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18.12.02)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02 조회수1,626 추천수8 반대(0) 신고

 


2018년 12월 2일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예레 33,14-16

14 보라, 그날이 온다.

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게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15 그날과 그때에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16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예루살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제2독서 1테살 3,12―4,2

형제 여러분,

12 여러분이 서로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

여러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처럼

주님께서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시며,

13 여러분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시어,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재림하실 때,

여러분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흠 없이 거룩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4,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끝으로 우리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는지

우리에게 배웠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욱더 그렇게 살아가십시오.

 2 우리가 주 예수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지시해 준 것들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음 루카 21,25-28.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5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학창시절의 한 친구가 생각납니다.

이 친구에 대한 기억은 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입니다.

솔직히 하는 행동들을 보면

별로 똑똑하지 않은 것 같았고,

또한 성적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공부만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공부하고 있는 이 친구를

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죽어라고 공부만 하니?

좀 놀기도 해야 하는 것 아냐?”
친구는 무심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노력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될까봐.”
친구의 아버지는 사업 실패 후에

가족 부양을 위해서 힘든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종종 “너희 때문에

마지못해 이 일을 하는 거야.”

라는 푸념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일이지만 가족 때문에

하고 있다는 말이 너무나

 듣기 싫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가족 부양을

잘 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다는 것이었지요.
졸업 후에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명문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친구였으니까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 맞는 노력은

필수 조건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혹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모두가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노력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내 멋대로 살아간다면 또한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에 대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다면

과연 자신이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은

필수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종말을

 말씀하시고 이를 위한 준비로

한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바로 “늘 깨어 기도하여라.”

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님의 뜻을 알 수가 있으며

그 뜻을 실천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가까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기도하고 있을까요?

혹시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할 생각이 없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주님께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교회력으로 새해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 우리는

각종 결심을 세우게 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새로운 결심을 한 번

워보시면 어떨까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노력을 말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보다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

(아인슈타인)


갑곶성지의 대림환.

“적당히 살아!”

어느 선배 신부님께

요즘 강의와 글 쓰는 것으로

너무 바빠서 힘들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적당히 살아!”
적당히, 대충 살라는 말을

종종 듣기는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이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양심상 또 제 성격상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힘들다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모순일까요?
사실 ‘적당히’라는 말이

 우리 삶 가운데 참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님의 일은 ‘적당히’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일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적당히’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애인에게

 “나는 너를 적당히 사랑해.”

라고 말한다면,

“나는 앞으로 너를 적당히 사랑할거야.”

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우리 헤어지자.”라는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에는 ‘적당히’가 아니라,

‘온 몸을 다해, 최선으로, 온 힘으로’ 등의

 최고 표현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결국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적당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다시 한 번

힘을 내어서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완성은

우리들이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적당히 살지 않으셨던 김대건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