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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
작성자조재형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25 조회수2,043 추천수11 반대(0)

 

강사 신부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971년 미국으로 유학 갔을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풍요로운 미국에서 가난한 아프리카의 참담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풍요로운 미국과 가난한 아프리카의 상황을 허락하시는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신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제로서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미국의 현지인들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한국의 가난한 아이를 입양하려는 따뜻한 이웃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웃은 법률을 배우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온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다른 일을 할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이들도 한국 동요를 배우면서 한국에서 온 아이와 대화를 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집을 방문했는데 아이의 아빠가 먼저 인사 온 아이에게만 과자를 주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렇게 하면 과자를 받지 못한 아이가 서운해 할 거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아빠는 뜻밖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나눠 주니까 서로 나눌 줄을 모르더랍니다. 누가 오던지 먼저 오는 아이에게 주었더니 형제들이 서로 나누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나누는 과정을 통해서 형제들은 서로의 사랑과 관심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위한 헌신과 노력이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서로의 능력과 재능이 다른 것은 빼앗으라는 것이 아니고, 서로 도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평등한 삶을 주신다면 이것은 진정한 평등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로봇처럼 70억이 같은 삶의 질을 가진다면 행복할 것인가? 우리끼리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인간다운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식탁을 만들어 놓았는데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욕심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불의가 존재하는 것은 하느님의 문제가 아니라,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비를 실천하지 않으면 가난한 이들이 교회를 떠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 나누도록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것입니다. 돕는 것은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정의란 그들의 것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계산은 잔고가 많으면 흑자이지만 하느님의 계산은 받은 것을 적게 나누는 것, 그래서 내 능력의 잔고가 남은 것이 적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쟁력은 협동으로 나옵니다. 백지장도 함께 들면 좋다고 합니다. 함께 나누면서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봅니다. 경쟁력은 경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협동에서 나옵니다. 경쟁은 적을 만들고 협동은 친구를 만듭니다. 사랑과 나눔은 공감 능력에서 나옵니다.

 

신구약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이고, 메시아의 시대에는 그들의 처지가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시작을 하셨고, 제자들에게 과업을 맡겨 주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셨고,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 사목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가난에는 물질적인 가난이 있고, 영적인 가난이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물질의 유무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 하느님을 조롱하는 사람을 부유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나안 정착은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멀어지고, 인간관계가 조직화됨으로서 이 세상을 순례의 여정이라고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 인간 상호관계의 회복을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의 친구라고 합니다. 메시아를 보내는데 가난한 이들이 구원받습니다.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자리가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들은 가난한 이들이었고, 그들은 대림(待臨)을 살고 있습니다.

 

드디어 메시아가 오십니다. 성모님은 마음이 가난한 이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응답은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임을 믿고, 하느님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성모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성모님을 어머니로 선택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가난한 이와 부유한 이의 처지가 바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초대 교회는 찬미가를 성모님의 노래로 함께 했습니다.

 

부유한 이들은 메시아의 탄생을 알지 못하고 경배하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아보고 경배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오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 선포였습니다. 그리스도 왕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 왕이 어떤 왕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그리스도 왕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그리스도 왕을 따를 수 있습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왕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그리스도 왕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왕 때문에 박해를 받고, 모욕을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 왕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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