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18년 11월 24일(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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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18-11-24 | 조회수1,49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18년 11월 24일 [(홍)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1785년 베트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제가 된 그는 베트남의 여러 지역에서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펼쳤다. 베트남 교회의 박해 시기에 교회의 주요 인물이었던 안드레아 둥락 신부는 관헌들의 끈질긴 추적으로 체포되어,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비롯한 베트남의 순교자들을 시성하였다. 말씀의초대 요한 사도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힌 두 예언자가 죽음을 당한 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에서는 천사들과 같아져서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 ◎제1독서◎ <그 두 예언자는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습니다.> 말씀입니다. 11,4-12 들려왔습니다.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예언하는 동안 비가 내리지 않게 하늘을 닫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이 땅을 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한길에 내버려질 것입니다. 소돔이라고도 하고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주검을 바라보면서, 못하게 할 것입니다.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지난 뒤에 하느님에게서 생명의 숨이 나와 그들에게 들어가니,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고 외치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화답송◎ 시편 144(143),1.2.9-10(◎ 1ㄱ) 그분은 내 손가락에 싸움을, 내 손에 전쟁을 가르치셨네.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나의 성채, 나의 구원자, 나의 방패, 나의 피난처, 민 족들을 내 밑에 굴복시키셨네.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새로운 노래 부르오리다.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부르오리다. 당신은 임금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종 다윗을 구하시나이다. ◎ 나의 반석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복음환호송◎ 2티모 1,10 참조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복음입니다. 20,27-40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아내를 맞아들여 주어야 한다.’고 놓았습니다. 있었습니다.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 더 이상 묻지 못하였다. ◎오늘의묵상◎ 누구나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일은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 나에게 확신을 심어 줄 수는 있지만, 저마다의 기대와 상상이 다르기에 모든 체험은 나에게 언제나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려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탓하십니다. 말미암아 맺고 풀리는 불교적 세계관과는 다릅니다. 부활은 차원이 다른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느님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부활의 세상을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실 제로 어떤 것인지 직접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로 말씀하셨지, 그 나라의 실체를 인간에게 직접 보여 주신 적은 없습니다. 부활한 인간의 모습을 믿는 것이 허황된 상상에 불과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요한이 묵시록에서 말한 수많은 상징들은 원수인 사탄을 이겨 내고 하느님의 영광을 알려 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표징을 통하여 실체를 바라보기에 표징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현실을 이해하고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모순의 표징들 속에서도 하느님의 선과 자비가 승리하고 있음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부활은 죽음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는 두려움이 아니며, 세상의 악과 사탄이 결코 하느님의 자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산 이들의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서 하늘 나라를 맛보는 일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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