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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과 예수님의 분노
작성자임성빈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26 조회수2,984 추천수1 반대(0) 신고

인도의 시인 타고르의 기탄잘리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답니다.

거지인 자신이 이곳저곳 구걸을 하며 다니던 중

멀리서 황금마차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곧 희망에 부풉니다.

'분명 저 황금마차에는 왕이 탔을 것이고 그 왕이 나에게 자비를 베풀면,

거지로서의 내 불행한 삶은 끝날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입니다.

이윽고 그 황금마차는 거지 앞에 와 멈춥니다.

그리고 그 마차에 탄 왕은 미소를 띄며 거지를 바라봅니다.

왕은 곧 마차에서 내려 그 거지에게 손을 내밀며 말합니다.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거지는 깜짝 놀랍니다. 왕이 거지에게 동냥을 하다니.....

거지는 얼떨결에 조금 전 구걸해 온 한 줌을 쌀 중에 한 톨을 왕에게 줍니다.

실망과 불만의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그날 저녁, 자신이 묶을 곳에 돌아와 온종일 구걸해 온 것을 자루에서 쏟아봅니다.

한 줌의 쌀이 나오고 그 중 단 한 톨의 쌀이 황금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제서야 알아챈 거지는 원통해하며 후회합니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릴 용기를 갖지 못했을까?

 

마르코 복음 12장에는 가난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헌금함 맞은 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십니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는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동전 두 닢을 넣습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12, 43-44)

 

기탄잘리의 거지는 늘 받아야만 하는 자신의 가난에만 마음이 가 있어

마차를 멈추고 미소를 띄며 다가와 손을 내민 왕과의

인격적 만남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들은 허영심으로 하느님 앞에 당당합니다.

자신이 누리는 부가 하느님의 축복이란 믿음에

'난 이만큼 받아 누리고 사노라'며 사람들 앞에 과시하기를 즐깁니다.

반면 그 과부는 하느님께서 자신이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실 것을 믿기에

주머니를 다 털어서라도 감사를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먼저 우리의 모든 것을 바쳐야

은총을 얻을 수 있다는 1차적적이고 계산적인 묵상을 너머

하느님 앞의 우리의 자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우리들 신앙의 모습을 바르게 함을 배웁니다.

왕으로부터 얻어 낼 것만을 생각하는 거지

허영으로 하느님 앞에 떳떳하고 자랑스런 부자,

그리고 하느님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음을 아는,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으로 감사를 드리고픈 과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하루는 하느님의 황금마차를 맞이하는 일이며

두둑한 지갑에서 얼마를 꺼낼까 계산하는 일이며

지금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받으실 하느님의 기쁨을 생각하며

주머니 속 소중한 동전 두 닢을 가만히 촉감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위의 세 사람들 중 누구인가요?

 

.......

그러나 여기,

완전히 다른 묵상이 하나 있습니다.

개신교 목사, John McAuther가 들려주는 묵상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이해와는 달리 신선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그의 묵상이 더 완전성을 갖추었다 할 수 없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더듬어 찾는 이들의 시각을

넓혀 주리라는 생각에 여기에 더합니다.

 

복음 속의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사실 냉정히 살피자면 이 말씀 어디에도 그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의 전부를 봉헌하는 일이

견고한 믿음의 실천임을 뜻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 과부의 봉헌이 감사의 봉헌이었는지,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였는지

성경은 전혀 말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당신께서 관찰하신 바,

그 과부가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깨우쳐주실 뿐입니다.

과부를 칭찬하시는 의도도 없을 뿐더러

부자들을 판단하실 의도도 없습니다.

 

글로 전해지는 성경에서 우리가 전해들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목소리,

예수님의 마음이 그대로 반영되는 어조입니다.

McAuther 목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의 귀로 듣습니다.

그 장면을 살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극도로 아프시다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분노가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그토록 가난한 과부가 당장 음식을 사야 할 돈을 왜 헌금함에 넣어야 하는지,

과연 하느님께서 그 과부의 마지막 동전 두 닢을 기꺼워 하실지

헤아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듣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시스템, 가난한 이들의 마지막 동전까지

거두어 들이는 시스템이 미워하시는 예수님의 분노를 듣습니다.

 

McAuther 목사는 묻습니다.

"어떤 가난한 이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자신이 속한 종교단체에 바치는 일을 목격한다면

당신은 과연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하느님의 종교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

병들어 버려진 이들을 위한 종교이지,

그들의 작은 동전들을 쥐어 짜 제사장들과 부자들을

더욱 살찌우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고,

가난한 이들의 어깨위에 지어진 종교는 결코 참된 종교일 수 없다고

그 목사는 예수님의 분노를 통해 깨닫습니다.

 

성경이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뜻은

같은 부분에서 다른 묵상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 묵상이 자신의 신앙을 살피고 하느님의 마음을 읽기 위한 일이라면

그것으로써 충분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인류의 역사상 성경만큼 많이 분석되고 연구되며

나날이 새롭게 조명되는 책이 없다는 사실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물론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고집하는 일은 없어야 겠지요.

하지만 McAuther목사처럼 진지한 묵상의 결실은

하느님을 더듬어 찾는 이들에게 시각을 넓히는 어떤 깨임이 될 수도 있음을

여유로이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한 권의 책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

날마다 억양과 어조를 달리하시는 하느님의 생생한 음성입니다.

 

하느님은 진정 사랑이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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