 24시간이 펼쳐진다.

달아나고 싶은 유혹에 지지 말고,

지금을 생생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당신이 투자할 것은

돈이 아니라 당신의 삶 자체다.

(틱낫한)



 

 






갑곶성지에서....

105 대정(정난주 묘)

정난주 마리아는 정약현의 장녀로서,

15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던

황사영 알렉시오의 부인입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황사영은 조선 교회의 실상을

외부에 알리고자 배론의 토굴에서

중국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백서를 작성합니다.

하지만 백서는 주교에게

발송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 때문에 황사영은 순교하게 됩니다.

또한 그의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에,

부인 정난주는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정난주는 1801년 음력 11월 21일

두 살 난 아들 경한을 품에 안고

귀양길에 올랐으며,

추자도에 이르러 인적이 없는 해안가

갯바위에 아들을 내려놓고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관비 신분으로 떨어진 정난주는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냅니다.

깊은 믿음과 풍부한 교양과 학식으로

이웃들의 칭송을 받는 가운데 37년을

살다가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녀를

양모처럼 보양하던 집주인과

이웃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들판에 매장하였습니다.

(원래 노비는 묘가 없으나 정난주는

그 집의 아들을 극진히 보살펴,

정난주가 죽자 에를 다하라고 하여

묻어주어 묘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순교를 하지는 않았으나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습니다.
주소는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10이고,

관할은 모슬포 성당으로

전화는 064-794-2074입니다.

 

 

 

 

 

제주교구 대정성지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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