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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국천주교회 희망의 아이콘 최양업(토마스) 신부 선종 157주년 추모(11)
작성자박관우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15 조회수1,411 추천수0 반대(0) 신고

최양업 신부가 험난한 여정속에서도 전교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외국 신부같이 외모적으로 눈에 뜨지 않는 방인 사제라는 점도 있었지만 다른 요소로는 은신처였던 진천 배티 산골과 문경 새재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최양업 신부는 1852년부터 1854년 사이의 사목활동에서 체포의 위기와 공소가 습격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56년 3월 2일 조선 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프티니콜라 신부의 입국은 최양업 신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한편 1858년 교회의 정세는 흉년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과 혜성의 출현으로 민심이 악화되어 장차 조선이 천주교의 나라가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였으니 구체적으로 그의 관할 구역에 8개의 교우촌이 생겼다는 것이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1860년 최양업 신부는 경신박해로 인하여 경상도 죽림의 외딴 공소에서 포졸들에게 완전히 포위되는 급박한 상황까지 전개되었으나 결국 체포되지는 않았다.


경신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외부인들의 인식은 물론이요, 예비자들의 마음마저 흔들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는데, 신자들은 슬픔과 실의에 가득차 있었고 특히 외부인들의 신자들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과 더불어 콜레라와 기근이 겹쳐서 당시 교회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최양업 신부는 목자로서 신자들에게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으며, 또한 박해로 입은 고통과 시련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쏟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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