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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24 조회수1,707 추천수13 반대(0)

 

연수의 막바지입니다. 이번에는 시편을 통해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였지만 피정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의를 하시는 노사제의 따뜻함과 인자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시편 8장을 함께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어린이, 젖먹이들이 노래합니다.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하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신부님은 부르심을 받은 사제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여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축복을 신자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찬미하는 하느님은 능력과 업적 때문에 찬미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을 귀하게 여겨 주시고, 존귀의 관과 영예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먼지와 같은 인간에게 권한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권능과 업적 때문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유를 다르게 보았습니다. 미천한 인간을 축복해 주시고, 권위를 주시고, 영예롭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역시 우리보다 못한 이들, 우리보다 약한 이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귀의 관을 주며, 영예를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제는 기능적으로 잘 살아야 할 것입니다. 강론을 잘하고, 신자들과 친교를 맺고, 성사를 정성껏 집전하고, 행정을 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사제는 존재론적으로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면 함께 하고 싶고,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지듯이, 사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서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져야 합니다. 신자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기능적인 사제이기 전에 존재론적인 사제라고 합니다. 기능적인 사제는 존재론적인 사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존재론적인 사제는 기능적인 사제의 직무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일은 결과가 주어지고, 결과는 평가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 평가에 따라서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실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는 그 자체로 향기가 나기에 결과를 가지고 평가를 내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제게 큰 가르침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속성은 자비하심에 있다고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해 주시고, 우리의 허물까지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자비라는 말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태아를 위해서는 모든 수고와 아픔을 감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분이시니,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지금 강도를 당해서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자연재해, 전쟁, 폭력, 난민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교황님들께서는 그런 상황에서 교회는 더욱 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무한경쟁의 수렁에서 자비의 꽃을 피워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이 열매 맺도록 표징을 보여야 한다고 합니다. 희망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제는 능력과 업적을 드러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제와 함께 하는 신앙 공동체가 사제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볼 수 있다면 그 공동체는 이미 이 세상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이란 말의 뜻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어서다. 다시 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낡은 관습과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부활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잘못된 틀을 벗어버리고 사랑과 희망의 날개를 얻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갈릴래아로 가라!’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던 곳입니다. 절망 중에 있던 사람들에게,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람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십자가의 끝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에 대한 용서입니다. 분노와 원망을 던져버리고, 화해와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몸의 변화가 부활이기도 하지만,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부활의 시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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