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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지금도 그 열에 아홉 격인 우리는 / 연중 제32주간 수요일
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14 조회수1,712 추천수1 반대(1)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병 환자 열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큰 소리로 외친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들의 절박한 외침과 딱한 처지를 헤아리신 그분께서는 그들을 낫게 하신다. 그리고 사제에게 가서 정결해진 것을 확인받도록 하셨다. 당시에 나병이 나았더라도 공인을 받아야 했기에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라.’라고 하셨으리라. 하지만 병이 낫자, 예수님께 되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은 몇 명이나? 겨우 한 명뿐,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다. 치유 내용은 여기까지가 다다.

 

그러나 여기에 더 중요한 게 있음을 느끼자. 은총에 대한 감사이다.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사제의 선언을 들었을 때 그들 심정은 어땠을까? 우리도 상상할 수 있다. 그들 모두가 눈물 흘리며 무릎 꿇었을 거다. 그 판단을 내린 사제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사를 드렸으리라. ‘이젠 병이 나았다. 이젠 나병 환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벅차,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족을 떠올리면서 그들 가슴을 부풀게 했으리라. 그런데 은총의 감사를 드린 이는 열에 단 한 사람, 그토록 애원한 그들이었건만 아홉은 외면했다.

 

그들은 왜 예수님께 가지 못했을까? 아마도 너무 기뻐서? 벅찬 감정에 취해 순간적으로 예수님을 잊어버렸기에. 아니면 병이 나은 것에 너무 놀란 나머지 판단력을 상실했기에. 어떻든 그들은 은혜를 망각하였다. 은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까? 아무리 작은 은총이라도 감사 없이는 더 큰 축복마저 스스로 막는 꼴이다. 열에 그 아홉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지금의 우리 모습일 수 있는 그들이다.

 

우리 안에도 이런 요소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급할 때면 주님, 주님!” 부르다가도, 막상 문제가 해결되면,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을 때가 종종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병이 나아 예수님께 감사드리러 온 사마리아 인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우리 삶에도 참으로 남의 도움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뜻하지 않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것들은 쉽게 잊어버리고, 오히려 다른 이들로부터 서운했던 경우, 상처받은 것들만 기억할 때가 더 많은 듯하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런데도 얼마나 이를 깨닫고 감사를 드렸는지 차근히 성찰해 보았으면 한다. 사실 우리란 도대체 누구인가? ‘저희는 쓸모없는 종,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우리 아닌가? 나병 환자의 치유와 사회적 지위의 회복은 치유의 기적보다도 더 큰 감사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이다. 감사의 삶은 우리를 전혀 새롭게 바꾸리라. 우리는 미사 때마다 감사송을 바친다. 이처럼 감사는 그분께 드려야 할 첫째 의무이자 마땅한 도리일 게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치유의 은총을 저버린 그 나병 환자 열에 아홉 격인 이가 우리인지를 묵상해봐야 하리라. 되돌아 와 예수님께 큰 감사를 올린 그 하나라도 되고자, 이 시각 스스로 다짐을 해보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나병 환자,자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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