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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함정과 이정표
작성자임성빈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25 조회수1,572 추천수0 반대(0) 신고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신명기 6,4-5)

오로지 직진만 있을뿐인 인생길을 감에 있어

신앙의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인도해 줄 수 있는 확실한 이정표로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의 이 계명을 되짚어 주십니다.

바로 첫째가는 계명라고 하십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율법학자는 당시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방법은

자기보다 힘이 없는 동물을 잡아 그것을 불에 태워 연기를 피워올리는 일,

곧 번제물을 바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로써 죄를 용서받는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 율법학자는 정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고, 이에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여쭈어 본 것이지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조항은 613가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조항들을 기억하고 지키기에도 벅찼기에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 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나마 글을 깨치지 못한 대부분의 군중, 안식일에도 일해야 하는

가난한 군중에게 그 율법 조항들을 모두 알고 지키는 일은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세세한 율법조항들,

사실 그들은 그 조항들을 지키는 일로써

가장 큰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많은 계명들을 지키기엔 진정

마음과 목숨과 정성과 힘을 모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니 마음과 목숨과 정성과 힘을 다하기 위해

그 많은 조항들이 필요해는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하느님,

껴안을 수도, 다가가 안길 수도 없는 분, 그러한 분을 사랑할 길이 없어

그들에게는 눈에 드러나고 확인할 수 있는 조항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 깊은 함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그런 한계 안에 갖힌 이들이

타인의 어깨에 걸머지울 숱한 율법 조항들을 만든 그 사회의 지도자들이었다 함은

참으로 커다란 부조리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온갖 율법조항들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신앙심의 척도로 삼았던 그들,

율법을 지키는 일은 드러내어야 할 자랑거리였으며

드러낼 것이 없는 자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이 허영으로 둔갑했습니다.

그 율법학자는 그것을 아프도록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 깨인 의식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확인받고 기쁨에 차 대답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분뿐이시고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가장 큰 첫째 계명인 하느님께 대한 사랑,

사실 아무 율법도 갖고 있지 않다 할 우리들에게

그 사랑은 어떤 모습을 지닐지 생각해 봅니다.

언듯 생각하기에 율법이 없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가시적인 영역 저 너머의 막연한 관념의 세계에 머무는 듯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가지 기도와 온갖 전례들에 숨어계시는 하느님,

자기들끼리 서로 사랑하기에도 서툰 인간들에게,

사랑에 대한 명확한 이해도 갖추지 못한 인간들에게,

그분께 대한 사랑은 신앙의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우리의 예수님께서 그렇기에 두번째 계명을 주십니다.

신명기의 오래 된 계명을 이 두번째 계명으로써 비로소 완성시켜 주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 22,39)

 

이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이가

성경 전체에서 누가 또 있겠는지요?

나아가 "둘째 계명도 이와 같다"는 말씀은 우리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결코 두 가지의 다른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요?

하느님을 사랑함이 곧 이웃사랑으로 이어지고 이웃에 대한 사랑이

곧 하느님을 향한 사랑임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결국 우리 신앙의 이정표는 지극히 구체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이웃을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는 일,

수월치 않은 일이지만 결코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따스한 온기로 느껴지고, 가슴을 참된 행복으로 채워주는 사랑,

뜨거운 눈물과 기쁨으로 함께하는 사랑,

궁극적으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놓을 수 있으리만치

천상의 행복을 알게하는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율법 없이는 하느님을 사랑할 길을 몰랐던 숱한 종교인들은

상상도 못할 자유를 누립니다.

그리하여 어거스틴 성인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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