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 생활] 전례 주년과 신심 생활 I 전례 주년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다림을 시작으로 그분을 통한 구원의 역사를 기념하고,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 여정을 1년 주기 속에 담은 전례의 흐름을 가리킨다. 교회에서 거행되는 다양한 전례와 축일들은 이 전례 주년을 기초로 하며, 전례 주년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행적을 바라보고 그분께서 몸소 이룬 구원의 업적을 온전히 묵상하며 그 신비에 동참하게 된다. 전례 주년은 예수 부활 대축일과 예수 성탄 대축일을 각각 축으로 사순과 부활, 대림과 성탄 그리고 연중 시기로 나뉘게 되는데, 각 시기에 따라 전례 안에서 기념되는 구원의 다양한 신비들이 바로 신심 생활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대림 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이자 회개와 더불어 희망을 기념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 제대 앞에는 네 개의 대림초가 마련되고, 매주 하나씩 밝히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힐 빛으로 오시는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 속에서 그분을 맞이할 합당한 준비를 하게 된다. 이러한 대림초는 신심의 차원에서 ‘대림환’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는데, 대림환에서 네 개의 초는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기다려 온 4000년의 역사와 4주간의 대림 시기를 표현하는 동시에,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루카 1,78)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대림환의 둥근 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믿음으로 하느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나타내고, 대림환을 장식하는 푸른 나뭇가지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될 신앙의 활기와 생명력을 표현한다고 전해진다. 성탄 시기가 가까워지면 각 성당이나 가정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상징하는 ‘구유’를 꾸미게 된다. 이러한 신심 전통은 고대 성당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통해 본격적인 교회의 신심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다. 1223년 성인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인간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강생의 신비를 더 깊이 묵상하고자 교황의 허락을 얻어, 그레치오(Greccio)라는 작은 마을에서 과거 베들레헴 마구간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성인이 처음 만든 구유는 요즘 볼 수 있는 화려한 구유와는 달리 매우 소박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특별한 인물상이나 어떠한 장식도 없이 건초더미가 담긴 구유 옆에 소와 나귀를 배치한 채, 성탄의 신비를 기념하며 미사를 봉헌했다고 전해진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 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라는 이사야서 1장 3절의 말씀을 그대로 묘사해 놓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구유는, 화려함으로 장식된 현대적 구유와 세속적 기쁨으로 혼재된 성탄의 분위기와는 달리 강생의 신비를 단순하면서도 더 강렬하게 드러낸다. 앞으로 맞이할 성탄 준비에서는 외적 구유만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을 올바로 모실 내적 구유까지 함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2023년 10월 15일(가해) 연중 제28주일 인천주보 3면, 김태환 요셉 신부(연희동 본당 주임)] [신심 생활] 전례 주년과 신심 생활 II 한국에서는 낯설지만, 서양권 교회에서는 주님 공현(公顯) 대축일을 전후하여 각 집을 방문하며 ‘집 축복’을 하는 신심 전통이 있다. 주님 공현의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라는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음과 동시에 아기 예수께서 참 하느님이심이 드러난 사건이다. 그래서 인간이 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희망과 염원이 집 축복 예식 안에 담겨 있다. 집 축복 예식은 기도와 함께 축복된 분필로 집 대문 위나 문설주에 구원의 십자가를 표시하고 그 해의 연도, 그리고 아기 예수를 찾아 그분이 구세주이시며 참 하느님이심을 증거하고 경배했던 세 명의 동방박사 가스파르(Caspar), 멜키오르(Melchior), 발타사르(Balthasar)의 이름 첫 글자들을 조합하여 적는데, 올해를 예로 든다면, ‘20+C+M+B+23’이라고 적게 된다. 특히 C+M+B는 ‘그리스도께서 이 집을 축복하소서(Christus Mansionem Benedicat)’라는 의미로도 해석되며, 그 집에 사는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의 축복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앙인들의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자 피난처임을 묵상케 한다. 사순 시기는 인간의 죄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로, 이 시기의 대표적 신심 행위로 ‘십자가의 길(Via Crucis)’이 있다. 초세기 문헌에 따르면, 예루살렘을 방문한 순례자들이 빌라도 관저에서부터 예수께서 돌아가신 골고타까지 행렬하며 기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중세기에 당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주제로 한 다양한 신심 행위들을 하나로 모아 ‘십자가의 길’이 정리되었다. 물론 현재와 같이 14처 형식의 기도는 그 뒤에 이루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동참하는 신심의 전통은 초세기부터 한결같이 이어져 왔다. 이러한 ‘십자가의 길’의 전통은 또 다른 형태의 신심 행위를 낳게 되는데, 당신 아들의 수난과 죽음의 여정에 누구보다도 깊이 동참하시리라는 시메온의 예언(루카 2,34-35 참조)처럼 그리스도의 고통 속에 함께 했던 성모 마리아의 믿음의 여정을 묵상하는 신심이다. ‘어머니의 길(Via Matris)’ 혹은 성모칠고(聖母七苦)라고 불리는 이 신심 전통은 이집트 피난 사건, 시메온의 예언, 성전에서 예수를 잃어버리심, 십자가를 지신 예수와의 만남,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죽음, 돌아가신 예수를 안으심, 돌아가신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 순간까지, 모든 순간을 믿음으로 감수하신 성모님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동참하는 모든 신심 전통의 목적은 단순히 인간의 죄를 대신한 구세주의 고통에 슬퍼하는 것만이 아니라, 부활에 대한 희망 속에서 그 고통에 대한 자발적이고 실질적인 참여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2023년 10월 22일(가해) 연중 제29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인천주보 3면, 김태환 요셉 신부(연희동 본당 주임)] [신심 생활] 전례 주년과 신심 생활 III 부활 시기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시작으로 성령강림 대축일까지 50일의 여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 교회는 구원의 완성이자 신앙의 핵심인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며, 부활을 통한 기쁨과 활력 그리고 구원의 동참에 대한 희망을 묵상하게 된다. 이러한 부활의 신비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는 신심 기도로 ‘빛의 길’이 있다. 아직 한국 교회에서는 낯설지만, 사순 시기의 대표적 기도인 ‘십자가의 길’에 비견될 만한 기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부터 성령강림 사건에 이르기까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과 가르침 등을 묵상토록 돕는다. 사실 이러한 기도의 필요성과 의의는, 교회에서 승인된 다양한 형식의 ‘십자가의 길’ 안에서 이미 발견된다. 예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완성인 부활의 신비까지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15처)도 있고, 최후의 만찬을 시작으로 부활 사건으로 끝맺는 ‘십자가의 길’(16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시도와 염원들은, 성 칼리스토 카타콤 벽에 새겨진 작품에서 얻은 영감과 살레시오회의 사비노 팔룸비에리(Sabino Palumbieri) 신부의 노력으로 빚어진 ‘빛의 길’로 정리되고, 1990년 성 갈리스토 카타콤에서 첫 ‘빛의 길’이 장엄하게 봉헌된다. 빛의 길은 ‘십자가를 통하여 빛으로(per crucem ad lucem)’ 나아가는 신앙의 신비와 구원 여정 속에서 그 일부를 차지하는 고통과 희생의 체험 중에도, 부활의 참된 가치인 해방의 기쁨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전하고 있다.(『대중신심과 전례 지침서』 153항 참조) 빛의 길이 담고 있는 각 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마태 28,5-6) 2처. 제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함(요한 20,6-8) 3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심(요한 20,16-18) 4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심(루카 24,13-15) 5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빵을 쪼개며 당신을 드러내심(루카 24,30-31) 6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아 계심을 드러내심(루카 24,38-39) 7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심(요한 20,22-23) 8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의 믿음을 굳건히 하심(요한 20,27-28) 9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스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요한 21,7.13-14) 10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부여하심(요한 21,15-19) 11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 사명을 맡기심(마태 28,19-20) 12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사도 1,9-11) 13처. 제자들이 마리아와 함께 성령을 기다림(사도 1,13-14) 14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된 성령을 보내심(사도 2,1-4) 이 빛의 길을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죄의 노예에서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녀로 살아가는 부활의 은총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10월 29일(가해) 연중 제30주일 인천주보 3면, 김태환 요셉 신부(연희동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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