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믿는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나안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작성자윤태열 쪽지 캡슐 작성일2018-12-21 조회수1,846 추천수1 반대(0) 신고

† 믿는 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가나안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약 2년 만에 오늘 처음으로 굿뉴스를 찾았고, 새 글을 올린다. 가톨릭 굿뉴스의 구성도 생소하고 모든 것이 새롭게 단장된 듯하다. 지금 보니 지난 날(2016년) 내 글의 내용에 대하여 질문하는 쪽지도 있었다. 또 어느 분의 도전적인 ‘글의 비판’도 기억이 나고, 당시에는 씁쓸한 말의 유희 같고 시간의 낭비라고 여겼기에, 또 나를 되돌아보기 위하여 떠나기로 작정한 것이다. 오늘 우연히 다시 시작하면서 굿뉴스를 이용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린다. “사랑합니다.”>

 

몇 일전 우연히 어느 월간지를 보다고 재미있는 표현을 보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가나안 신자’라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몇 해 전부터 인터넷에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신은 ‘가나안 신자’란 표현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홍수에 마실 물이 없다는 격언이 있다. 홍수가 나면 온통 물바다가 되지만, 정작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은 없다는 말이다.

 

 

내가 자주 경고했듯이, 오래전부터 한국 교회에 “말씀의 기근”이 찾아왔다.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 또한 전혀 다르지 않다. 동네마다 거리마다 교회들이 수없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정작 생명이 넘치는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몇 해 전부터 이상한 현상이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교회를 떠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수백만 명에 달한 것이다. 그런 분들을 ‘가나안 신자’라고 말한다고 한다. 왜 교회를 더 이상 나가지 않기로 결정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나안 신자’라고 부를까? ‘가나안’ 이란 단어를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이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 신자’란 교회에 ‘안나가’ 는 그리스도인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지만,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찾아 방황하듯이, 오늘날 참된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뜻한다. 왜 이렇게 많은 신자들이 교회를 떠날까? 정작 더욱 심각한 것은 비록 아직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수많은 교인들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강론에 만족하지 못하며, 교회의 세속화와 인본주의와 이념에 빠진 성직자들의 행태에 실망해서 고민하고 있다.

 

 

교회를 떠난 ‘가나안 신자’들이 지금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로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서점에 가면, ‘가나안 신자’에 대한 여러 책들이 나와 있는데, 어느 책에는 다음과 같은 간증이 실려 있다고 한다. ‘내가 교회를 떠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 남아있는 이유가 오히려 궁금합니다. 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남아있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관성으로 남아있는 것인가요?’

 

 

‘가나안 신자’들은 말씀과 생명이 없는 교회에 남아있는 교인들을 오히려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런데 그들은 천주교니 개신교니 교파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오직 영적인 허기짐을 채우기 위하여 생명의 말씀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매주 수많은 ‘가나안 신자’들이 유튜브에 모여들어 살아있는 말씀을 찾으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교회의 부패와 불의를 보면서 매주 교회 가서 헌금을 내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왜 우리가 지성적이지도 않고 성경과 맞지도 않는 수준 낮은 강론이나 의식이나 교리를 매주 들어야만 합니까? 예배를 꼭 건물 속에서 드려야만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십니까?’ 놀랍다! 얼마나 교회에 실망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

 

 

‘가나안 신자’를 생각할 때마다 공감과 깊은 동정과 눈물이 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나”의 체험이며, 오늘의 변명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이러한 나의 고뇌가 ‘어느 가톨릭평신도의 하느님말씀묵상’ 이라는 까페를 열게 한 동기였다. 이 까페가 ‘가나안 신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믿음의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말씀의 진실에 도전’하는 용기를 내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전문은 http://cafe.daum.net/yoondaniel 을 참고하시기를!>

 

‘가나안 신자’ 들은 자신이 다녀야할 새로운 교회를 찾고 있다는데, 그들이 교회를 정할 때는, 그 교회에 하느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세워져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가톨릭교회는 너무나 심각하다. 미사 중 ‘영성체’가 크라이막스로 제정되어 있으므로, 말씀 전례의 독서자인 평신도들은 말씀의 내용도 잘 모르면서, 곱게 차려입고, 조심스럽게 독서대로 올라가 1독서, 2독서를 읽어 댄다.

 

 

사제의 복음 봉독 후에 이어지는 강론은 온통 정치색이거나 사회교리거나 아니면 수준 낮은 성경지식을 평신도들이 마치 유치원생이기나 되듯이 한줌의 부끄럼도 없이 늑살 좋게 말해댄다. 그곳에 하느님의 살아있는 생명이 숨 쉬고 있을까? 미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각종 의식과 모양과 외양만 화려할 뿐,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말씀이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내 믿음이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 같아 탄식이 절로 나온다.

 

물론 존경하는 사제들도 많이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심각한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하느님 앞에서 직언하고, 교회 정화를 위하여 행동하는 분은 눈을 닦고 보아도 몇 분이 안 된다. 아마도 안주하거나, 무관심이 하거나, 아니면 가면극을 벌리고 있을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곧 거짓이 진실을 밀어 내고 안주인 행세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영적상담이나 위로받고 싶은 고난 중에 있는 믿는 이들은 갈급한 생명을 채우기 위하여 전국에 용하다는 기도원이나 수도원이나 성령세미나를 찾아다닌다. 이런 신자들을 본당 신부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본당 신부들의 영적상담능력은 제로에 가깝다. 말씀과 체험과 그기에 걸맞은 삶이 없는데, 어떻게 고난 받는 신자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어떻게 이단들이 활보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는가? 주교회의 의장이란 사람이 백두산에서 대통령 옆에 선 김정은이와 악수하고 ‘교황을 초청할 것’을 요청하는, 자기들만의 비밀스러운 각본에 의해 연출된 동영상이 공영방송전파를 타면서, 소위 대통령의 바티칸 교황방문이라는 ‘교황 이용하기’ 작전이 교묘히 전개된 것이다. 그들은 교회 내 질서도 무시하고 진실을 가장했으며 왜곡된 가짜 뉴스를 양산했고, 국민들과 신자들을 기만하였다.

 

 

철지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에 근접한 해방신학에 미친 자들이 한국가톨릭 신부들의 70%에 육박한다고 한다. 참으로 기괴하다. 가톨릭이 설립한 그 많은 복지단체, 신문사, 수많은 대학과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마수가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 살아있는 주님은 부정하고 인본주의에 물든 교회, 마치 바람 앞의 등잔불처럼 위태롭다.

 

 

이미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신자’ 들이 늘어남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지 모른다. 개신교는 더 썩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포기했을 것이다. ‘가나안 교인’들은 아마도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생명의 말씀을 갈급하게 찾아보았지만, 가는 곳마다 부패와 세속화와 이단들을 보게 되었고, 생명의 말씀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초대교회시대 이래 1300년의 중세종교암흑시대를 거쳐 지금부터 600년 전 종교개혁운동과 르네상스시대를 지나, 이제 21세기를 맞아 우리는 부패하고 세속화되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성직자라는 계급”의 암 덩어리를 직접 보고 듣고 맛보게 된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그들 스스로가 교만하게 즐겨온 ‘성직이라는 권위와 명예’라는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만 것이다.

 

 

이 글은 더욱 충격적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회는 벽돌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 않기로 했습니다.’ 벽돌 교회“란 무슨 뜻인가? 교회 안에 하느님의 임재와 생명의 말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오늘날 교회는 벽돌로 만든 건물에 불과합니다. 교회란 조직도 아니고 건물도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이 충만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 하느님의 분명한 말씀이 사라져버렸고 부도덕과 세속과 이념만이 창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벽돌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교회를 실망해서 떠났지만, 성령께서 ‘가나안 신자’들의 앞길을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오늘날이 바로 나라와 교회와 그리고 ‘가나안 신자’들을 위하여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할 때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진리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도무지 관심도 없고 문제의식도 없는 맹목적이고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교회는 사람들의 구원과 생명의 성장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으로 믿는 이들이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교회를 떠나고 있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날까?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현상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기갈” 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아모스8,11-12절은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예언자 아모스가 말세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말씀의 기근”이 마지막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덮친 것이다(묵시록 3장). 하느님의 말씀이 더 이상 없고,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찾고 구하는데도 하느님 쪽에는 그저 소름끼치는 침묵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영적 목마름에 지쳐서 쓰러질 것은 자기들의 삶을 우상들에게서 찾았지 하느님에게서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아모8,13-14; 5,4-6절).

 

 

오늘날 교회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정작 생명의 말씀이 사라진지 오래되어 버렸다. 마른 뼈가 되어버린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생각해 보라! 교회와 성직자들은 많지만, “예수의 소문”이 나는 교회와 “성령의 통로”가 되는 진정한 사역자는 눈을 씻고 보아도 발견할 수가 없다.

 

 

우리가 지금 말씀의 기근 속에 살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교회도 나가고 설교도 계속 듣고 있지만, 내 안에 생명의 흐름이 없고 삶에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지금 말씀의 기근 속에 있는 것이다. 말씀의 기근이 오면, 마음이 냉랭해지고, 영혼이 시들어서 생명이 죽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가나안 신자’ 들은 살기 위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비로우신 주님이시여! 좌경화와 심각한 경제난을 맞은 이 나라와, 생명의 말씀이 사라지고 ‘주님을 믿지 않는’ 주님의 몸된 교회와, “살기 위하여”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신자들’ 곧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버리지 마옵시고,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옵소서(시편23,2).”

주님의 몸된 교회가 병들어 썩어가고 있나이다. 우리로 하여금 나라와 교회와 ‘가나안 신자들’을 위하여 엎드려 기도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