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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천주교회 희망의 아이콘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57주년 추모(8)
작성자박관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26 조회수1,598 추천수2 반대(0) 신고

최양업,김대건 소년 신학생들이 전공한 것은 성직자가 되기 위한 철학과 신학이었지만, 그것을 익히기 위하여 기초교양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서양 학문의 초,중등 과정을 거쳐야 하였으니 실로 단시일내에 많은 학문을 소화해야만 하였다.


아울러 그들의 면학 장소가 마카오나 필리핀 같이 국제색이 짙은 도시인 만큼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이제 그들은 쇄국 조선에서 탈피하여 마카오에서의 면학 생활을 통하여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해박한 서구 학식을 겸비한 청년 교양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1842년에 들어서 신학생들이 계속 면학을 할 수 없는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한다.


1840년에 청국 침략의 기회를 노리던 영국에 의하여 아편전쟁이 발생하였으며, 그 이듬해 연초에 일단락될 것으로 예상하였던 전쟁이 1842년에 접어 들면서 다시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는 아편전쟁으로 영국이 청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하고 루이 필립 황제가 3척의 군함을 극동해역으로 파견하여 청국과 조선의 사정을 정찰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그 군함의 사령관이 세실 제독이었다.


그런데 세실 제독은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를 찾아 리부아 신부에게 자신의 원정계획을 알리고 조선인 신학생 1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 리부아 신부는 고심한 끝에 김대건과 조선선교사로 임명된 메스트르 신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김대건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으로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에리곤호에 탑승하여 떠났으며, 홀로 마카오에 남게 된 최양업은 5개월후인 7월 17일에 요동교구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파브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하여 8월 23일 상해관문인 오송항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김대건을 6개월만에 다시 만나는 기쁨을 나누었으나 프랑스 함대가 중국과 남경조약을 체결하면서 이권을 인정받게 되자 더 이상의 북상을 포기하고 조선으로 향하는 것을 중단하였다.


이러한 변수가 발생한 상황에서 신학생들은 프랑스 군함의 도움으로 중국배 한척을 구하여 10월 2일 요동에 도착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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