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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김웅렬신부(기도의 조건.)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11-29 조회수1,924 추천수2 반대(0) 신고

 


기도의 조건.

+찬미예수님

비가 내리죠?

이제 겨울 문턱에,

가을 끝자락에 와 있습니다.

철이 바뀌면 괜히 센티(sentimental)

해지고 감상적이 되지 않으세요?

가을은 여자가 많이 탈까요?

남자가 많이 탈까요?

추남이라는 말이 있죠?

남자들이 훨씬 더 가을되면

감성적이 되어 버립니다.

오늘 참 은혜로운

말씀이 나왔습니다.

예리코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고 하는

눈먼 거지가 나옵니다.

동네 사람들도 다 알아요,

티매오의 아들이고 앞을 못 봐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거지였다고 직업도 나와요.

오늘 예수님이 바르티매오에게

은혜를 베푸는 과정을 보면서

많은 묵상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는 방법입니다.

제가 몇 단계로 나눠드릴게요.

예수님이 예리코를 지나가시는데,

바르티매오가 조용히가 아니라

소리를 질렀어요.

나자렛 예수님!

제 눈 좀 뜨게 해 주십시오.’

막 소리를 질러 댔어요.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들으셨을까요?

못 들으셨을까요? 들으셨어요.

소경이 소리를 질러대며

자비를 청했지만 예수님은

듣고도 못 들은 척하셨어요.

왜 못 들은 척하셨을까?

목소리만 컸지 내용이 없는

인간들이 많아요.

응답을 즉시 하시지 않으신

이유는 왜 소리를 지르는지.

내 소리를 들을 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따라서 지를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우리들이 하느님에게 큰 목소리로

기도해야 될 때도 있어요,

하지만 큰 목소리든 작은 목소리든

중요한 것은 기도의 내용이

분명히 있어야 돼요.

첫 번째로 진실성,

두 번째로 절박성,

세 번째로 성실성,

마지막으로 필요성이 있어야 돼요.

진실한가? 소리는 지르는데,

그 안에 정말 진실한

내용이 들어가 있느냐?

절박한가?

요번에 저분이 해결해주지 않으면

다시 못 만날 것이라는

절박함으로 기도해야 돼요.

성실한가?

한번 소리 지르고

안 들은 척하니까 아이 뭐야,

안 쫓아다닐래.’가 아니라

저분이 못 들으셨나보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야지하는

성실한 자세가 필요해요.

원망 아니라 내 소리가

아직 전달되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가?

군중심리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해야 해요.

그래서 오늘 복음의 첫 교훈은

예수님께서 소리 지르는 것을

일부러 못 들은 척하셨다.

본당과 교구에도 행사들이 있고.

행사 위주로 흐르다 보면

소리는 큰 것으로 보이죠.

천 명, 이천 명이 모여

큰 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때는 그 내용이 없어요.

주님, 우리들이 모여서

한 목소리로 기도합니다.’

빠져버리고,

헌금이 얼마나 들어왔느냐,

오늘 몇 명이 참석했느냐.'

남으면 안되죠.

많은 이들이 기도하는 척하다가

응답이 없으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걸인들은 습관적으로 자다가도

누가 지나가는 척하면

손을 내 밀어요.

손에다가 돈만 놓아달라고.

그 사람 쳐다볼 필요도 없어요.

우리 기도도 습관적으로

그 안에 내용과 믿음을 담지 않고

할 때가 너무 많아요.

묵주기도 하면서도

레지오 주회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냥 자동으로 하는 것에요.

그 기도 안에 성실성과

진실성과 절박성과 필요성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눈먼 거지의 외침을

왜 못 들으셨겠습니까?

군중을 만나실 때,

예수님의 능력을 제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스쳐지나가면서

먼저 쳐다보는 분이었는데,

예수님의 레이다에 그분이

안 걸렸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쳐달라고 외쳤다.‘

기도하더라고 의심을 하면서 하기에

확신에 찬 기도를 못 합니다.

기도하더라도 손에 뭐가

집어지는 것이 없으니까

성실한 기도를 못 합니다.

기도하더라도 본인도 기도의 내용이

뭔지 모르기에 진실성이

없다보니 전달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그 얘기 아시지 않습니까?

긴 가뭄에 개신교와 천주교가

기우(祈雨)연합기도를 위해

공설운동장에 천여 명 모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천주교식대로 기도하고,

개신교는 개신교식대로 기도했어요.

삼일 째, 별이 총총하던 하늘에

갑자기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쏟아지는 거야.

처음에는 박수를 치고

알렐루야 찾고,

주님이 우리를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좋아했죠.

그런데 비가 막 내리니까

한 동안은 비를 맞다가

비를 피해야죠.

순식간에 비를 피하러 사람들이

순식간에 안쪽으로 피했는데,

그 넓은 운동장에 꼬부랑 할머니가

혼자 우산을 펴고 있어.

사람들이 신기해 죽겠는 거야.

신부님과 목사님이 다가가서 물었어요.

할머니 오늘 어떻게 우산 가져왔어요?’

허허, 신부님 같지 않은 질문하시네.

,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믿음이 없으셔?

비 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으면

당연히 비 올 줄 알고

우산도 준비해 와야지.’

그날 천 명이 모였지만,

999명의 기도를 하느님이

들은 것이 아니라 비 온다고

확신하고 온 그 1명의

할머니 때문에 하느님은

비를 내렸다는 것에요. 아멘.

두 번째로 예수님이

그를 불러 오너라 했죠.

뒤에서 계속 시끄러운데,

목소리를 들어보니까

목소리를 분석했어요.

이 사람은 절박하구나,

성실하구나, 진실 되구나.

정말 나를 필요로 하는 존재구나!’

풍선처럼 크기만 크지 날아가

버리는 헛된 목소리가 아니라

내용이 있는 큰 목소리구나!’

부르러 간 사람이 뭐라고 해요?

용기를 주죠?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우리는 본인 스스로 일어나고 싶어도

못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변 사람이 손 한 번 내밀면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킬 수 있죠.

예수님이 자네 부르시니

우리가 길 안내할 테니까

일단 일어나봐.’

손을 잡아 일으켜

예수님께로 갑니다.

예수님은 군중들 속에서

그를 불러 오너라.’ , 11

만남을 원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생활의

원칙이 하나가 나옵니다.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는

혼자서 오직 예수님과

대면해야 됩니다.

군중을 떠나 혹은 친교시간

이후에도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함께 미사잔치 후

여러분의 손을 잡고 인사하지만.

여러분이 다 가고

사제관에 들어오고 나면,

내 책상 앞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과 11의 만남 뿐 입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헛된 망상이 아니라 반드시

개인 기도에 전념하셔야 됩니다.

공동체 모임에서 주시는

은혜가 있기에 집에 돌아와서

홀로 하느님과 11

만남을 갖지 않는다면

절대 완덕의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형제들과 하는 봉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개인 기도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영적 에너지가 나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적셔주어야 됩니다.

그런 다음, 나를 먼저 적시고

흘러넘친 물이 이웃에게

계속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엇을

하는 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혼자 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대답을 듣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성 생활의 원칙은

모임 기도 후에 반드시

개인 기도를 철저히 해야 된다,

세 번째 교훈. 예수님은

눈먼 거지를 부른 후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죠.

다른 말로 내가 네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뜻입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로 온 환자를

의사는 고칠 수가 없습니다.

온몸이 암으로 차있더라도

희망을 가진 환자에게 의사는

전심전력으로 치료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의사가 볼 때

마음의 병만 고치면 몸뚱이의 병은

병도 아닌 사람이 와서

선생님. 며칠 안에 죽을 것 같아요.

숨도 못 쉬겠고.

심장도 안 뛰는 것 같고.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그 사람을 고쳐줄 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하려면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그리고 미리 앞당겨서

감사드리는 겁니다.

치유된 다음에 감사가 아니라

기도한 내용이 잡힌

다음에 감사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순간

미리 당겨서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길이 안 보이는 순간에도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희망이 안 보여도 미리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몰려 있어도 미리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당신 몇 개월 못 살아요.’라고

선고가 내려도 감사드려야 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일이

좋게 성사가 되면 감사드립니다.

신앙인은 결과를 보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인입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감사드려야 됩니다.

왜냐하면 고통도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오늘 네 번째 복음의 교훈은

바르티매오는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볼 수 있게 되자 신이 나서

자랑하려고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쫓았다.’고 나옵니다.

기적을 받고, 은혜를 받은

첫 번째의 태도는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 어려울 때 마다

하느님 앞에 이런저런

약속을 드립니다.

이것만 해 주시면 주님 따라갑니다.

성당에서 살 겁니다.

성당 화장실 청소는 제 겁니다.’

이렇게 약속을 수도 없이 했건만

그러나 여러분들 그 약속

지키고 사십니까?

실제로 그 어려움 해결해 주시면

우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저절로 된 게지’,

내가 노력해서 됐지 뭐’,

바쁜 양반이 내 일에

신경이나 쓰셨겠어?’

바르티매오는 감정에 들뜨지 않고

바로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뭡니까?

십자가의 길,

환난과 모욕의 길,

바보가 되고 벌레처럼 살고

더러운 것 닦아주는 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 안에서

부활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시고

부활하신 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 왕국은

지상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지금은 입에 써도 먹어야

약이 될 거라 하셨기에

우리는 삼킵니다.

혀에 달콤해도 이것 먹으면

예수님과 멀어져할 때는

입을 악물고 뱉어버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드린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은혜를 베푸시는가를

정리해 드립니다.

첫 번째, 예수님은 큰 소리든

작은 기도든 그 기도 안에

적어도 네 가지를 보십니다.

진실성, 절박성, 성실성,

나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 지

필요성을 보십니다.

그것을 확인하신 후

두 번째로 예수님은 바르티매오와

11만남을 갖습니다.

결국 하느님과의 11 만남이

이루어져야만 친교도 아름답고

또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도

겸손하고 하느님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성의 원칙입니다.

세 번째로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너에게 해 줄 것이

있다고 믿느냐?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희망이라도 있어야 되고,

저분에 대한 믿음이라도

있어야 됩니다.

그 기적 체험하려면 백 프로(100%)

하느님께 의탁해야 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결과를 본 후에 감사가 아니라

기도하는 순간부터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고 감사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은혜 받은 사람들은 바르티매오처럼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이제껏

큰 목소리로만 소리를 질렀지

정작 중요한 것은 빠진 것은 없었나?

예수님과 11의 만남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나?

친교는 열심히 했지만

하느님과 만남보다

세상과의 만남을 훨씬 더

재미있어 하진 않았나?

오늘 은혜가 내리는 길을 말씀을

통해서 주셨음을 믿습니다. 아멘.

2018년 연중 제 30주일(10/28)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photo by - 느티나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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