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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11.26)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26 조회수1,670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8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월요일

제1독서 묵시 14,1-3.4ㄴ-5

나 요한이

1 보니 어린양이

시온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2 그리고 큰 물소리 같기도 하고

요란한 천둥소리 같기도 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들은 그 목소리는

또 수금을 타며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3 그들은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땅으로부터 속량된

 십사만 사천 명 말고는

 아무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4 그들은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습니다.

5 그들의 입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루카 2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2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외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마을에 아침마다 침대

주위를 수차례 돌고서야

일과를 시작하는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해서

동네 의사를 찾아가서

상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의사의 말을 듣고

 강제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묶어 두었습니다.

 사실 이 동네 의사는

정신과 전공의가 아니었습니다.

워낙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라서

정신과 의사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도 마을에서는 실력 좋은

의사라고 평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랐습니다.
얼마 뒤, 아이의 이 습관을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부모는 너무나도 기뻤지요.

의사에게 감사의 인사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병을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이의 행동 자체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아이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그 원인을 먼저

찾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찾기보다

무조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에만 집중했던 것이지요.
나중에 아이의 일기를 통해

침대 주위를 수차례 돌았던 것은

 심리적인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 나름대로는 침대 주위를

돌면서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했던 것이었는데,

이를 하지 못하게 하니 도저히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의 원인은 보지 않고

결과만을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과 행동에 대해

무조건 틀렸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말과 행동을 하게끔 했던

문제의 원인을 찾으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부자의 헌금과

빈곤한 과부의 헌금이 비교되어

등장합니다.

 여기서 칭찬하는 사람은

많은 헌금을 했던 부자가 아닌,

아주 적은 헌금을 한 과부였습니다.

아마 많은 헌금을 한 부자가

더 눈에 띄었을 것입니다.

헌금의 액수만 보고서 ‘대단하다’

라고 말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헌금의 액수를

 보시지 않고 그 헌금이 있기까지의

 과부의 정성을 보셨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수단이나 방법은 어찌 되었든 간에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결과에 늘 주목합니다.

이에 반해서 주님께서는

결과보다는 정성이 담긴

과정에 더 주목하십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다른 이에 대해서

 결과만을 보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정을 바라보고 사랑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때 주님을 닮은

참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은

잔잔한 바다처럼

고요한 마음으로

수많은 이를 포용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수리 들어갔던 기도하시는 예수님 상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적정거리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고슴도치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적정거리를 찾아 모인다.”
가까이 가자니 가시에

찔릴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지자니

춥겠지요.

그래서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적정거리를 두고서

모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적정거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너무 많이 기대면

분명히 서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대고 있는 사람은 자기를

보살펴주지 않는다고,

또 기대주는 사람은

내게만 의지한다면서

상처를 이야기합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세상에 혼자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리고 완전히 의지하고

또 의지해주면서

살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적정거리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서로가 상처를 받기보다는

서로가 힘이 되는 적정거리.

그 거리는 아픔을 겪으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갑곶성지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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